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누구나 그렇듯 실수를 인정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특히 공적인 위치에 있는 사람일 수록 실수를 인정하기보다는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전가하거나 궤변을 내세워 자기합리화를 시도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 편이 체면이 덜 손상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전에 올린 포스팅인 삼성 VS 애플 재판, 아이폰5 판매금지될까? 를 통해서 네덜란드의 가처분 소송에서 애플이 상당히 불리하며 판매금지될 가능성이 높다고 전망했다. 그런데 지난 10월 14일의 판결은 이와는 다르게 나왔다. (출처)
 
네덜란드 헤이그 법원이 13일(현지시간) 삼성전자가 애플을 상대로 제기한 통신 표준특허 침해 관련 판매금지 가처분 신청을 기각함에 따라 '강경 대응'을 강조했던 삼성전자의 통신 표준특허 공세에 적신호가 켜졌다.

헤이그 법원이 이날 기각 결정의 이유로 내세운 것은 누구나 표준특허를 공정하게 이용할 권리가 있다는 '프랜드(FRAND)'였다. 

프랜드는 '공정하고 합리적이고 비차별적인(fair, reasonable and nondiscriminatory)'을 줄인 말로, 특허가 없는 업체가 표준특허로 우선 제품을 만든 다음 나중에 특허 사용료를 낼 수 있는 권리를 뜻한다.

표준특허권자가 무리한 요구를 해 경쟁사의 제품 생산이나 시장 진입을 방해하는 것을 막기 위한, 일종의 약자 보호 제도다.

이에 따라 이번 판결이 다른 나라에서 벌어지는 특허소송에 영향을 미친다면 '강경 대응' 방침을 밝힌 삼성전자의 공세가 상당부분 약화될 수 있다.

애플이 주로 디자인이나 사용자 인터페이스(UI) 관련 특허로 삼성전자를 압박하고 독일과 호주 등 일부 지역에서 판매금지를 이끌어냈다면, 삼성은 이동통신 표준특허를 무기로 애플에 대응해왔기 때문이다.



사실 이 판결 자체는 그렇게 놀라운 결론이 아니다. 이미 지난 8월에 특허전문가 플러리언 뮬러가 인터뷰를 통해 비교적 상세한 해설과 함께 애플과 삼성의 특허전쟁 전체를 전망한 바 있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재판결과도 이와 비슷하게 나오고 있다. (출처)

삼성전자의 특허 수가 애플보다 많지만 애플의 특허가 삼성전자의 안드로이드폰 사업에 더 치명적이다. 삼성 특허의 상당수는 산업표준과 관련된 것으로 타당하고 비차별적인 조건으로 로열티를 받을 수 있는 것들이지만 애플 제품의 생산 자체를 막을 정도는 아니다. 반면 법원이 애플의 주장에 동의하면 애플의 특허는 이론적으로 제품의 특정 기능을 죽일 수 있는 살인무기가 될 수 있다. 삼성의 특허는 이에 비해 돈을 벌 수 있는 주차미터기라고 할 수 있다.

애플은 삼성이 갤럭시 시리즈가 애플 제품과 다른 다자인과 사용자 경험(user experience) 제품으로 바뀌기 전까지는 어떤 합의도 하지 않을 것이고, 삼성도 이를 수용할 수 없어 해결이 쉽지 않아 보인다.

애플은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전반에 걸친 기술 특허도 주장하고 있다. 애플이 호주에서 제기한 10가지 분야는 모두 기술과 관련된 것이며 미국에서 제기한 것 중에도 기술적인 부분이 많다. 오히려 애플이 주장하는 독점적인 디자인 권리에 대한 주장은 애플이 생각하는 것보다 인정받기 쉽지 않다. 궁극적으로 기술 특허가 양 기업 사이에 핵심적인 무기가 될 것이다.

나 역시 물론 이 기사를 읽었으며 알고 있었다. 나는 애플이 무단으로 특허를 사용해서는 지불할 의사를 보이지 않고 핑계만 대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판사에게 어필할 거라 생각했다. 프랜드는 적어도 특허권료를 지불할 의사가 있는 기업에게 적용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판사는 그간의 정황이야 어쨌든 애플이 법정에서 분명 지불할 생각은 있었다고 한 말을 믿고 프랜드를 적용했다. 결론적으로 가처분 소송에서 삼성은 애플에 패했다. 내 판단은 틀렸다. 내가 실수한 것을 확실히 인정한다.


그런데 여기서 짚고 넘어갈 점이 있다. 내가 왜 틀린 판단을 한 것인가? 중요한 원인은 지금 전세계 특허권과 법정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종의 <패러다임 변화> 때문이다.

모바일쪽 특허는 삼성과 엘지 등이 무척 많이 보유한 기술 표준특허와 애플이나 구글, MS등이 가진 일반특허, 디자인 특허가 있다. 앞서 말했듯 기술표준 특허는 휴대폰을 만들려면 피해가기 어렵기에 신규 사업자의 진입과 약자 보호를 위해 그 권한이 제한되고 있다. 반면 디자인 특허나 일반 특허는 피해갈 수 있기에 오히려 권한제한이 없다.

삼성과 엘지등 국내기업과 모토로라 등은 그간 피해갈 수 없는 필수 특허인 표준특허에 집중해왔다. 이것을 많이 쌓아두면 설령 다른 기업의 특허를 쓴다고 해도 그간 문제가 별로 없었다. 그 상대기업도 이쪽 특허를 쓰고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때문에 서로가 좋은게 좋다고 소송걸지 않고 그냥 크로스라이센스나 로열티 비율조정에서 끝나는 것이 이제까지의 화목한(?) 모바일 업계였다.

