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 vs 애플 을 이어서 말해보자.

첫 단추를 잘못 끼우면 어떻게 될까. 중간쯤 끼워나갔을 때 이미 단추가 잘못 채워지고 있다는 걸 알았다면? 모두 풀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게 정상이지만, 그 결정을 내리기가 쉽지 않다. 짜증이 나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나름 힘들여 끼웠던 것을 다시 풀어버린다는 허무감과 상실감을 감당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IBM의 하드웨어와 MS의 운영체제가 세계를 강타했던 16비트 PC 시대는 마치 해일과도 같았다. 이제까지 난립을 허용했던 관련 산업계에 표준화와 효율성 형상이라는 거대한 흐름이 몰려왔다. 이 해일에 맞서지 못한 기존 8비트 컴퓨터는 차례로 무너졌다. 애플2는 마지막까지 버텼지만 그것도 오래 가지 못했다.

애플의 스티브 잡스는 리사와 매킨토시로 이어지는 혁신적인 플랫폼 개발로 대항하려 했다. 이것은 정공법이었다. 맞서서 성공하고 상대를 제압하든가, 아니면 패배해서 내가 죽든가 둘 중 하나였다. 틈새시장을 노린 것도 아니고 상대에게 부품이나 운영체제를 공급한 것도 아닌 이상 당연했다.

이 방법을 택한 회사가 굳이 애플만 있는 건 아니었다. 아타리에서 독립한 인력들이 아타리ST 라든가 아미가 같은 나름 대담하고 특성있는 기종을 내놓았다. 특히 이 가운데 아미가 컴퓨터는 지금 생각해보아도 아까운 컴퓨터였다. 스티브 잡스도 한때 일한 바 있는 게임기 회사인 아타리에서 독립한 인력이 만든 만큼, 아미가에는 혁신적 기능과 친근한 인터페이스가 있었다.


아미가는 하드웨어 적으로는 모토롤라의 68시리즈를 채택했고, 내부에는 그래픽과 사운드 를 맡은 보조 프로세서를 별도로 두었다. 때문에 속도 저하없이 비디오 합성 기능과 굉장한 게임기능을 지녔다. 운영체제로도 맥의 그래픽 유저 인터페이스와 비슷한 것을 갖췄다. 그러나 이런 우수한 기능을 가지고도 마이너한 보급률과 제대로 된 오피스 등 킬러 타이틀의 부재로 조용히 사라졌다.

이런 식으로 표준화란 흐름에 밀린 모든 플랫폼이 조용히 사라지는 가운데 애플이 매킨토시로 데스크탑 출판이란 시장을 잡아 간신히 명맥을 유지했다.


그럼 삼성은? 삼성은 당시 반도체, 특히 메모리에 주력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메모리는 종래에 미국회사가 주도하다가 일본업체로 주도권이 넘어갔는데, 이걸 다시 한국의 삼성이 빼앗아가려는 중이었다.

메모리 산업은 회로설계 기술과 미세공정 기술이 적시에 이뤄지는 대량의 설비투자과 결합되어 승부가 결정된다. 삼성은 해외에서 유학중인 한국두뇌를 최대한 이용해서 기술을 확보하는 한편, 일본 기술자에게서 설비투자와 관련된 노하우를 배웠다. 그 결과 64K 디램을 시작으로 삼성은 세계시장에 기술과 양산능력을 알려나갔다.

이건희 회장은 삼성그룹의 주력 부분 자체를 바꿀 생각이었다. 이전까지 모직, 제당, 물산 등에 치중하던 후진국형 재벌이던 삼성은 금융과 전자를 중심으로 한 선진국형 재벌로 변해갔다. 이건희 회장 스스로도 저 두 분야를 빼면 무엇이든지 버릴 각오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전자라고 해도 이른바 '산업의 쌀' 이라는 반도체를 제외하면 삼성이 가진 기술이라는 여전히 보잘 것 없는 수준이었다. 특히 컴퓨터는 그 안에 들어가는 게 바로 반도체 였음에도 삼성전자에게 있어 중요하지 않은 분야였다.

