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거에게 있어 정치인을 만난다는 것은 성큼 내키는 일이 아니다. 특히 IT평론가인 나에게 있어서는 더욱 그렇다. 분명 나에게도 정치적 성향이 있긴 하다. 하지만 굳이 IT를 논하면서 내보이고 싶지는 않기 때문이다. 차라리 정치 포스팅을 따로 쓰면서 당당하게 표출하고 싶다.


김문수 경기도지사와 블로거와 만나서 대화를 나누는 자리가 있었다. 사실 나는 경기도민이 아닌 터라 굳이 이 자리에 참석할 필요가 있나 싶었다. 그렇지만 하나의 테마가 나를 이 자리로 이끌었다. 그것은 바로 얼마전에 인터넷에서 엄청난 화제를 몰고 왔던 사건인 119 소방서 전화 사건이었다. 그 사건의 개요는 이랬다. (관련뉴스 "나 도지사라니까"vs"그래서?")


김문수 도지사가 어떤 필요성을 느끼고는 119 긴급전화를 걸었다. 그리고는 도지사 김문수입니다. 라고 신분을 밝힌 것이다. 그런데 소방관은 용건도 없이 대뜸 도지사라는 상대에게 침묵했다. 장난전화라고 생각한 것이다. 김문수 도지사는 도지사입니다 라고 계속 말하고는 다음 대응을 기다렸다. 반면에 소방관은 그래서요? 라고 말하면서 용건을 재촉했다. 서로의 핀트가 엇나갔다. 결국 도지사는 관등성명을 대라고 했는데 이 역시 장난전화로 생각했는지 아니면 당황했는지 119 소방관이 그냥 전화를 끊어버리고 말았다.


이건 어떻게 보면 그냥 단순 해프닝이다. 그렇지만 워낙 관심이 몰리다보니 뜨거운 이슈가 되었다. 그리고 나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이것이 119 콜센터라는 IT시스템에 관련된 사건이라는 것이다. 정치성향을 떠나서 119 시스템이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에 대한 진지한 생각을 해보고 도지사의 의견을 들을 수 있는 자리였기 때문이다.



수원의 여성비전센터에서 3월 6일에 이뤄진 블로거데이였다. 김문수 도지사는 들어오면서 악수를 건넸고 명함을 건네주었다. 점자가 명함에 박혀있는 점이 이채로웠다. 장애인에 대한 배려라는 점은 좋지만 과연 시각장애인에게 명함 자체가 어떤 의미가 있는지에 대해서는 약간 의문이다.


부드러운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서일까. 블로거데이는 국악 공연부터 시작되었다. 문화가 꽃피는 지자체로서 자신감을 내보이려는 듯 했다. 덕분에 카메라를 앞에 두고 긴장했던 마음이 조금이나 풀어졌다.


이어서 김문수 도지사와 블로거의 대담이 시작되었다. 취업이나 각종 경기도의 시책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했다. 초반은 비교적 차분한 분위기였다. 6년 넘게 재임한 경기도지사답게 날카로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매우 능숙했다. 전체적으로 매우 무난한 대답이라고 볼 수 있었다.


그렇지만 이런 부드러운 진행 가운데 119 사건에 대한 언급이 등장했다. 김문수 도지사는 처음에는 말을 아끼려는 듯 간단히 대답했다. 그렇지만 구체적으로 더욱 자세한 질문과 대답이 이어지자 조금 더 속에 있는 말을 끄집어냈다.


나는 이 문제를 단순한 정치적 문제가 아닌 시스템의 문제라고 생각했다. 그러기에 예정에 없는 추가질문을 위해 손을 들어서 질문했다.
 
Q:  도지사님의 해명, 잘 들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맞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점은 다른 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전방에 근무할 때 초병교육을 받으면서 이런 교육을 받았습니다. 어둠속에서 누가 다가올 때 '누구냐?' 라고 묻고는 암구어를 외칩니다. 이때 설령 상대가 '대대장이다.' 라고 하든 '대통령이다.' 라고 하든 확인이 안되면 체포하라고요.
그런데 지금 119 소방관이 전화로 음성만 들었는데 '도지사입니다.' 라고 하셨습니다. 전화음성에 무슨 공인인증서가 달린 것도 아닌데요. 그것만으로는 확인이 안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대통령과 목소리가 비슷한 사람이 전화를 걸어 '대통령입니다.' 라고 하면 '아, 예 그렇습니까, 대통령님!' 이라고 해야합니까?