그런데 여기에 갑자기 아이폰으로 난입한 애플은 이런 룰을 송두리체 바꿔버렸다. 애플은 업체들이 보유한 표준특허는 기술적 약자인 자기를 위해 당연히 제공되어야 하지만, 반대로 자기가 독창적으로 고안한 일반특허와 디자인 특허는 다른 업체가 추호라도 써선 안된다고 외쳤다. 그리고 말뿐만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주기 시작했다. 모바일 업계의 평화는 깨지고 서로가 가진 특허의 위력을 법정에서 시험해보는 전쟁이 시작되었다. 이 전쟁에서 애플이 가장 치열한 싸움상대로 꼽은 것이 삼성이다.

삼성과 애플의 특허전쟁, 무엇이 승부를 갈랐나?


1 . 애플은 분명 삼성이 가지고 있던 무수한 기술 표준특허 가운데 일부를 침범했다. 그러나 삼성은 이 침범행위 자체로 아이폰 판매금지까지는 받아내지 못했다. 애플은 심지어 특허료를 내지 않고 무단으로 사용하려 한다는 의혹까지 받았다. 하지만 단지 너무 특허료가 비싸서 안줬을 뿐이며 낼 의향은 있다는 법정주장만 내놓았다. 판사로서도 애플이 명백히 ‘특허료는 한푼도 줄 수 없다!’ 라고 말하지 않은 이상 엄청난 소비자가 대기하는 아이폰을 판매금지 시키기에 부담을 느낀 것이다.

 2 . 삼성을 상대로 애플이 제기한 디자인 특허 역시 판매금지를 이끌어낼 만큼 중요하다거나 긴박한 필요가 있다고 인정받지 못했다. 삼성은 특허료를 내겠다는 게 아니라 일관되게 디자인 특허 자체가 선행디자인이 있으므로 무효라고 주장했다. 뮬러의 예상대로 디자인은 배타적 요소로서 법정에서 인정받기 어렵다.

3 . 삼성의 일부 제품이 판매금지 가처분 된 것은 바로 애플의 운영체제를 만드는 사용자 인터페이스 기술이 매우 중요한 요소로 인정되었기 때문이다. 독일에서는 사진파일을 손가락으로 쓸어 넘겨기다 다시 튕기는 포토플리킹기술을 삼성이 침해했기에 판매금지 당했다. 호주에서는 멀티터치를 통한 파생기술인 휴리스틱스에 관한 침해가 인정되어 판매금지 당했다. 그나마 밀어서 잠금해제에 대한 특허는 원천무효로 판정된 정도가 애플의 작은 실패였다.

결국 물러의 말대로였다. 삼성의 기술표준은 주차미터기 수준이었고, 애플의 디자인 특허는 인정을 받지 못했다. 대신에 운영체제 안에 포함된 인터페이스와 사용자경험 부분은 매우 중요한 요소로서 두 회사의 승패를 갈랐다.

디자인 특허가 인정받지 못할 거란 점에서 뮬러와 내 의견은 일치했다. 다만 나는 전통적인 기술특허가 운영체제쪽 일반특허와 적어도 대등하게 인정받을 거란 생각이었다. 반면에 뮬러는 기술특허는 별로 큰 무기가 안될 거라 보았다. 그리고 전문가인 뮬러의 의견이 옳았다. 그는 이 특허소송에서 판사가 무엇에 중점을 두고 볼 지를 정확히 짚어냈다.




법정에서 애플이 삼성에게 기술특허에서 일방적으로 얻어맞은 건 사실이다. 그렇지만 아무리 맞아봐야 기술특허 자체의 가치를 법정에서 그다지 중시하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도 없는 솜방망이에 불과하다.

내가 판단미스를 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지금 세계 특허재판 흐름이 바뀌고 있다. 전통적인 산업기술 영역인 표준기술 특허는 배타적으로 쓰이지 못하기에 점점 중요성을 상실했다. 너무 추상적이고 포괄적인 디자인 특허-의장특허는 인정받기가 어렵다. 하지만 눈에 확 뜨이면서도 독창성을 가져올 수 있는 운영체제 관련 기술은 배타적으로 쓸 수 있는 요소로 인정받았다. 즉 가장 효과적인 법정 무기로 떠오르고 있다.

이것은 패러다임의 변화라고도 볼 수 있는 아주 중요한 요인이다. 삼성과 애플의 특허전쟁에서 승부를 가른 결정적인 한 수는 운영체제였다. 애플에게는 운영체제가 있었고, 삼성에게는 그것이 없었다. 법정은 해석을 통해 운영체제 기술을 가장 높이 쳐주었고 삼성에게 이것은 치명적이었다.
서양 특유의 냉정함이 유지된 판결임에도 은연중 독창적 운영체제의 개발을 독촉하는 메시지 같은 게 느껴지는 게 흥미롭다.


물론 이것은 단지 가처분 소송이다. 본 소송으로 들어가면 또다시 판결이 바뀔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소송결과와 과정으로서 우리는 앞으로 적어도 유럽과 미국법정이 무엇을 더 중점적으로 볼 것인지 관점을 읽을 수 있다. 결국 삼성이든 엘지든 앞으로 모바일 업계에서 강자가 되기 위해서는 칩속에 들어가서는 일반 소비자가 보거나 느끼기 어려운  기술 특허보다는, 눈앞에서 만지고 돌리고 반응하는 운영체제 기술에 보다 힘을 불어넣어야 한다. 그것이 이번 네덜란드 헤이그 법정이 던지는 교훈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