한국정부가 논란끝에 교육용 컴퓨터로 8비트가 아닌 16비트 컴퓨터를 선정하자 8비트 컴퓨터 시장은 순식간에 사양길에 접어들었다. 본래 비싼 컴퓨터를 사는 것은 기업 아니면 부모였다. 기업은 제대로 된 업무용 어플이 없는 8비트를 원하지 않았고, 부모들 역시 교육에도 쓸 수 없이 게임만 많은 8비트 컴퓨터를 장난감으로 보았다. 일 리가 있는 것이 8비트에는 제대로 된 오피스 어플이 지속적으로 지원되지 않았다. 심지어 한글지원조차 엉성했다.


삼성은 매우 빠르게 기존에 생산하던 8비트 컴퓨터 SPC 시리즈를 포기했다. 그리고는 16비트 IBM 호환 PC를 생산했다. 독자적으로 다져진 어떤 하드웨어, 소프트웨어 기술도 없다는 게 이럴 때는 너무도 편했을 지 모르겠다. 어떤 내부 반발이나 거부감도 없었다. 이때 삼성전자에게 있어 컴퓨터는 그저 텔레비전이나 VTR같이 필요에 따라 외국에서 부품을 사와서 기판위에서 짜맞추고 케이스에 담아 내보내면 되는 가전제품일 뿐이었다.

컴퓨터란 무엇이며 그 안에 무엇을 담아야 하는지, 쓰는 사람에게 어떤 미래를 보여줘야 하는지 고민 같은 건 전혀 없었다. 같은 시기 애플의 스티브 잡스가 바로 그것을 두고 치열한 고민을 애플의 엔지니어들과 하고 있었을 때 말이다. 애플에게 컴퓨터는 미래를 좌우할 핵심 플랫폼이었지만 삼성에게 컴퓨터란 그냥 팔리니까 만드는 공산품일 뿐이었다.

같은 시기, 삼성이 전자기술을 배워왔던 일본을 보자. 일본은 미국으로부터의 거센 해일에 나름 거세게 저항했다. 샤프는 X68000이라는 맥을 닮은 멋진 독자 워크스테이션을 내놓았고, 후지쓰는 FM-TOWNS라는 독특한 PC호환 기종을 발표했다. 이외에 NEC는 PC9801시리즈라는 일본식 파생기종으로 일본 시장을 굳건히 지켰다.

이들이 나름 일본시장을 지킬 수 있었던 건 일본어란 2바이트에 한자가 많은 언어를 미국 업체들이 효과적으로 공략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자체에 일본어와 한자롬을 내장한 이들 기종은 일본사람에게는 훨씬 미려한 폰트와 편리한 사용을 약속했다. 더구나 상당한 호환성까지 확보했기에 최신 어플을 약간만 고치면 바로 쓸 수 있었다. 덕분에 일본은 순수하게 소프트웨어만으로 PC에서 일본어를 지원하는 DOS/V가 나오고 나서도 한참동안 나름 자국 시장을 지켜낼 수 있었다.


삼성으로 대표되는 국내 시장을 보자. 독자기종은 고사하고 한국 컴퓨터 업계가 당면한 과제는 한글지원이었다. 하드웨어에는 거의 비용을 들이지 않을 수 있지만 이걸 고객에게 팔기 위해서는 한글을 쓸 수 있게 해줘야 했다. 그러나 어떤 업체도 소프트웨어에 투자하지 않았으니 그게 쉬울 리 없다. 삼성은 SPC에서도 한글지원에 투자하지 않았다. 16비트로 와서도 마찬가지로서 당시 한글을 쓰는 가장 좋은 방법은 '한글카드'였다. 일본업체 같은 원칩도 아닌 카드 말이다. 그걸 꽂고 다시 소프트웨어를 구동시켜야 했다.

