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해외에 나가면 애국자가 된다고 한다.
나도 아직까지 해외여행은 단 한번 밖에 가보지 못했다. 하지만 확실히 애국자까지는 아니어도 외국에 나가는 순간부터 내가 한국인이라는 것을 의식하게 된다. 전혀 생소한 언어를 쓰는 이방인으로서 한국이란 나라가 외국인에게 어떻게 보이게 될 지 신경을 안 쓸 수가 없다. 그래서 아직도 우리는 외국인, 외국언론, 외국기업이 한국을 어떻게 보는 지 그렇게 궁금해하는 가 보다. 아직은 스스로의 마음속에 <다른 곳에서 어떻게 보든 뭔 상관이냐?>는 정도의 자긍심이 자라나지 못해서 그럴 수도 있다.

특히 우리가 신경을 쓰는 나라는 <미국>이다. 멀리는 제너럴셔먼호 사건부터, 가깝게는 6.25 전쟁과  한미FTA까지 미국은 우리와 정치,경제,사회적으로 가장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IT에서도 마찬가지로 인텔이나 MS, 애플 등 실생활에서 미국 기업을 빼놓고 우리 생활을 논하기 어렵다.

여기 한국이 관련된 최근 미국의 두 가지 뉴스가 있다. 흔히 말하는 좋은 뉴스와 나쁜 뉴스다.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이 15일(현지시간) 미시간주 홀랜드에서 열린 LG화학의 전기자동차 배터리 공장 기공식에 참석해서는 “안녕하세요”라며 한국말로 인사했다. 구본무 LG그룹 회장은 “이 자리에 와 주셔서 감사하다”고 화답했다.
친한(親韓) 행보를 보여주고 있는 오바마 대통령은 LG로고가 새겨진 안전모자를 쓴 현장 근로자들과 일일이 악수했으며, LG화학의 배터리가 장착된 포드의 전기차 ‘포커스’를 시승하기도 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국민들이 미시간주 홀랜드(LG 화학 공장 기공식이 거행된 장소)를 바라보면서 `일자리가 해외로 빠져 나가지 않고, 한국에서 미국으로 일자리가 옮겨오고 있다'는 것을 목도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기사출처 : 매일경제


애플의 최고경영자(CEO) 스티브 잡스가 이른바 ‘안테나게이트(antennagate)’와 관련해 가시가 돋친 한 마디를 날렸다. 잡스는 17일(현지시각) 미국에서 번지고 있는 아이폰 4의 안테나 결함 비난과 관련해 가진 해명 기자회견 말미에서 한국 기업을 언급했다.

기자: 당신, 뭔가 잘못 알고 있던 것에 기반해 대처해 온거 아닌가?

잡스: ... 아마도 인간 세상이니까, 니가 잘나가면 사람들은 갈기갈기 찢어서 끌어 내리려고 한다. 구글을 보라. 사람들은 구글을 끌어내리려고 한다. 난 그게 이해가 안된다. 어쩌면 좋겠냐? 우리가 한국 회사였으면 좋겠냐? 아니면 이 제품들로 세계를 선도하는 이 자리의 미국 회사였으면 좋겠냐.(Would you rather we were a Korean company, instead of an American company?)


한국이 언급된 이 미국발 두 뉴스의 결정적 차이점은 무엇일까? 주인공이 한쪽은 흑인 대통령이고, 한쪽은 백인 CEO란 차이점인가? 아, 그건 내가 원하는 답이 아니다.

첫번째로 상황이 다르다.
오바마 대통령은 자국에 생산기지를 짓고 일자리를 만들어 지역경제를 살리고 있는 한국 기업을 칭찬해주기 위한 즐거운 자리다. 그러나 스티브 잡스는 야심차게 내놓은 제품 아이폰4가 안테나에 심각한 결함이 있다는 지적을 받고는 이를 해명하는 유쾌하지 못한 자리다.

