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연한 말을 하나 해야겠다. 가난한 사람은 무엇인가를 사고 싶어도 비싸면 살 수 없다. 그것이 꼭 필요한 것이라도 말이다. 반대로 돈이 많은 사람은 당장 필요하지 않은 것도 내키면 살 수 있다. 돈을 빌리면 되지 않을까? 라고 해도 세상은 참 가혹하다. 돈이 없는 사람은 가진 게 없으니 담보가 없어 돈을 빌릴 수도 없다. 반대로 돈을 빌릴 필요가 없는 사람은 담보가 풍부하니 원하면 돈을 빌릴 수도 있다.


이것은 굳이 사람의 경우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기업의 경우에도 너무 잘 적용된다. 특히 기업의 인수합병에 자유로운 미국 기업이 이런 사례를 극단적으로 보여준다. 돈이 많은 기업은 작은 기업을 마치 쇼핑하듯 장바구니에 집어넣고 마구 사들인다. 그 가운데는 당장 필요한 기술이나 제품을 가진 기업도 있지만, 대체 무엇때문에 필요한 지도 모를 기업도 있다. 심지어 자사의 제품을 위협할 혁신기술을 품은 기업을 인수해서는 아예 그 기술을 사장시켜 버리기도 한다.

애플이 어도비를 인수해야 한다는 주장이 미국에서 제기되었다. 그것도 매우 진지하게 말이다. (출처) 

애플이 차고 넘치는 현금으로 어도비시스템즈나 코렐 등의 그래픽 소프트웨어업체를 인수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애플이 앞으로도 현재의 전략을 유지하는데 유용한 시도란 주장이다. 아주 실현 가능성이 없어 보이진 않는다.

최근 미국 지디넷은 애플이 쌓아놓은 현금을 이용해 어도비나 코렐 등을 인수해야 한다고 분석했다. 지디넷이 내세운 근거는 소프트웨어 포트폴리오 확대나 플래시 기술 보유가 아니었다. 아이패드에 새로 채택된 레티나 디스플레이가 이유다.
 
지디넷 블로거 제이슨 펄로는 “애플이 자체적으로 이미지 파일 크기를 줄일 수 있는 방안이 어도비시스템즈나, 코럴드로우를 인수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어도비나 코렐이 사용하는 이미지 파일형식은 비트맵이 아닌 벡터 방식이란 점에서 나온 주장이다.
 
벡터 방식의 이미지는 픽셀이 아닌 각 점의 상대적인 좌표로 저장된다. 왼쪽에서 3, 위에서 5란 좌표점에 색깔코드를 집어넣어 위치와 색을 구현한다. 때문에 아무리 크기를 늘려도 좌표 정보에 확대값만 곱하면 되므로, 이미지 확대에 따른 화질저하가 없다. 파일크기도 크게 변하지 않는다.

애플은 벡터방식 이미지기술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어도비 파이어웍스, 일러스트레이터 등은 애플이 매력을 느낄 여지가 충분하다. 어도비의 벡터 이미지 기술을 애플 자체 그래픽 관련 애플리케이션인 애퍼추어, 아이무비, 파이널컷프로 등에 적용한다고 생각해보자. 앞서 밝힌 문제를 더 쉽게 해소할 수 있다.



어도비는 매년 40억~50억달러 매출을 올리는 회사로, 최근 실적 부진으로 시가총액이 170억달러 미만이다. 여기에 프리미엄을 더하면 더 많은 금액을 필요로 하겠지만, 애플이 보유한 1천억달러의 현금이라면 어려운 일도 아니다.

어도비가 비싸다면 코렐이 있다. 코렐은 1억~2억5천달러대의 연간매출을 올리는 회사다. 10억달러 정도면 인수가능할 것으로 예상된다. 다만, 어도비와 달리 코렐 인수는 약간 다른 장애물을 갖는다. 코렐은 캐나다에 본사를 두고 있어, 애플 기업문화와 통합되는데 어도비에 비해 더 어려울 수 있다.
 
