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초까지만 해도 하드디스크는 아주 싼 부품이었다. 어차피 PC의 속도는 빨라지는데 그 가운데 하드디스크만은 여전히 느렸다. 반도체 위를 전기가 빛의 속도로 지나가는 다름 부품에 비해 금속원판이 모터로 돌아가는 부품이란 어떻게 보면 시대착오처럼 보였다. 말하자면 PC에 마지막으로 남은 기계적 부품이었다. 그렇기에 하드디스크는 그저 대용량 확보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쓰는 부품에 지나지 않았으며, 따라서 값을 올릴 명분이 없었다.


기계적 부품이라는 점 때문에 하드디스크는 점점 저마진 산업이 되어갔다. 마침 플래시메모리를 이용한 SSD라는 부품이 일부 하드디스크를  대체하는 움직임도 있었다. 제법 많았던 제조회사들은 사업을 정리하거나 매각했다. 작년에는 삼성마저 하드디스크 분야를 시게이트에 매각했다. 바야흐로 하드디스크는 시게이트와 웨스턴디지털(WD)라는 두 업체만 남은 셈이다.

이 둘은 미국회사이긴 해도 설계만 하는 기술회사와 비슷했다. 싸게 공급해야 하는 특성상 하드디스크는 인건비가 싼 동남아로 이전했으며 그 가운데 태국의 비중이 매우 높게 되었다. 연중 따스한 날씨와 개방적인 사회분위기, 낮은 임금 으로 인해 태국은 마치 하드디스크에 있어 옛날 플랜테이션 농업처럼 전문적으로 생산하는 공급지가 되었다.

문제가 생긴건 올 가을이었다. 태국을 포함한 동남아에 기록적인 홍수가 발생했다. 수도 방콕을 비롯한 주요도시가 피해를 입은 태국은 하드디스크 공장의 피해를 막지 못했다. 밀집되어 있던 하드디스크 공장이 침수되어 조업불능 상태에 빠졌다. 그 결과로 당장 세계 하드디스크 가격이 치솟았다. 그것도 몇십퍼센트 정도가 아니다. 한국의 용산전자상가와 온라인 마켓에서는 무려 두 배 이상이 올라버렸다.

한번 올라간 가격은 내려올 줄 모른다. PC는 지속적인 수요가 있는 분야다. 생산이 절반 정도로 감소한 상황에서도 소비는 줄어들기 힘들다. 그러다보니 가격이 오르고, 공급자가 우위를 가지는 분위기가 형성됐다. 가장 경시되었던 하드디스크가 주목받는 부품이 되었던 것이다.


이런 지나친 관심이 부담스러웠던 걸까? 아니면 이것이 오히려 기회라고 생각했던 걸까? 얼마전 하드디스크 업체 두 곳이 약속이나 한 듯 AS기간을 대폭 줄였다. 이건 전문가뿐만 아니라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다.

웨스턴디지털은 보급형 제품인 캐비어 블루와 그린을 기존 3년에서 2년으로 1년씩 줄였다. 물론 고급형 제품인 캐비어 블랙을 비롯한 고가제품군은 기존의 5년을 그대로 유지했다.
시게이트 바라쿠다 XT와 모멘터스 XT는 기존 보증 기간 5년에서 3년으로 줄어든다. 또 XT 계열이 아닌 바라쿠다와 모멘터스 HDD는 3년에서 1년으로 단축된다.    

단축된 A/S는 시게이트의 경우 오는 2011년 12월 30일에 배송되는 제품부터, 웨스턴디지털은 2012년 1월 1일 배송되는 제품부터 적용된다.

솔직히 말해보자. 태국 홍수 이전에 두 회사가 감히 이런 계획을 세울 수 있었을까? 공급이 수요를 웃도는 상황에다가 소비자 역시 더 많은 AS기간을 요구하는 분위기였다. 특성상 하드디스크는 많은 저장용량에 비해 데이터가 유실되기 쉽다. 충격을 받거나 외부 요인에 의한 것 말고도 멀쩡히 동작하다가 다음날 고장나기도 한다. 따라서 안정성을 위해 신뢰성 있게 만들고 보다 많은 AS기간이 있어야 SSD와 경쟁할 수 있다는 견해가 많았다.


이때까지 두 회사는 스스로가 가진 힘에 대해 자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두 회사 합치면 거의 백프로에 가까운 세계시장 점유율이 나온다. 그럼에도 그저 조용히 물건 팔아서 이윤을 보는 것만 생각했다. 그러나 태국홍수가 생각을 변화시켰을 것이다. 당장 물건생산에 차질을 빚고 공급이 불안해지자 엄청나게 뛰어오르는 가격을 보자. 전이라면 외면했을 중고 하드디스크라도 사려는 소비자들을 보자. 그러자 두 회사는 자기들이 이제 소비자를 휘어잡을 능력이 있음을 깨달았다.

하드디스크, AS단축, 독과점 시장의 폐해.

현재 하드디스크 시장은 분명 독점은 아니다. 시게이트와 웨스턴 디지털이란 두 회사가 적당히 양분하고 있다. 이것은 과점이다. 단 두회사가 모든 물량을 조절할 수 있고, 모든 정책을 조절할 수 있다. 이번 AS단축 역시 그렇다. 한쪽만 취했다면, 소비자는 반사적으로 다른 회사 제품으로 몰릴 것이다. 가격이 거의 비슷한 상태에서 지극히 당연한 현상이다.


그러나 담합까지 의심되는 이번 정책이 동시에 취해지자 소비자들에게 다른 선택이 없게 되었다. 일부에서는 아직도 명맥을 유지하는 히타치 브랜드의 제품을 사자는 의견도 있다. 그러나 히타치도 사실은 웨스턴 디지털에 인수된 상태로 제품 라인업에서 다르다. 다른 선택지로 너무 부족하다. 이번 정책에 대해 그리 심한 반발이 나오지 않는 것이 이미 상황을 말해주고 있다.

이미 독과점이 된 하드디스크 시장은 홍수까지 겹쳐서 물건이 없다. AS정책을 따지기 전에 물건 자체를 구하기 어렵다. 제품을 약간만 싸게 구할 수 있어도 그걸로 기뻐하는 지경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소비자의 권익을 주장하기가 어렵다. 명백한 독과점을 이용한 담합행위인데도 말이다.

더욱 안타까운 건 이런 독과점 상태가 만들어진 이유다. 이건 어떤 불법이나 부당한 탄압에 의한 것이 아니다. 규모와 기술력이 뒷받침 되어야 하는 하드디스크 시장이 저마진의 레드오션으로 인식되어 속속 사업체들이 철수한 결과다. 그렇다면 이제 두배나 오른 가격을 보고 과연 새로 뛰어드는 업체들은 있을까? 떠난 업체가 다시 돌아올 수도 있을까?

유일한 희망은 한가지 밖에 없다. 바로 유럽연합의 담합 조사와 미연방정부의 독과점 방지법이다. 글로벌 회사인 저 두 회사를 제어할 수 있는 힘은 그 외에 거의 없다. 시장이 작고 영향력도 별로 없는 한국이 할 수 있는 조치란 더욱 없다.


아쉬운 건 시게이트의 실질적 최대주주가 얼마전 삼성 하드디스크 부분을 매각한 한국의 삼성이라는 점이다. 시게이트를 오히려 통제할 수 있는 실력까지 가진 삼성의 뜻이 이런 담합과 AS축소일까? 앞으로의 전망을 지켜보면서 판단해야 할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