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조선시대 역사를 배운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는 착각이 있다. 나라에서 무거운 세금을 매겼기에 농민들이 못먹고 못살게 되었다는 인식이다. 이건 분명한 오류다. 제도상으로 놓고 볼 때 조선시대의 세금은 무척 가벼웠다. 일본이 5대 5 로서 수확의 반을 세금으로 거둬간데 비해 조선시대 전세는 수확의 10퍼센트 정도였다. 이 외에 병역을 면하는 대가로 받는 군포 제도가 있지만 이것 역시 베 약간을 바치면 되는 것으로 전혀 가혹하지 않았다.



문제는 각 지방 특산물을 바치는 방납이었다. 이것 역시 사실은 그 지방에 나는 특산물을 약간만 바치면 되는 것으로 수량으로는 분명 가벼웠다. 그러나 조선시대가 기본적으로 물물교환 사회이며 유통이 발달하지 않았다는 점이 치명적이었다.

그 지방에 나지도 않는 물품이 배당되면 농민은 만사제쳐두고 특산물을 구하러 전국을 다니거나, 그 물품을 조달해주는 상인에게 아주 비싼 값을 주고 사야했다. 당연히 이런 방납 물품은 엄청난 폭리였다. 공급이 투명하지도 않고 선택의 여지도 없었기 때문이다. 이런 모순은 홍길동전에도 잘 나타나 있다.

서론이 좀 길었다. 내 생각에 지금 한국의 휴대폰 유통과 그에 따른 요금제가 이 방납과도 같다. 사실 아주 간단할려면 간단할 수도 있는 휴대폰 유통이 여러 가지 중간 대리점과 각 유통단계를 거치면서 거미줄처럼 꼬여서는 거품과 같은 가격을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는 소비자가 이통사를 거치지 않고 직접 단말기를 사서 개통하는 것이 아주 어렵다. 전문지식이 없는 사람은 거의 불가능하다. 심지어는 지식이 있는 사람조차도 함부로 단말기를 사서 교환할 수 없다. 각 이통사에서 이른바 '화이트리스트'란 제도로 막아놓았기 때문이다.


화이트리스트 제도는 애당초 단말기 마다 붙어있는 고유번호를 이통사 데이터 베이스에 등록시켜놓고는 이통사가 팔고 있거나 승인한 단말기에게만 통화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다. 주도권이 소비자에게 있지 않고 이통사에 있다. 이 제도의 문제는 소비자가 이통사와 별개로 국내 혹은 해외에서 단말기를 사와도 개통이 안된다는 점이다. 등록이 안되어 있고, 또한 이통사에서 의도적으로 등록을 시켜주지 않기 때문이다. 일종의 무역장벽이자 이권 유지 수단이다.

방송통신위원회에서는 이런 제도를 이번에 바꿔서 합리적으로 정비할 계획인 것 같다. 다음 뉴스를 보자. (출처)

방송통신위원회는 4월 13일 "이통사를 통하지 않고도 휴대전화 단말기를 구입해 사용할 수 있도록 유통구조를 개선하기로 했다"며 "최대한 빨리 시스템 점검과 이통사 협의를 마무리해 연내 시행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지금까지 휴대전화는 이통사가 자사에서 국제단말기인증번호(IMEI)를 등록한 단말기만 개통해주는 `화이트리스트` 제도로 유통되고 있어 경품으로 받았거나 외국에서 산 단말기, 중고 단말기도 일단 이통사에 등록해야만 사용할 수 있었다 방통위는 단말기를 어디서 샀든 이통사에 IMEI를 등록하는 절차 없이 유심(USIM;범용가입자인증모듈) 카드만 꽂으면 바로 사용할 수 있게 할 계획이다.



화이트리스트와 반대되는 제도는 특별히 분실이나 도난, 훼손된 휴대전화의 경우에만 오용 방지를 위해 IMEI를 이통사에 등록해서 개통을 막는 `블랙리스트` 제도이다. 통신 선진국에서는 대부분 소비자의 권익을 위해 이 블랙리스트 제도를 채택하고 있다.

앞에서 내가 논한 방납의 폐단을 보자. 유통이 자유롭지 않고 일부가 권력을 독점하고 있으면 반드시 소비자와 힘없는 사람들이 피해를 본다. 휴대폰 단말기도 마찬가지다. 이통사는 자기들이 추천하고 취급하는 단말기만 개통시킴으로 인해 '갑'의 권력을 가졌었다. 그리고 그 권력을 주로 복잡한 유통구조로 소비자의 주머니를 터는 데만 이용했다. 그러니 지금에 와서 투명한 구조를 싫어하고 개통권한을 쥐고 싶어하는 것이다.

블랙리스트 제도를 통해 소비자에게 권력을 주기 싫은 이통사에게도 물론 핑계가 있긴 하다.

한 이통사 관계자는 "블랙리스트 제도가 도입되면 단말기를 도난·분실했을 때 찾기 어려워질 수 있을 뿐 아니라 밀수 단말기가 증가하고 정식 인증을 받지 않은 단말기가 통신망에 위해를 가할 우려가 있다"고 말했다.



여태까지 해오던 변명이 바로 이것이다. 그러나 현재 화이트리스트 제도가 없는 미국이나 유럽에서 통신망에 심각한 위해가 가해졌다는 뉴스는 나오지 않았다. 하물며 한국에서 화이트리스트 제도로 인해 단말기를 도난, 분실했을 때 찾기 쉬워진 예는 전혀 없다. 분실된 휴대폰을 쓰기 어려우니 반납하는 게 아니라 부품으로 분해해서 팔거나 외국으로 밀수출해 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니 저런 변명이 허망하게 들릴 수 밖에 없다.

한국 휴대폰 유통구조, 소비자 위주로 변한다?

화이트리스트 제도 폐지를 통해 국내 이동통신 시장은 한단계 더 발전하게 될 것 같다. 단말기 회사인 삼성이나 엘지, 소니 등이 직접 소비자에게 각종 휴대폰을 팔고, 소비자는 이통사에게 단지 회선 서비스만 구입하는 식이 된다. 외국 단말기의 구입 사용이 가능해지면 더이상 국내에만 특정 단말기를 비싸게 파는 방법이 통하기 어렵다.



이처럼 한국 휴대폰의 유통구조를 확 바꾸게 될 블랙리스트 제도는 빠르면 내년부터 도입될 예정이라고 한다. 그때가 되면 나도 홍콩 같은 곳에서 싸게 아이폰 등을 구입해 간단히 국내에서 개통해 쓰게 될지 모르겠다. 좀더 자유롭고 소비자 위주로 재편되는 이런 변화를 환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