둘째로 연관성이 다르다.
전자는 직접적으로 한국의 LG화학이 공장을 지어주니 당연히 한국이 나올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그렇지만 후자는 직접적으로 안테나 결함과 한국은 아무런 관련이 없다. 한국회사가 그 안테나를 설계한 것도 아니고, 관련 부품을 공급하지도 않았다. 그야말로 뜬금없이 나온 것이다.

세째로 뉘앙스가 다르다.
오바마 대통령은 한국말 인사까지 하고 구본무 회장과 대화까지 하며 한국의 일자리 창출을 환영했다. 어떻게 보면 한때 잿더미가 된 한국에 원조물자를 제공해주던 미국이라 은근히 자존심이 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적어도 전혀 내색하지 않고 환영과 감사를 표시했다. 대등한 파트너로서 대우해 주고 있음은 물론이다.

스티브 잡스는 어떤가? 일단 아이폰4는 삼성과 LG등이 주요 부품을 댄다. 그러면 한번쯤은 삼성이나 LG에 대고 <아이폰4 같은 혁신제품에 들어가는 부품을 공급해준데 감사하다>라고 발표회장이나 기자회견에서 말한 적이 있던가? 내가 알기로 그런적은 한번도 없다. 어차피 폭스콘에도 전혀 감사를 표시한 적이 없다. 잡스에게 있어서 한국이나 대만, 중국회사는 대등한 파트너라기보다는 그냥  부품 하청업체 정도인가보다.


그런데 갑자기 이런 안좋은 상황에서는 대만도 중국도 아닌 바로 한국을 끄집어냈다. 대등한 파트너로서인가? 아니다. 그냥 애국심에 호소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나라다. 나는 이 관련 언급을 보고 처음에는 당혹스러웠고 나중에는 심각하게 잡스에게 화가 났다. 그건 마치 해외여행을 갔을 때 애국자가 된 것처럼, 한국이란 내 나라가 잡스에게 아무렇게나 취급당하고 있다는 기분이었다.

도대체 저 말을 하고 있을 때 스티브 잡스가 떠올린 한국이란 어떤 나라일까? 한번 생각해보자.

물론 내가 뭐 평상시에 나라를 굳건히 사랑하던 건 아니다. 나는 그저 월드컵때 광장에 나가 응원하고, 가끔 정치판에 실망하고, 국내 대기업의 횡포에 분노하기도 하는 평범한 시민이다. 일본대사관 앞에서 손가락을 자르거나, 해외에 한국을 알리는 홍보활동 같은 걸 하는 그런 애국시민이 아니다. 하지만 이젠 제법 위상이 높아졌다고 생각하는 한국이 그저 애플과 잡스에게 애국심 도발의 도구 밖에 안되는구나 생각하니 슬프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할 뿐이다.

초기에 네티즌들은 이렇게 말했다. 아이폰4가 2차발매국에서 한국을 빠뜨린 것과 연관해서 뒤진 한국의 IT현실과 특정 대기업의 압력, 한국 정부의 무능과 부패로 인해 잡스가 한국을 포기한 것이라고 말이다. 그런 맥락에서 저기에 한국을 언급한 건 <애플이 그렇게 IT분야에서 무능하고 뒤쳐진 나라 기업이었으면 좋겠냐?> 라는 의미가 된다고 말이다.


하지만 그건 아니다. 잡스는 적어도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한국이란 나라에 관심도 없고 잘 알지도 못한다. 우리는 스스로 올림픽도 치뤘고 월드컵도 개최했으니 미국인들이 이제 한국쯤 다 알겠지라고 생각하겠지만 안타깝게도 한국은 아직 일본이나 중국에 한참 못미치는 인지도 밖에 없다.

최신 뉴스 하나를 들겠다.