이에 대한 김문수 도지사의 대답은 이랬다.

A: 119 소방관 규칙에 의하면 어떤 경우라도 전화를 받을 때는 관등성명을 대도록 되어 있습니다. 나는 그런 규칙을 어긴 점을 문제삼은 것입니다. 따라서 이건 초병의 경우와는 다릅니다.

이어서 이 문제에 대해 상당한 시간에 걸쳐 뜨거운 논의가 오갔다. 그 과정을 통해서 나는 김문수 도지사와 블로거 사이에 119 시스템을 바라보는 시각의 차이가 상당하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이 차이가 바로 119 사건을 만든 것이었다.


사람은 자기가 살아온 인생을 통해 세상을 본다. 이것은 옳고 그르고를 떠나서 당연한 것이다. 책이나 교육을 통한 이론보다는 결국 그것을 실천하고 시행착오를 겪어가면서 습득한 경험이 보다 진실에 가까운 것이니까 말이다. 이제부터 이 사건을 포함해 내가 느낀 점을 말해보겠다.

김문수 도지사, 119 시스템이란 무엇일까? 


김문수 도지사에게 있어 중요한 문제를 해결해주는 것은 체계적인 시스템이 아니다. 인간의 유연함과 따스한 배려이다. 어떤 면에서 지극히 고전적이고 동양적인 인치에 가까운 면이다. 그러니까 소방관이 긴급한 전화를 받기 위해서 대기하고 장난전화를 걸러내서 효율을 높이기 위한 일련의 시스템은 중요하지 않은 것이다. 

도지사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상황이 발생했을 때 어떻게든 기능을 다해야한다는 점이다. 즉 경기도의 119 총책임자인 도지사가 그 점검을 위해서 전화를 걸었다. 그것은 사실 긴급한 용건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 시스템이 중요한 게 아니고 그런 에상치못한 상황에도 응하는 자세가 있어야 진짜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도울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세상의 문제점을 해결하는 데는 크게 두가지 방법이 있다. 시스템을 더욱 정교하게 강화하고 철저히 지켜서 해결하려는 방법, 반대로 시스템이 아닌 개개인의 역량과 노력으로 해결하려는 방법이다. 가난한 사람을 돕기 위해 유럽은 세금을 더 많이 거둬 복지정책을 편다. 반대로 미국은 부자들이 세금을 거부하고 그 돈으로 재단을 세우고 기부를 한다. 어느 쪽이 옳고 그르다고만은 판단하기 어려운 방법론의 문제다.


이날 도지사와 119 시스템에 대한 담론을 나누면서 느낀 점은 그가 동양적 군주론에 입각한 정치철학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시스템이 메인이고 사람이 보조한다기 보다는 사람이 메인이고 시스템이 보조한다는 것이다. 소방헬기 이용문제에 대해서도 도지사는 그것이 적법한지 그런 시스템 적 면보다는 그렇게 함으로서 실질적으로 도정과 도민의 생활에 도움이 된다는 것을 강조했다.


이날의 만남은 이런 점을 파악했기에 상당히 유익한 자리였다. 그저 뉴스나 인터넷을 통해서만 보아온 김문수 도지사의 모습으로는 이런 점을 전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가 한때 택시를 몰며 직접 승객들과 소통했다는 점을 비롯해서 소탈하게 뒷풀이 자리까지 참석해서 긴 시간 대화를 나눴다는 점으로 봐서도 그렇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선과 악이 아닌, 어떤 게 더 나은 방법인가에 대한 많은 고민을 하게 된다. 그리고 그 가운데 선택을 하게 된다. 김문수 도지사의 정치철학은 그의 인생으로 인해 형성된 것으로 누가 뭐라고 할 수 있는 게 아니며 옳고 그른 문제는 아니다. 다만 선출직 정치인으로서 그런 철학을 피력하는 그를 선택하느냐 아니냐는 오로지 투표권을 가진 시민의 몫이다. 


일반적으로 후진국에 가까울 수록 사람을 선호하고 선진국이 될수록 시스템을 선호한다. 하지만 한국은 전통적으로 시스템보다 사람을 더 믿어왔다. 과연 지금 대한민국에 있어서 필요한 것은 권력을 가진 자의 따스한 배려와 노력일까. 아니면 차갑지만 공정하게 모두를 대하는 시스템일까. 김문수 도지사와 119 시스템을 통해서 한번쯤 생각해보았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