코렐의 애플리케이션 대다수는 마이크로소프트(MS) 윈도 환경에서만 구동된다. 코렐의 소프트웨어들을 맥OS나 iOS환경을 지원하도록 하는데는 약 1천만~5천만달러 정도의 비용이 투입될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애플을 열광적으로 지지하는 사람에게는 좋은 주장으로 여겨질 지 모른다. 애플의 하드웨어를 개척기부터 떠받쳐 왔던 어도비는 포스트스크립트 기술과 포토샵을 비롯해서 많은 좋은 솔루션을 가지고 있다. 물론 맥이 어려움에 처하며 점유율이 낮아지자 어도비는 윈도우로 전환해서 더 많은 성장과 수입을 얻었다. 


그것을 배신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 특히 스티브 잡스는 어도비를 그런 점에서 감정적으로 섭섭하게 생각했던 것 같다. iOS에서의 플래시 지원을 둘러싼 입장표명에서 잡스는 그런 시각을 드러낸 바 있다.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애플과 어도비는 그냥 대립하면서도 협조하는 회사였다.
 
그러나 이제 애플이 엄청난 현금보유고를 가지고 나날이 최고 주가를 경신하면서 상황이 바뀌고 있다. 더구나 마이크로소프트와 달리 애플은 기업 이미지가 좋고 독과점 판결에 얽매이지도 않는다. 따라서 부자가 쇼핑을 하듯 좋은 기업을 인수하는 데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특히 주변에서 그것을 부추기고 있다.

애플이 어도비를 인수할 수 있을까?

하지만 애플은 어도비를 인수해서는 안된다. 코렐이라면 가능할 수도 있지만 이 경우에도 위험이 많이 따른다. 소비자를 위해서도 애플의 어도비 인수는 바람직하지 않다.

1) 애플은 독특한 기업문화를 가지고 있다. 인수합병이라는 건 단지 기업을 사서 종으로 삼는 그런 것이 아니다. 두 기업이 하나가 되는 일이다. 애플과 어도비는 좋은 파트너였지만 기업문화는 상이하게 다르다. 물리적으로 인수하는 것이 가능하더라도 화학적으로 두 기업이 이질감 없이 하나가 되기는 힘들다.


2) 어도비의 위치가 중립에서 벗어나는 순간 세계적인 충격이 올 수 있다. 어도비는 현재 대체재가 거의 없는 포토샵을 비롯해 플래시 등의 솔루션을 가지고 있다. 애플이 단지 수익을 노리고 인수하는 게 아니다. 경쟁 플랫폼인 윈도우, 리눅스, 안드로이드의 지원을 중지시키거나 소홀히 하게 만들게 분명하다. 

그렇다면 순식간에 다른 플랫폼 사용자들은 엄청난 차별을 당해야 한다. 참고로 애플 컴퓨터 시장의 점유율은 9프로를 넘지 못한다. 무려 90프로 가까운 사용자들이 당하는 차별이란 가공할 경험일 것이다.

3) 애플은 이제까지의 행보로 볼 때 전문가를 위한 솔루션에 그다지 익숙하지 못하다. 애플에서 만들었음에도 넘버스는 마이크로소프트의 업무용 솔류션인 엑셀을 전혀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전문가용 영상편집 솔루션이어던 파이널컷은 최근 버전에서 쉬운 인터페이스에 비해 전문가 지향 기능을 소홀히 해서 아이무비 프로냐는 비아냥까지 듣고 있다.

어도비의 포토샵이나 라이트룸, 일러스트레이터 등은 대표적인 전문 솔루션이다. 이들이 애플의 손을 거쳐서 아이포토 프로나 어퍼쳐 와 비슷하게 변해버릴 때 소비자가 이익을 보았다고 생각할까? 소프트웨어의 다양성이 없어지고 선택할 자유를 빼앗겼다는 생각이 더 강해질 것이다.


어도비를 예로 들었지만 코렐의 경우도 비슷하다. 코렐드로우 같은 툴이 윈도우에서 사라지고 맥과 아이패드 전용으로 나오는 것이 발전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차라리 애플이 그 많은 돈으로 이들 제작사에 개발비를 대주는 조건으로 관련 소프트웨어를 출시하도록 교섭하는 편이 더 이익일 듯 싶다.

물론 돈이 워낙 많으면 사람은 누구나 더 편할 길을 찾는다. 자가용을 열 대 넘게 구입할 수 있는 사람이 굳이 정거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건 불편할 수도 있다. 하지만 때로는 교통체증을 막기 위해 돈 있는 사람도 대중교통을 이용하듯이 애플도 때로는 모두의 이익을 위해 참아줬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