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광해를 본 사람이라면 그 안에서 제법 심각하게 다뤄지는 한 가지 정책을 알고 있을 것이다. 바로 대동법이다. 대체 이 대동법이란 무엇일까? 그냥 '불심으로 대동단결.' 처럼 다 함께 하나 되자는 법일까? 그건 아니다. 이건 조선시대의 세제와 관련이 있다. 나라에 필요한 물건을 부과해서 바치게 하는 공납을 물건으로 받지 말고 그냥 쌀로 내게 하는 법이다.



영화속에서 대동법 시행에 대해 양반들이 맹렬히 반대한다. 백성들은 공납 때문에 가정이 무너진다. 어째서 그럴까? 그 지역에서 잘 나지도  않는 물건을 바쳐야 하기 때문이다. 농사 밖에 모르는 농민에서 매를 바치라고 하면 농민은 아주 비싼 값에 상인에게 매를 사서 바쳐야 하니 그 돈을 견디기 힘들다. 하지만 이렇듯 폐해가 뚜렷하지만 오랜 시간을 거치는 동안 이 공납법에 구애된 양반 기득권층의 이해관계는 폐지를 극력 반대한다. 양반들이 바로 그 공납 물품을 공급하거나 임의로 면제해줌으로서 돈과 권력을 부릴 수 있기 때문이다.


재미있는 건 이 공납 제도조차 처음에는 나름의 필요성이 있어 만든 법이었고, 나라에 필요한 물품을 잘 공급해주는 순기능을 했다는 점이다. 그것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취지는 무색해지고 형식만 남아 모든 사람을 괴롭혔다. 영화에서 보듯이 심지어는 왕인 광해조차 괴롭혔다.

 

현대에 와서 나는 한국 IT업계에서 바로 이런 제도를 하나 들 수 있다. 바로 우리가 PC로 인터넷뱅킹을 하거나 전자상거래를 할 때 거의 필수적으로 써야 하는 프로그램 액티브엑스다. 천원짜리 물건 하나를 인터넷으로 사려고해도 그 유명한 '엔프로텍트'를 비롯해서 대체 몇 개의 액티브엑스(ActiveX) 프로그램을 깔아야 하는 지 모른다.



문제는 이 액티브엑스가 시대에 뒤떨어져 다른 나라를 이제 거의 쓰지도 않고 웹표준도 아니란 점이다. 오로지 한국만 그 편리함에 온갖 사이트에서 쓰고 있다. 관공서든 은행이든 가리지 않고 쓰는 바람에 한국에서는 맥이나 리눅스 같은 소수 하드웨어를 쓰는 사람이나, 파이어폭스와 크롬 등 의 다른 브라우저를 쓰는 사람은 철저히 소외당했다. 그저 PC에 익스플로러에서만 실행되는 것이 액티브 엑스다. 또한 이 프로그램은 시스템을 느리게 만들거나 해킹의 위험요소가 되기도 했다.


그동안 폐지요구가 거셌던 이 액티브엑스를 무려 '대통령 예비후보' 가 앞장서서 폐지하기로 공약했다. 너무도 잘 알려진 백신 V3를 개발한 안철수 후보의 공약이다. (출처) 

 


안철수 무소속 대통령 후보는 21일 이동통신 요금에 대한 정부의 직접적 개입보다 가격구조를 투명화해 요금을 하락시키겠다는 방침을 밝혔다.


또 불필요하고 불안한 '액티브 엑스'는 폐지하고, '공인인증제도'를 정부가 지정하지 않고 국제표준에 기초한 '금융거래 보안기술 평가점수'를 부여해 보안 부실을 방지키로 했다.


이와 함께 인증·보안 기술은 업계가 자율적으로 선택하게 한다는 방침이다. 마이크로소프트 사에 종속됐다고까지 표현되는 액티브 엑스(일반 응용프로그램과 웹을 연결시키기 위해 제공되는 마이크로소프트사가 개발한 기술)를 폐지할 계획이다.


이에 따라 공인인증기관이나 공인인증제도를 정부가 지정하지 않고 국제 표준에 기초한 '금융거래 보안기술 평가점수'를 부여해 보안 부실을 방지하기로 했다.


사실 이런 정책은 굳이 대통령 후보가 대선에서 공약으로 내세울 필요도 없다. 정보통신 관련 장관이나 차관 수준에서만 문제의 심각성을 알고 있다면 능히 폐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폐지하기가 너무도 어려운 제도가 되어버렸다.


위에서 말한 공납제도처럼 이 액티브엑스도 처음에는 간절히 필요해서 생긴 것이었다. 인터넷이 일찍 발달한 한국이 급히 보안기술이 필요한데 전세계에서 그 보안기술을 가지고 있는 나라가 거의 없었다. 암호화기술을 손에 넣을 수 없었던 한국이 그나마 쉽게 보안을 유지하는 기술로서 도입한 것이 액티브엑스다. 그런데 이것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보안기술이 개발되어 필요가 없어졌음에도 나름의 기득권 세력으로 굳어져 버렸다. 액티브엑스로 쉽게만 코딩할 줄 아는 프로그래머와 이미 구축해놓은 시스템 교체비용이 아까운 기업과 관공서, 정보기술에 무관심한 정부가 합심해서 교체요구를 묵살해버린 것이다.





안철수는 액티브엑스를 없앨 수 있을까?


문제는 이 액티브엑스를 민간차원에서는 없애기가 거의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한국의 인터넷 결제는 법에 의해 암호화와 공인인증서 시스템이 필수적이다. 그런데 그 법규가 국제적 시스템에 맞는게 아니라 오로지 액티브엑스 최적화된 법규라고 한다. 그 법을 고치지 않고 유연성 있게 적용하지도 않다 보니 관련 기관도 어쩔 수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이 문제는 결국 국가권력이나 입법권력을 가진 자의 결단과 추진의지에 기대를 걸 수 밖에 없다. 명분에는 누구든 동감하지만 실정법이 따라주고 교체비용을 감수하겠다는 태도를 끌어내야만 하기 때문이다. 광해군이 어째서 대동법 시행 하나를 그토록 힘겨워했겠는가? 액티브엑스 폐지는 결국 현대의 대동법이 될 수 밖에 없다. 안철수 후보가 국가권력을 가지게 된다면 액티브엑스는 아마도 없어질 것이다.



나는 여기서 굳이 특정 대선후보를 지지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이런 공약은 그다지 정치성이 있는 것도 아니다. 세 후보가 모두 공약으로 제시해주고 적극 관심을 보여주기를 바랄 뿐이다. 그래도 안철수 후보가 IT업계 출신이라 이런 부분에서 이해가 깊다는 점에 주목한다. 역시 건설로 성공한 사람은 건설에 집중하기 마련이고 IT로 성공한 사람은 IT에 집중하기 마련인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