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한번도 내가 대마왕의 성에 들어가는 용사라고 생각해 본적이 없다. 그런데 난데없이 제주도에서 우도로 들어가는 날, 그런 심정이 되었다.



"풍랑이 예상되므로 지금 들어가면 내일 못 나올 지도 모릅니다."

소가 누워있는 모습을 닮은 섬, 제주도 동쪽 섬 우도에 들어가기 전 들려온 말이다. 아직 햇살도 내리쬐는 좋은 날씨에다가 파도도 겉보기에는 멀쩡한데 말이다. 비행기를 비롯한 모든 일정이 빡빡한 지라 마음이 약간 초조해진다.



우도는 제주도에서 도항선만 타면 바로 갈 수 있는 가까운 섬이다. 성산 일출봉이 바로 보이는 곳이기에 그다지 외딴 섬이란 생각도 들지 않는다. 눈앞에 그 우도를 놔두고 풍랑 때문에 포기할 수는 없다. 위험은 있더라도 도전해봐야 하지 않을까? 나는 그 순간 정말로 대마왕의 성에 들어가는 용사의 기분이 되었다.

"갑니다!"



도항신고서를 작성하고 도항선을 타는 순간, 마음이 가벼워졌다. 선택은 했다. 이제는 주사위가 어디로 구르냐만 남았다. 빨간 등대 줄까, 하얀 등대 줄까 하는 광경이 스쳐지나가며 갈매기들과 함께 나는 우도에 도착했다.




멋진 저녁 일몰과 함께 내가 묵게 될 우도의 올레펜션이 눈에 띈다. 바로 앞에 포구와 바다가 보이는 곳이다. 평화로운 광경이 어딜 봐도 풍랑 같은 건 없어 보인다. 그래, 우리나라 기상대 예보가 뭐 그리 정확했었나? 분명 내일도 맑을 거야. 그런데...


다음날부터 그야말로 엄청난 바람과 폭풍이 쏟아졌다. 제주도 답게 햇빛이 비치는 가운데서 눈발이 마구 내리고 바람이 몰아친다. 잠시 개는가 하면 5분도 못가서 다시 비바람이 들이친다. 파도는 완전히 대놓고 몇 미터씩 넘실거린다.

"풍랑주의보가 풍랑경보로 바뀌었습니다. 배 못 뜹니다."

결국 나는 우도에 갇혔다. 이건 조난인가? 아니면 고립인가?
영화에서나 자주 나오던 장면인데 나는 지금 늘씬한 미녀와 같이 있는 것도 아니고 흉악한 살인마가 잠복한 섬에 있는 것도 아니다. 어쩌면 여기에 어리고 안경낀 소년탐정이라든가, 항상 할아버지의 이름을 거는 고등학생이 있다면... 고립된 섬 속 펜션에서는 한 명씩 의문의 죽음을 맞는 건데... 그런 일은 결코 없었다. 여긴 그냥 제주도의 우도일 뿐 공포영화도 추리만화도 아니니까 말이다.



그래도 기왕 큰 결심하고 우도까지 왔는데 날씨가 나쁘다로 마냥 갇혀 있을 수는 없다. 기회를 엿보다가, 약간 날이 풀린 틈에 밖으로 나왔다. 우도를 둘러볼 수 있는 기구를 타보기 위해서다.


우도 나린섬 투어는 우도를 여행할 수 있는 여러가지 수단을 제공해준다. 골프장에서 주로 이용할 전기자동차부터, 스쿠터를 닮았지만 보다 신나는 탈 것인 ATV도 있다. 여기서 ATV는 오토바이의 약자다... 라고 내가 말한다고 부디 진담으로 듣지는 마시라.


비교적 운전도 쉽고 안전적인 전기자동차가 끌린다.
색깔도 다양하고, 조작도 쉽다. 시동키가 있고 전 후진 스위치와 악셀레이터, 브레이크가 있는 것이 자동차와 비슷하다. 오락실의 간이 자동차 오락과도 닮았다. 자, 그럼 기세좋게 타볼까?