미국 자동차회사 크라이슬러가 홈페이지(www.chrysler.com)에서 아시아-태평양 지역 딜러망을 표시하면서 '한국'이라고 표기할 곳에 '일본'을 적어 놓고 있어 물의를 빗고 있다.
20일 사이버외교사절단 '반크'에 따르면 크라이슬러는 홈페이지에서 국제 딜러망을 표시하면서 각국 국기와 국명을 나타내는 난에 태극기 옆에 일본으로 표기해 놓고 있다.
호주와 뉴질랜드, 필리핀, 싱가포르 국가 옆에는 영어로, 중국 오성홍기와 일장기 및 대만의 청천백일기 옆에는 한자로 각각 국명이 표기돼 있으나 태극기 옆에는 한글로 '일본'이라고 적혀 있다.

슬프게도 이 정도 인지도 밖에 없는 한국이란 나라를 잡스가 대단하게 그 속사정을 다 알고 있으리라는 기대는 하지 말자.  그럼 대체 왜 한국을 언급했을까?

잡스가 한국을 위협적인 대단한 나라라고 보고 있다는 의미라는 해석도 있다.
아이폰4의 주요부품을 공급하고, 삼성이 글로벌 IT에서 강자의 위치에 있으며, 최근에는 갤럭시S를 통해 아이폰에 도전하는 상황을 예사롭지 않게 본다는 뜻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애플이 저런 대단한 경쟁국가 한국 기업이었으면 좋겠냐?> 라는 의미의 발언이 된다.


하지만 내 생각에는 이것도 가능성은 크지 않다. 휴대폰으로만 보면 애플에게 더 장애물같은 강자는 핀란드의 노키아다. IT로 놓고 볼때도 일본의 소니 등은 세계적 인지도 면에서 삼성에 앞선다. 잠재적 가능성? 그렇다면 차라리 아이폰4 자체를 생산하고 더불어 짝퉁도 가장 먼저 나오는 중국의 폭스콘은 더 무서운 상대가 될 수 있다.

그럼에도 굳이 잡스는 한국을 예로 들었다. 과연 이것이 오바마와 같은 칭찬의 의미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일까? 나는 영화에서 본 한국의 대중적 이미지를 떠올렸다.

영화 폴링다운에서 주인공인 '마이클 더글라스'가 공중전화를 쓰기 위해 한국인 상점주인에게 잔돈을 빌리려고 하자 치사하게 묘사되는 한국인 상점주인이 이를 거절한다. 이에 마이클은 "너희가 전쟁으로 어려울때 우리가 얼마나 도와주엇는데, 배은망덕 하다" 식의 말과 함께 나이많은 상점주인을 구타한다. 나중에 현장에 도착한 경찰은 상점주인에게 오히려 행동 바로하라고 꾸짖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뤽 베송 감독이 각본을 맡은 영화 택시는 극 중 한국인 유학생 두명이 돈을 벌기 위해 트렁크와 운전석을 번갈아 가면서 24시간동안 운전을 한다는 내용이 웃음거리로 그려졌다.

저 기자회견에서 한국을 언급할 때의 문맥을 보자. <잘나가면 누군가 시기한다. 그런데 애플은 잘나가고 있다. 애플은 미국회사다. 그런데 <한국>회사였으면 좋겠느냐?> 라는 이 문장의 호소력은 어디에서 나와야 할까? 그것은 상대방인 미국기자가 듣기에 애플이  미국이 아닌 한국 회사이어서 억울하거나 분해야 한다. 당연히도 그 대상인 나라는 존경스럽거나 정말 우수하고 흠잡을 데 없는 나라여서는 안된다.


예를 들어 저 문맥에 <프랑스>를 넣어도 그다지 도발이 안된다. <러시아>를 넣으면? 차라리 냉전시대 <소련>을 넣으면 호소력이 생길 지 모르겠다.
잡스는 말을 막 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가 여태까지 한 명언들을 보면 알겠지만 매우 함축적이고도 신중한 말을 직관적으로 뱉어낸다. 따라서 한국이란 언급은 이성보다 감성에서 기인한다. 영화에서 나온 두 장면의 이미지를 합쳐 보자.

