예전 한국에 상영되었던 영화 가운데 '에이리언 vs 프레데터' 란 작품이 있다. 마치 스타크래프트의 저그 종족과 프로토스 종족을 연상시키는 두 외계 생명체가 지구에서 싸우는 내용이다. 사실 두 종족 모두가 이전 작품에서는 지구인을 상대로 잔학성을 과시했었다. 지구인은 그야말로 살아남기 위해 두 종족에 맞서 싸웠다. 그런데 이번에는 두 종족끼리 싸우는 것이다. 이 영화의 카피문구가 재미있었다.


"누가 이겨도 미래는 없다!"

맞는 말이다. 이 두 종족 가운데 누구가 이기든 결국 지구인을 죽이려 할 것이다. 결국 지구인에게 남은 건 절망뿐이다. 하지만 그래도 희망이 있다면? 가장 좋은 것은 영원히 두 종족이 서로를 죽이지 못하고 엎치락뒤치락 하는 것이다. 지구인은 그 사이에서 적절히 불리한 쪽에 약간 힘을 실어주며 살아갈 수도 있을 것이다.

컴퓨터에서 유명했던 한컴의 워드프로세서 '한글'이 드디어 아이패드용으로 나왔다. 나는 예전부터 아이패드를 비롯한 태블릿 용으로 이것이 나와야 한다고 강조한 바 있다. 우선 출시관련 뉴스를 소개한다.(출처) 


사진출처: 미디어잇 
 
아이패드용 한글도 선보였다. 한컴은 한글 뷰어를 아이패드용으로 만든 바 있다. 이번 한글은 말 그대로 한글 워드프로세서를 아이패드에 옮긴 것으로 직접 문서를 만들고 편집할 수 있다.
 
특히 워드프로세서에서 많이 쓰는 표 편집이 자유롭고 모양도 여러 가지 준비했다. 글자 크기와 색깔을 바꾸고 여러 가지 스타일을 표현하는 것도 자유로운 데다가 글꼴 바꾸는 데 인색한 아이패드에서 함초롱 글꼴을 쓸 수 있는 것도 눈에 띈다. 잠깐이지만 직접 써본 한글은 키보드만 준비하면 외부에서 필요한 만큼의 문서 작업에는 노트북보다 더 빠르고 직관적으로 접근할 수 있다는 느낌을 줬다.

이렇게 만든 문서는 HWP 파일로 자유롭게 공유된다. 아직 베타버전이지만 4월경에 출시할 예정이다. 또한 한글 워드프로세서에 이어 한셀, 한쇼 등 오피스 프로그램들을 아이패드로 옮기겠다는 계획이다. 한컴은 국내 아이패드 환경에서 애플의 iWorks 이상의 편리함을 제공하겠다고 자신하고 있다.


내 바램으로는 기왕이면 태블릿 뿐만 아니라 가능하다면 스마트폰, 맥의 OS X 라이언, 리눅스 버전으로도 나왔으면 한다. 나는 한컴의 한글이 가능한 한국에서 널리 퍼졌으면 한다. 

이런 내 의견과는 정반대로 이것이 그다지 바람직하지 않고 오히려 부작용만 나올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요즘 좋은 IT글을 많이 올리고 있는 후드래빗님의 글이다.(출처) 


이 내용도 분명 합리적이다. 넓게 본다면, 그리고 우리가 특별히 한국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고 글로벌 소비자라고 생각한다면 이 말은 분명 옳다. 하지만 특별히 애국심 마케팅 같은 걸 제쳐두더라도 한국 소비자란 관점에서 본다면 어떨까?

아이패드용 한글, 우리에게 필요한 이유는?

지금 세계의 워드프로세서, 오피스 시장은 한마디로 독점 그 자체다. 마이크로소프트의 MS워드, 오피스가 점령하고 있다. 알파벳을 쓰는 영미권은 말할 것도 없고 유럽과 아시아 등 어디서든 워드의 자국판만 쳐다보고 있다. 90년대까지는 어떻게든 자국 워드프로세서 '이치다로'로 버티던 일본마저 굴복했다. 지금 자국 워드프로세서가 그나마 범용적으로 쓰이는 나라는 한국 뿐이다. 북한 같은 특수한 경우를 제외한다면 말이다.


이것이 무슨 의미를 지니는 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한편으로는 hwp 란 독자파일 포맷이  관공서와 교육기관을 중심으로 공급되어 MS워드를 중심으로 쓰고 있는 기업과 호환에 불편하며 혼란을 초래한다. 하지만 반대로 한컴의 한글이 살아있기에 한국은 유일하게 MS가 워드프로세서에서 큰 소리를 치거나 횡포를 부리지 못하는 나라이다.

이것은 특히 가격정책이나 불법복제 정책에서 드러난다. 예전 일이지만 MS워드를 단품으로 지극히 저렴한 가격에 내놓기도 하고 한글 맞춤법 검사기를 재빨리 채택하기도 했다. 한컴의 한글이 구현하는 좋은 기능은 다소 시간과 비용이 들더라도 반드시 MS워드도 채택한다. 또한 한컴 한글 이상으로 무리하게 비싸게 출시하지도 못한다.

한글은 여러모로 개성적인 언어이다. 예전의 조합형과 완성형 논란에서 한컴 한글은 다양한 형태 구현과 창제원리를 따라 조합형을 썼고, MS워드는 그냥 코드방식에 끼워맞춰 구현하기 쉽고 보기가 좋은 완성형을 썼다. 나중에 이 둘은 상대의 장점을 받아들였다.



만일 한컴 한글이 없었다면 MS워드는 그다지 시장도 크지 않고 손만 많이 가는 한글에 이처럼 공을 들이지 않을 것이다. 대충 내놓아도 경쟁 상대가 없기 때문이다. 한동안 경쟁상대가 없기에 발전을 정지한  웹브라우저 익스플로러를 생각해보자.

한컴의 한글이 필요한 이유는 간단하다. 비록 호환성이 부족해질 지라도 그것이 좀더 한국 소비자가 대접받을 수 있는 길이기 때문이다. 한컴 한글이 완전히 이기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지만 MS워드가 한국시장을 통일하는 것도 위험하다. 우리는 지금 에이리언과 프레데터의 싸움을 보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사실 호환성만 따진다면 맥에도 애플의 페이지스나 키노트가 왜 있어야 하겠는가? 플랫폼을 가리지 않고 모조리 워드와 오피스, 파워포인트로 통일하면 되지 않겠는가? 하지만 그게 아니다. 적절한 다양성은 항상 소비자에게 선택의 기회를 준다. 그것이 바로 내가 아이패드용 한글을 반기는 가장 중요한 이유다. 

마지막으로 나는 귀찮다며 MS워드만 쓰면 된다는 사람에게 묻고 싶다.

과연 한컴 한글이 사라지고 나면 마이크로소프트가 한국을 더 중요하게 여겨줄까? 경쟁이 이미 끝나고 선택의 여지조차 없게 되었는데 한글은 소중하죠. 하면서 한글의 특성에 특화된 기능을 빨리 넣어줄까? 한컴 한글이 유의미한 점유율을 가지고 있는 것과 없는 것 가운데 어떤 것이 보다 우리에게 좋을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