그런데 바람과 눈이 너무 강하다. ATV도 전기자동차도 악천후 앞에서는 운행이 힘들 것 같다. 또한 결정적으로 다 감수하고 달린다고 해도 보이는 풍광이 아름답지 못하다. 나는 아쉬움을 뒤로 하고 맑게 개일 날로 탑승 기회를 미뤘다.


간간히 개기도 하고 눈보라가 멈추기도 했지만 역시나 제주도였고 우도였다. 바로 10분 앞 날씨가 예측이 안되는 상황에서 다시 펜션으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날씨가 좋아지기만을 기다렸다.

어차피 배는 못뜨고 나는 생애 처음으로 우도에서 새해를 맞았다. 신년 축하문자와 전화가 몇 개 왔는데 내 답은 한가지 '현재 우도 고립중!' 이었다. 심지어 일본에서 잠시 귀국한 친구가 오늘 저녁에 보자고 하는데, 나는 미국 대통령이 보자고 해도 못갈 상황이었다.




며칠 후, 파도는 아직 높지만 그나마 날씨가 좋아진 날 다시 나린섬 투어로 왔다. 이번에야 말로 제대로 우도를 즐기기 위해서였다. 우도는 지도상으로 작은 섬이지만 걸어서 다니기엔 넓고 힘들다. 천천히 즐기기 위해서는 느리고 여유있는 탈 것이 있으면 좋다.

부모 자식간으로 보이는 귀여운 강아지 한 쌍을 보며 전기자동차에 탔다. ATV도 타고 싶었지만 아직은 날이 춥고 구경하면서 사진을 찍기에는 전기자동차쪽이 편하다. 우도견(?)의 배웅을 받으며 본격적인 우도 탐험을 개시했다.




쌓인 눈이 녹아가는 2011년 신년의 우도는 맑고 깨끗했다. 창 밖으로 보이는 경치마저도 새파랗게 빛난다. 풍랑경보가 다시 풍랑특보로 바뀌며 완전히 나를 절망시켰던 어제의 기억이 깨끗이 지워지는 것 같다. 눈덮인 현무암들과 이런 날씨에서도 파릇하게 핀 잎사귀도 나를 격려하고 있다.


"좋았어. 이대로 한번 우도를 다 둘러서 산에까지 올라보면..."

나름 용기를 얻어 눈 쌓인 도로까지 들어갔지만 전기자동차로는 한계였다. 하긴 일반 차량조차도 아차하면 눈 속에 타이어가 빠진다. 제주도나 우도는 원래 눈이 많이 오지 않는 곳이고 쌓이지도 않기에 이런 날씨는 그야말로 희귀하다고 한다. 차량에는 스노우타이어는 물론 체인조차 없으니 미끄러지기 딱 좋다.



파랗고 맑은 바다는 여름이라면 당장 해수욕을 즐기고 싶을 정도다. 그렇지만 지금은 단지 푸르름만 즐 길 수 있을 뿐이다. 육지에서는 볼 수 없는 우도 특유의 풍경들이 곳곳에서 나를 유혹한다. 왔던 길을 되돌아와 전기자동차를 반납하고는 하늘을 본다. 뭔가 신비한 일이 막 일어나려는 우도의 하늘이 가슴을 뛰게 만든다.


생각해보면 그냥 우도에 이렇게 머문 것도 좋은 일이었다. 서울이라면 그저 늦잠이나 자고 한파에 집에서 나갈 생각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여행이라는 이유와 낯선 우도라는 경치 때문에라도 밖에 나갔다. 나가서 바람과 함께 우도를 돌아보았다. 그것만으로도 귀중한 추억을 얻은 것이 아닌가?



아마 앞으로도 당분간은 연말과 신년이 되면 내 머릿속에서 우도의 모습과 이 바람이 떠오를 것 같다. 즐거운 일이든 놀란 일이든, 우울한 일이든 말이다. 모든 것이 모든 것이 잊지 못할 우도에서의 기억이기에 더욱 소중하게 남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