1) 전쟁에서 미국의 도움을 받았던 저개발국이 이제는 좀 발전해서 건방지게 구는 나라
2) 돈을 벌기 위해 그저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악착같이 일하는 나라
3) 같은 백인도 아니고 미국인의 문화와 감성을 공유하지도 않는 나라
4) 중국처럼 땅과 인구가 많지도 않고 일본처럼 기술력이 좋지도 않은 나라

이런 이미지가 모두 합쳐진 <한국> 이란 나라에 애플이란 기업이 있다면 미국인 입장에서 얼마나 안타깝고 분하겠는가? 차라리 아예 지금도 못살고 돈없는 아프리카나 동남아시아 등은 도발도 되지 않겠지만 한국은 딱 좋은 이미지다. 나는 잡스가 저런 이미지를 미국인 대부분이 공유하고 있다고 생각해서 한국을 언급한 것이 아닌가 의심한다.

스티브 잡스의 일대기나 관련서적을 잘 분석해 읽어보면 잡스는 논리보다 직관을 중시하고, 세세한 것보다는 전체를 단숨에 관통하기를 좋아한다. 그러니 애플이 한국회사였으면 좋겠냐? 라는 건 그만큼 상대가 이성적으로 차분히 생각할 필요없이 한국이란 이미지 만으로 도발될 거란 계산이 깔려있다는 이야기다.

굳이 훌륭한 상대를 지칭한다면 한국일 필요는 별로 없을 것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아직 미국인의 이미지에는 일본이 훌륭하고도 좋은 제품을 만드는 신사적인 나라로 남아있고 중국은 무진장한 가능성과 인구, 오래된 문화가 있는 나라로 각인되어 있다. 무엇보다 한국은 한번도 열강이었던 적이 없다. 지금도 미군이 주둔하고 있으며 분단상태다. 뭘 얼마나 좋게 평가할 것인가? 오바마 대통령은 진보적이기에 저렇게 행동할 수 있을 뿐이다.

스티브 잡스에게 한국이란 어떤 나라일까?


솔직히 이런 글을 쓰면서 나도 마음이 참 우울하다. 차라리 내가 스스로 곡해하더라도 <잡스가 한국 언급한 건 한국의 힘을 인정한 겁니다!> <전혀 기분나빠할 필요 없어요!> 라고 쓰고 싶다. 나는 어쩔 수 없이 한국인이니까 말이다.

그러나 세상에는 아무리 외면하고 부정하고 싶어도 엄연히 존재하는 진실이란 게 있다. 그 진실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그 어떤 가능성이라도 생각해봐야 한다. 최악의 경우 잡스 본인은 인종차별주의자가 아니지만 숨겨진 미국의 인종주의에 호소했을 가능성까지 열어둬야 한다고 생각한다.

더욱 분한 것은 잡스와 미국에서 저런 말은 어차피 아무 관심도 없는 스쳐지나가는 말이란 점이다. 논란도 안되고 해명할 거리도 안된다. 한국 쯤이야 그냥 지나가다 한번 저렇게 도발용으로 던져줘도 되는 나라로 여기고 있다는 점이 더 마음을 아프게 만든다.

어차피 저 말의 진의는 스티브 잡스가 가장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가 직접 해명하지 않는 한 좋은 뜻인지 나쁜 뜻인지 확정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분명한 것이 있으니 잡스는 한번도 유쾌하거나 좋은 자리에서 한국을 언급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가 처음 언급한 한국은 딱 저런 불쾌한 자리에서나 쓸 수 있는 나라였다는 점은 확실하다.


마지막으로 나는 미국인이 아닌 한국인으로 저 말에 답해본다.

애플이 한국기업이었으면 좋겠냐고? 그렇다. 나는 애플이 한국기업이었으면 좋겠다. 그러면 차라리 아이폰이든 아이패드든 가장 먼저 발매될 테고, 쓸데없이 내가 영어를 해석해가며 이런 추측을 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러니 애플이 한국기업이 될 수 없다면 분해서라도 우리도 어떻게든 애플같은 기업을 가졌으면 한다. 내가 죽고 없어진 백년후라도 좋으니 만들자,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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