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 vs 애플 이야기를 계속해보자.
'과연 삼성이 제대로 컴퓨터를 만든 적이 있을까.'란 이전 포스팅을 통해서 나는 8비트 컴퓨터 시대에 양 회사가 했던 대응을 소개한 적이 있다. 아직 시장에 뚜렷한 강자가 출현하기 전이어서 다양한 플랫폼이 소개되고 사라졌던 시기였다. 표준도 없었고, 독점도 없었다.

그러나 곧 개인용 컴퓨터의 가능성을 본 기존 컴퓨터 업체의 거인 IBM이 참가하자 시장 자체가 달라져버렸다. 몇 가지 회사 전략적 이유와 개인용 컴퓨터 개발을 맡은 리더의 판단으로 인해 IBM은 다른 컴퓨터와 달리 자사의 부품을 고집하지 않고 널리 다른 회사의 부품을 조합해서 개인용 컴퓨터를 만들기로 결심한다.


이름부터 개인용 컴퓨터 (Pesonnal Computer)의 약자인 PC를 써서 IBM-PC가 된 이 컴퓨터는 8비트 단위의 처리능력을 가진 기존 컴퓨터와 달리 처음부터 16비트 처리능력을 가진 우수한 성능을 목표로 개발되었다. 우수한 성능의 제품을 빠르게 만들기 위해 하드웨어의 핵심인 CPU는 인텔에서, 소프트웨어의 핵심인 운영체제는 마이크로소프트에 맡겼다. 주인인 IBM은 기반 하드웨어 입출력을 관장하는 BIOS 하나만 틀어쥔 상태였다.

애플은 엄청난 강자인 IBM의 시장진입에 바짝 긴장했다. 표면적으로는 'IBM을 환영합니다. 진심으로.' 라는 신문광고도 냈지만 그건 애플2로 만든 챔피언 자리 때문에라도 보여준 여유였다. 실제로 이때 개인용 컴퓨터 시장은 아직 작아서 IBM이 차지한 기업의 메인프레임 컴퓨터 시장과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였다. 또한 컴퓨터 개발사에 있어서 IBM이 이룩한 업적과 특허, 그에 따른 개인과 기업의 신뢰에는 도저히 따라갈 수 없었다.

IBM-PC는 급조되었다고 말해도 좋을 단기간에 개발되었다. 또한 주력 프로젝트라고 말하기도 어려웠다. 그럼에도 IBM-PC는 개방된 구조와 부품의 분업, 강력한 성능에 비해 싼 가격으로 인해 급속히 시장에 보급되었다. 그리고 금방 표준이 되었다. IBM이라는 명성이 가진 신뢰감에 초기보급이 쉬웠고 업무용으로 강력한 성능을 뒷받침해주는 스프레드 시트인 로터스 1-2-3, 강력한 워드프로세서인 워드퍼펙트의 힘이 컸다.

미국 기업들은 IBM을 신뢰했기에 나중에는 컴팩등의 다른 업체에서 만든 호환기종까지도 신뢰하기에 이르렀다. 어느새 애플2가 만든 8비트 컴퓨터는 점점 뒤지는 처리성능과 업무에 이용하기엔 제한된 활용성으로 인해 점점 퇴조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또 하나의 큰 전자기기 시장 일본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아스키가 제안하고 각 가전업체에서 내놓은 8비트 컴퓨터 MSX와 PC 8801 역시 밀려났다. 마침내 IBM-PC는 미국과 전세계를 석권하며 실질적인 표준 컴퓨터가 되기에 이르렀다. 즉 그냥 컴퓨터라고 말하면 바로 IBM-PC가 된 것이다.


물론 일본은 나름의 분전으로서 MSX2, MSX2+에다가 나중에는 Z80와 완벽 호환되는 R800이란 16비트 CPU를 하나 더 탑재한 MSX 터보R이란 제품까지 내놓았다. 그러나 16비트와 IBM PC를 향해서 가는 시대 흐름은 되돌릴 수 없었다. 그나마 일본은 동양권의 2바이트 문자인 일본어가 표시하기 어렵다는 점을 노려서 개량한 샤프의 IBM 파생 기종 PC 9801시리즈로 나름의 독자규격을 유지했다.

기존 개인용 컴퓨터 업체들이 하루가 다르게 매출감소를 겪으며 망해갔다. 변하지 않으면 죽는다는 절박감이 그들에 감돌았다. 시대는 바야흐로 표준화와 고성능, 저가격의 본격 산업 경쟁으로 치달았던 것이다. 과연 이때 애플과 삼성은 각각 어떤 선택을 했을까. 우선 애플의 선택을 알아보자.


16비트 PC시대, 애플이 했던 선택은?

