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보았던 영화 ‘살인의 추억’에서 과학수사의 중요성을 강조했던 동료형사를 비꼬며 80년대 형사가 단언한다. 한국에선 과학수사 같은 건 필요없다고. 맞다. 한국에서는 국민 가운데 성인 전부가 주민등록증이 있고, 지문날인을 했다. 대충 현장에서 지문찾고는 그걸로 주민등록 조회하면 된다. 거기다 한국은 말이 대륙국가지, 북쪽이 휴전선으로 막혔다. 섬이나 마찬가지로 어디 도망갈 곳도 없다. 그러니 범죄 수사하기가 너무 편한 나라다. 

 
이게 좋기만 한 것인가? 전국민이 매우 자발적으로 인권을 포기한 덕분에 마련된 좋은 치안은 나름 장점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인터넷에 해킹되서 흘러다니는 주민등록번호와 그걸 이용한 범죄를 보면 과연 우리가 무엇을 위해서 이 제도에 동의했는지 의심스럽다. 농담삼아 이제 한국 주민등록번호는 세계인의 공공재가 되었다는 말까지 들릴 정도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전자주민증에 대한 뉴스 하나가 내 시선을 끌었다. (출처)

 

12월 28일 행정안전부에 따르면 전자 주민등록증 도입을 골자로 한 주민등록법 개정안이 이날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 상정되지 않았다.
 
행안부 관계자는 “법사위 안건 선택과정에서 빠졌다”며 “내년 1월 예정인 임시국회에서 상정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행안부는 10여년 전부터 추진한 개정안이 내달 임시국회에서 법사위와 본회의를 통과하도록 국회를 설득한다는 방침이다.
 
전문가들은 전자주민증 도입을 위해 국회가 적극 나서야 한다는 목소리다. 염흥열 순천향대학교 정보보호학과 교수는 “주민등록증은 주민등록번호·주소 등이 여과 없이 노출되는 등 개인정보 유출 위험이 너무 크다”며 “중국 등 해외에서 위변조도 가능해, 보안성을 강화한 전자주민증을 시급히 도입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전자주민증 도입은 수출확대에도 크게 기여한다. 행안부는 우리나라가 개척할 수 있는 해외 전자주민증 시장이 동남아를 중심으로 50억달러(약 5조7000억원)에 달할 것으로 예상했다.
 
개정안은 주민등록증 위·변조를 막고 개인정보 유출을 방지하기 위해 2017년까지 개인정보 전자칩이 내장된 전자 주민등록증 발급을 완료하는 것이다. 지난 23일 행안위 전체회의에서 의결됐다.

답답한 심정이다. 대체로 관련 분야에 있는 사람들이라 그런지 몰라도 단지 기술적 부분만 강조할 뿐이다. 정작 중요한 본질은 언급조차 하지 않고 말이다.



전자주민증은 결국 번호 대신 칩을 쓰자는 것이다. 신용카드나 교통카드 같은 IC카드 기술이 도입되는 것이다. 위의 뉴스에서 말한 전문가들은 이런 전자주민즈을 쓰면 위변조도 막을 수 있고 개인정보 유출도 막을 수 있다고 말한다.

이건 뭔가 원인을 간과한 주장이다. 애초에 주민등록번호와 개인정보 유출은 주민등록증이 낡아서 발생한 문제가 아니다. 인터넷으로 각종 사이트에 회원으로 가입할 때 무차별로 요구해 수집했던 주민등록번호와 개인정보가 문제였다. 그것이 팔아넘어지건, 해킹되건 유출된 것인데 단지 주민등록증 방식의 문제라고만 보는 것이다.

더구나 아래에는 뜬금없이 수출확대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대체 전자주민증 같은 공공사업을 다루며 개인정보 유출의 위험을 이야기하다가 난데없이 바로 아래 수출 이야기가 왜 나오는가? 이게 단지 돈에만 관심있는 요즘 세태의 반영이 아니길 바란다.   



전자주민증, 시행보다 서둘러야 할 것은?

핵심을 보자. 주민등록증의 방식을 바꾸면서 우리가 다시 한번 생각해봐야 할 것이 있다. 이 주민등록증과 주민등록번호가 대체 왜 필요한가? 아예 없앨 수는 없는 것일까. 라는 점이다. 선진국인 미국의 사회보장번호라든가 일본과 유럽의 제도에서는 이렇게 일일이 일련번호를 매기고 지문을 채취하지 않아도 혜택을 준다. 왜 우리는 굳이 인권침해의 소지가 다분한 이 제도를 유지해야 하는지에 대한 심각한 고민이 없는 것이다.

본인인증이라면 요즘은 간단한 휴대폰 인증이나 각종 공인인증서로도 가능하다. 복지를 위해 필요하다면 건강보험증이 있다. 운전에는 면허증이 있다. 이런 목적을 위한 증명서가 있는데 굳이 전국민의 데이터를 모아서 다시 전산화 시켜서 얻을 수 있는 건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그것도 보안조차 제대로 해주지 못하는 상황에서 말이다.



전자주민증의 시행보다 서둘러야 할 것은 국민 개개인의 인권과 사생활 보호대책이다. 전자주민증으로 인한 편리함을 이야기하고, 수출이득을 논하기에 앞서, 과연 국가는 국민이 자진해서 내놓은 지문과 개인정보를 어떻게 보호할 것인가를 먼저 충분히 보장해줘야 한다. 그렇지 않고 눈앞의 편리함만 중시해 전자주민증을 앞당기면? 더 많은 피해와 혼란이 올 것이다. 

정보화는 사람의 생활을 편리하게 해준다. 하지만 사람이 항상 제대로 깨어있지 않으면 기술은 다시 사람을 불행하게 만든다. 전자주민증 역시 우리가 눈을 부릅뜨고 주의하지 않으면 언제든 부작용의 해악을 우리에게 가져올 것이다. 제대로 된 대책을 마련한 뒤 시행을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