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히 최근까지 예비군 훈련에 가거나, 동원소집을 받을 때 늘 나왔던 말이 있다. 북한이 우리보다 훨씬 많은 전력을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우리는 항상 북한이 쳐들어오면 밀릴 거란 국방부의 홍보자료다.

군사와 무기에 대해 아무런 지식이 없었을 때, 나는 그 말을 그냥 받아들였다. 얼핏 봐서 북한의 전차가 3천대인데 한국은 2천대 정도이며, 북한은 전투기 숫자와 전함 숫자도 한국보다 많았다. 야포 숫자는 물론 심지어 군인 숫자도 북한이 더 많기에 내일이라도 전쟁이 나면 당장 6.25때처럼 쭉 밀릴 것만 같았다.



그러나 생각이 좀 깊어지면서 실제 남북한 경제력 차이에 대해 알게 됐다. 80년대 이후 남한은 늘 북한을 국방비에서 압도했으며 현재는 거의 상대도 안되는 엄청난 차이가 난다고 했다. 그러면 근 30여년 동안 엄청난 국방비를 쓴 셈인데 그 돈을 가지고 대체 뭘 했단 말인가? 전부다 군인들이 밥 먹고 자는 데 쓰기라도 했단 말인가?

실상은 한국이 북한보다 더 질 좋은 전력으로 재래식 군사력에서 압도하고 있다. 위에서 든 숫자놀음은 실상 질을 고려하지 않은 양적 비교에 불과하다. 스타크래프트로 예를 들면 상대방에 저글링 30마리가 있는데 그에 맞서는 이쪽은 울트라리스크 20마리 밖에 없어서 무섭다고 떠는 꼴이다.

서론이 좀 길었다. 내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할까. 그건 삼성이나 엘지등의 대기업의 핵심 정책에 대해 말하기 위해서다.
우리는 흔히 요즘 애플의 여러 뛰어난 비전과 정책을 보고는 왜 우리나라 기업들은 이렇게 머리도 없고 제대로 된 정책도 없을까 한탄한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그들은 결코 어리석지 않다. 억대 연봉을 받고, 외국의 유수한 교육과정을 이수한 인력들이 놀면서 학위따서 삼성이나 각 대기업에 들어온 게 아니다.




그렇다면 왜 그들은 애플처럼 하지 않을까. 그것은 각자가 처해있는 환경이 다르고 중점을 두기로 한 방향이 다르기에 생긴 정책적인 차이 때문이다. 삼성을 두고 왜 당장 애플처럼 하지 못하냐고 말하는 건 탁상 앞에서 쉽게 말하긴 좋아도 현실성이 없다. 그것보다는 이제까지의 삼성이 어떤 방식으로 나름의 성공을 거뒀는지 분석하고 그 위에서 방향을 짚어보는 게 더 바람직하다. 하다못해 욕을 해도 좀 알고 욕하는게 났지 않을까.

90년대 이후 삼성전자의 중요한 정책방향은 몇 가지 사실에 기초해 있다. 우선 다음 뉴스를 보자.(출처)

삼성과 LG는 2015년까지 AMOLED에 170억 달러를 투자할 예정이다. 삼성은 2006년부터 2010년까지 LCD 기술에 110억 달러를 투자했는데, 앞으로 5년 간 AMOLED 기술에 90억 달러를 투자할 예정이다. 특히 2011년 한 해에 30억 달러를 투자하고, 5.5 세대 AMOLED 공장이 가동될 예정이다. 삼성 모바일 디스플레이는 OLED TV를 위한 8 세대 공장을 계획하고 있다.
LG 디스플레이는 LG 화학과 함께 OLED 기술에 엄청난 투자를 할 예정인데, LG 디스플레이는 새로운 OLED 패널 공장을 세울 계획이고, LG 화학은 OLED 라이팅에 투지를 할 계획인데, 2015년까지 총 투자액은 80억 달러에 달한다.

현재 AMOLED를 거의 독점하다시피 선두를 달리는 삼성이 투자를 늘리고, 그 뒤를 쫓아가기 위해 유일한 경쟁자가 한국의 엘지다. 다른 나라 기업은 아예 이 차세대 디스플레이에 도전하기를 포기했다. 중국은 아직 기술적으로 너무 뒤진 것 같다. 나름 뿌듯한 결과다.


삼성이 처음 부터 이렇게 잘나갔던 건 아니다. 90년대 미국 가전매장인 서킷시티에 제품을 넣으려던 삼성은 서킷시티의 사장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말을 들었다.

세상에서 하나 밖에 없는 물건을 가져오든지, 가장 싼 가격의 물건을 가져오시오. 아니면 두번 다시 찾아오지 마시오!

이것이 당시 미국의 가전 시장에서 살아남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이후에 이건희 회장은 삼성전자의 담당자에게 이런 말을 남긴다.

우리는 물건을 가장 싸게 만들어야 한다. 가격이 비슷하다면 품질이 더 우수해야 한다. 품질마저 같다면 제일 빨리 내놓아야 한다.

이것이 바로 삼성전자의 성공을 가져온 핵심정책이다. 이후에 삼성 반도체의 신화를 만든 윤종용은 더욱 구체적으로 이 말을 한 문장으로 비유해 압축했다.

아무리 좋은 사시미도 하루가 지나면 값이 폭락한다.

이것은 <디지탈 사시미 이론>으로 명명된 유명한 말이다. 오늘의 첨단기술이 잠시만 지나면 구식 기술이 되는 상황에서 첨단기술을 채택한 제품은 될 수 있으면 빨리 내놓아 최대의 수익을 확보해야 한다는 뜻이다. 또한 이 이론을 경쟁업체에 적용하면 지금 당장은 대적할 수 없을 것만 같은 기술이 담긴 제품이라도 결국 시간이 지나면 일상재화되면서 프리미엄이 사라진다는 이야기다.



애플제품을 바라보는 삼성전자의 시선도 아마 이와 같을 것이다. 처음 아이폰과 아이패드가 발표되었을 때는 완전히 독보적이었다. 그러나 안드로이드가 경쟁자로 나오고, 점차 스마트폰과 태블릿이 널리 보급되면서 그 독보성은 점차 옅어지고 있다. 4세대까지 나온 아이폰이 점차 혁신성이 감소한다는 건 디지털 사시미 이론이 맞다는 점을 보여준다.

그리고 여기서 바로 삼성이 치고 들어갈 구석이 있다. 애플 제품이 약간 시들해질 무렵 애플에서 채택하지 않은 신선한 재료(부품)인 AMOLED, 고화소 카메라 등을 갖춘 제품을 재빨리 내놓는다. 상대적으로 삼성 제품이 보다 신선한 사시미가 되는 순간을 만드는 것이다.


위에서 나온 AMOLED 공장의 투자도 마찬가지다. 시장의 주도권을 쥐고는 가장 신선한 첨단기술의 사시미를 가장 빨리 내놓아 최대한의 이익을 보기위해 과감한 투자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 뒤를 따라오는 기업들은 이미 신선도가 다 떨어진 시장에 뒤늦게 내놓을 수밖에 없다.


이렇듯 애플이든 삼성이든 나름 자기가 가진 역량 속에서 최선을 다해 제품을 매력적으로 보이려 노력하고 있다. 향후에도 이어질 삼성의 디지털 사시미 정책을 주시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