애플에게는 마치 두 명의 창업자를 상징하는 듯한 두가지 길이 있었다.
하나는 스티브 워즈니악의 길이다. 애플을 번영하게 만들어준 애플2를 가지고 호환성을 유지한 개량제품으로 16비트를 그 연장선상에서 끌고 가는 것이었다. 실제로 애플은 애플2 GS란 컴퓨터를 통해 호환성을 유지하면서도 매킨토시와 비슷한 미려한 그래픽과 아름다운 사운드를 들려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했다.

실제로 워즈니악은 자기가 만든 애플2와 그 팀에 애정이 많았다. 회사가 결정하면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는 욕심이 없었다. 또한 회사내부의 권력다툼에도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애플2의 개량형은 그저 서브 제품일 뿐 주력이 되지 못했으며, 애플 관련 개발팀도 언제나 대우에서 찬밥 신세였다. 애플3라는 이름으로 내놓은 하드웨어는 호환성도 없는데다가 형편없는 내구성으로 인해 애플 이란 컴퓨터 브랜드에 먹칠만 했다.

다른 하나는 스티브 잡스의 길이었다. 그는 워즈니악이 만든 애플2를 이용해 성공했지만 언제나 애플2는 온전한 자기 컴퓨터가 아니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또한 그는 언제나 인류에 업적을 남길 혁신적 제품을 원했다. 따라서 애플2가 얼마나 수익을 내주는 가는 중요한 게 아니었다. 잡스는 야망이 컸고 권력다툼도 각오했다. 특별히 16비트 시대가 오지 않았어도 잡스에게는 완전히 새로운 컴퓨터가 필요했다. 스스로의 업적이 될 수 있는 그런 컴퓨터 말이다.

처음에 그 대상은 차기 주력제품인 '리사'였다. 아마도 잡스가 자기 딸 이름을 붙인 거라 짐작되는 이 컴퓨터는 당시로서는 아주 고가의 첨단 하드웨어를 탑재한 고급제품이었다. 모토롤라의 잘 짜여진 CPU를 썼고 운영체제로는 20년은 앞서간 그래픽 유저 인터페이스를 썼다. 연구개발비와 표준이 아닌 최신 하드웨어 탑재의 비용으로 인해 리사는 무려 1만달러에 달하는 가격표를 붙이고 나왔다.

그런 엄청난 가격과 초기의 몇 가지 오류로 인해서 리사는 시장에서 실패했다. 하지만 이것은 애플이 16비트 시대를 맞아서 했던 중요한 전략적 선택을 명확하게 보여주었다. 이후로 스티브 잡스는 비교적 저렴한 가격에 편리한 사용법을 구현하려는 또 하나의 프로젝트에 매진했고 마침내 1984년, 매킨토시를 출시하기에 이르렀다.



애플은 표준화된 부품으로 개별 업체를 모아 느슨한 연합군을 형성하는 IBM의 전략을 따르지 않았다. 애플은 표준을 거부하고 오히려 남들과 완전히 다르게 되자는 선택을 했다. 잡스는 컴퓨터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양쪽에서 획기적으로 앞서나간다는 전략을 세웠다. 그래서 매킨토시에 그런 방식을 전부 적용했다.

첫번째로 팔로알토 연구소에서 가져온 그래픽 유저 인터페이스였다. 이것은 워크스테이션급에서나 보던 실험실 기술이었다. 개인용 컴퓨터에 이것을 넣음으로 인해 애플제품은 다른어떤 PC와도 차별화될 수 있었다.

두번째로 마우스란 입력장치의 채용이었다. 키보드로 글자를 쳐서 조작하는 기존 IBM PC에서 마우스는 필요없었지만, 맥에서는 필수였다. 그런데 이입력장치는 단순히 운영체제용 뿐만 아니라 전반적인 모든 소프트웨어에서 이용되면서 획기적인 조작성 향상과 편리함을 가져왔다.

세번째로 완전히 다른 CPU였다. 기존 인텔의 80계열 칩을 쓰면 싸게 고효율을 얻을 수 있었지만 잡스는 모토롤라의 68계열 CPU를 썼다. 여러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68계열이 슈퍼컴퓨터의 칩을 축소한 설계로서 보다 체계적인 처리능력을 가졌기 때문이다.



애플이 16비트 시대를 맞아 내린 선택은 획기적인 차세대 컴퓨터를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그럼으로서 표준이 아니어도 선택받을 수 있고, 가격경쟁에서도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이 전략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어서 애플은 독자적인 표준 내지는 한단계 앞선 기술이나 인터페이스로 자사 제품을 철저히 차별화시키고 있다.

그럼 같은 시기에 한국의 삼성은 어떤 선택을 했을까. 그것은 다음 포스팅에서 애플과 비교하며 자세히 알아보기로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