16비트 PC시대, 애플과 다른 삼성의 선택은?

'보석글' 같은 초기 워드프로세서와 한글지원이 되는 DOS를 거쳐 아래 아 한글이 나오기까지 16비트 시대에도 국내 대기업들은 딱히 그 덩치에 걸맞는 투자와 노력을 전혀 하지 않았다. 또한 이것이 16비트 PC시대를 맞은 삼성의 선택이었다. 애플이 사활을 걸고 애플2에서 나오는 모든 이익을 개발에 쏟아넣으며 리사를 만들어 실패하고, 다시 매킨토시를 만들고 있을 때였다.

삼성은 단지 이기는 편에 서는 정도가 아니라, 그 이기는 편에 가담하기 위한 최소의 컴퓨터 분야 투자 마저도 아까워했다. 덕분에 국내 한글 지원은 완성형이냐 조합형이냐 같은 논쟁을 거쳐, 심지어 한글의 모아쓰기가 컴퓨터에 적합하지 않으니 풀어쓰기로 전환하자는 주장까지 나올 정도였다. 인간을 위한 도구로 개발된 몇십년 역사의 컴퓨터에, 수백년 역사를 지닌 한글이 맞춰줘야 한다는 참으로 어이없는 주장이었다.

일본이 그 많은 한자까지 써야한다는 제약에도 불구하고 원칩으로 해결하며 도리어 일본어 지원을 자국 플랫폼의 발전에 이용한 것에 비하면 참으로 여러가지 생각을 하게 한다. 적시에 약간의 투자만 했어도 일어나지 않을 일이었다.


8비트 시대에 어떤 하드웨어 설계 역량도, 소프트웨어 개발 역량도 쌓아놓지 않은 삼성은 이미 첫번째 단추를 잘못 끼웠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16비트 PC시대에도 두번째 단추를 잘 못 끼울 수 밖에 없었다. 인력이 없어 한글화를 할 수 없어 제대로 된 한글 지원을 할 수 없었다. 결국 하기에 따라서는 강력한 한글 지원을 무기로 장악할 수 있었던 자국시장을 놓쳐버렸다. 동시에 다시 어떤 역량도 키우지 못하고 컴퓨터 조립업체로 머물렀다.

물론 국가로서 모든 여건이 좋은 미국 업체인 애플에 비해 한국 업체인 삼성의 여건이 이때도 열악했던 건 사실이다. 삼성에게 있어 메모리로 승부를 봐야할 중요한 시기였기에 다른 걸 돌아볼 여유가 없었을 수도 있다.



좋다. 그것도 어차피 선택이고 삼성은 나름 그 선택의 결과로 세계적 반도체 업체가 되었다. 이것만도 엄청난 성공이다. 그러나 얼핏 헛된 선택이나 실패의 지름길로 보이기 쉬운 컴퓨터 분야 투자가 가진 영향을 생각해보자. 저때부터 역량만 키웠어도 한글화 정도는 쉽게 할 수 있지 않았을까. 그것조차 제대로 해주지 못할 빈약한 역량을 가진 가운데 반도체만 잘 만드는 기업이 되어 버린 삼성이라는 것이다.

오늘날 저때의 역량을 기반으로 iOS를 내놓은 애플의 아이폰과 리눅스 커널을 이용해 우수한 안드로이드 운영체제를 내놓는 구글을 보자. 삼성은 하다못해 공개된 리눅스 커널 하나도 제대로 이용할 능력이 있을까? 안드로이드에서 다 공개한 제원에 맞춰 포팅하는 버전 포팅조차 허덕거리는 현재의 역량은 저 때의 선택이 보여주는 후유증이다.

16비트 PC시대 삼성에게는 그것이 최선의 선택이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떤 선택에도 치뤄야 할 희생이 있는 법이다. 그리고 지금부터 삼성은 그 선택의 대가로 더욱 많은 돈과 인력을 들여서 현재 스마트폰 시대의 흐름에 적응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