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가들이 늘 하는 말이 있다. <국민을 위해서> 라는 형용사다.
새로운 법안을 내놓을 때나, 세금을 올릴 때, 전쟁을 할 때도 그들은 이 말을 즐겨쓴다.  심지어 자기들이 받는 월급을 올릴 때나, 죄를 저지른 정치인을 멋대로 사면할 때도 이 말을 쓴다. 한번도 정직하게 <나 스스로를 위해서> 라고 말하지 않는다. 어쩌면 정치인들은 자기가 밥을 먹거나 잠을 자는 것조차 국민을 위하고 나라를 위해서라고 말할 지도 모르겠다.
 
이게 정치가 뿐일까. 아니다. 기업인도 마찬가지로 <소비자를 위해서>라고 말한다. 신제품을 개발할 때나 새로운 상품을 출시할 때 이 말을 쓴다. 그러다가는 심지어 전혀 소비자와 관계없는 통제나 자기 멋대로의 정책을 펼칠 때, 원치 않는 끼워팔기나 요금제를 만들 때도 이렇게 말한다. 정치인과 별로 다를 바가 없다.

실리콘 밸리에 있는 미국 기업이 요즘 고소전쟁에 휘말려 있다. 저마다 다른 생각과 전략을 가지고 서로를 고소하고는 재판정에서 전문 변호사들끼리 알아서 싸우게 하고는 뒤에서 조용히 합의를 보고 돈가방과 새 계약서를 주고 받는다. 그리고는 미소를 지으며 악수하고 언론에 합의결과를 발표한다. 이 과정에서 철저히 소외된 소비자는 겨우 그들의 말 속에서나 <소비자를 위해> 라고 언급될 뿐이다. 그게 바로 미국 기업의 소비자 상대법이다.


여기 두 개의 커다란 글로벌 기업에 얽힌 뉴스 두 가지가 있다. 먼저 마이크로소프트의 것부터 소개하겠다. (출처: 일렉트로니스타)

마이크로소프트는 안드로이드 관련 특허들의 침해로 모토롤러를 ITC와 워싱톤 주 서부 디스트릭 법원에 각각 제소했다. 마이크로소프트는 모토롤러가 칼렌더, 주소록, 이메일 싱크, 배터리및 연결 레벨들 알림 앱들 같은 스마트폰 경험에 필수적인 기술들을 침해했다고 주장했다.
마이크로소프트는 정확한 피해 액수는 밝히지 않았지만, ITC 조사 결과 마이크로소프트의 주장이 합당하다고 결론이 날 경우 미국 시장에 모토롤러 폰들이 수입 금지 될 수 있다. 모토롤러는 이 소송에 대해 강력하게 변호할 것이라고 말했고, 자사의 특허 라이브러리가 이를 충분히 지원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마이크로소프트는 리눅스를 커버하는 다수의 특허들을 보유하고 있고, 이미 아마존과 노벨 같은 회사들은 라이센스 계약을 체결한 바 있다. 현재까지 마이크로소프트는 안드로이드 자체보다는 모토롤러를 택해 제소했다. 업계에 의하면 이전의 HTC와의 합의는 HTC가 계속 윈도우 폰 7 기기들을 생산하는 것을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복잡한 사실들이 얽혀 있지만 아주 쉽게 설명해보겠다.


MS는 곧 윈도우모바일7이라는 스마트폰 OS를 출시한다. 그런데 막상 출시하려니 대부분의 굵직한 이전 협력업체들이 안드로이드에 주력하고 있다. MS는 오피스에 대한 특허권 몇 가지를 무기로 이들을 협박하기로 한다. 한마디로 당장 새 스마트폰에 돈을 내고 윈도7을 채택해서 쓰던가, 특허권료를 MS에 내고 안드로이드를 쓰든가, 둘 다 싫으면 법정에서 한바탕 붙어보자는 뜻이다. 즉, 예전에 돈을 좀 빌려준 깡패가 술집에 와서 보호비를 내든가 아니면 행패를 감당하든가 하라는 식이다. 얼마전 모토롤라는 윈모7을 채택해 달라는 MS의 요구를 단호히 거절한바 있다.

기업이 자사의 이익을 위해 가능한 모든 수단을 쓰는 거야 당연하다. 또한 누군가 내 특허를 침범했으면 고소하는 것도 당연하다. 하지만 이 두 가지를 결합해서 전략적으로 법정을 이용하는 경우는 좀 다르다. 법정에서의 법리공방은 별 의미도 없이 뒤에서 주고 받는 두 회사의 팩스와 경영자 사이의 합의와 돈이 오가고 나면 문제가 마무리된다. 나머지는 그저 들러리에 불과하다.

문제는 이러고 나서 두 회사는 또 이 모든 것이 <소비자를 위해> 벌어진 일이라 말한다는 점이다. 정작 소비자는 저런 다툼 사이에서 이익은 커녕 손해를 감수해야할 상황이 되어도 말이다.

이번엔 애플에 관련된 뉴스를 보자. (출처: 애플 인사이더, 블룸버그)



애플은 예일 대학 컴퓨터 공학 교수 데빗 겔렌터가 창설한 미러 월즈와의 '커버 플로우'와 '타임 머신' 인터페이스들에 관한 특허 침해 소송에서 패소했다. 미러 월즈는 2008년에 애플이 자사 특허들을 침해했다고 제소했는데, 연방 배심원단은 지난 금요일 미러 월즈의 손을 들어 주어 애플이 미러 월즈에게 6억2,550만 달러를 배상하라고 명령했다. 이 배상액은 2010년에 두번 째로 가장 큰 액수이고, 미국 역사 상 네번 째로 가장 큰 액수이다.
그러나 애플 변호인단은 오늘 이 판결에 불복하고 이의신청을 제출한 것으로 알려졌다. 애플 주가는 오늘 오후 1시 48분 현재 $4.04 혹은 1.4% 하락했다.


이건 엄청난 단위다. 거의 7천억원이 넘는 돈을 물어줘야 하는 패소로 애플이 내몰린 것이다. 금액이 워낙 크고, 납득할 수 없어 항소하긴 했지만 연방 배심원단의 결과는 뒤집히지 않기로 유명하다고 한다. 더구나 증거가 상당히 뚜렷한 모양이다. 아마 법정밖 합의든, 패소후 벌금이든 막대한 돈을 주어야 할 것 같다.




아이팟과 아이폰에 모두 쓰인 이 기술은 애플의 트레이드마크가 되었다. 따라서 배상액수도 엄청나게 뛰어올랏다. 미국은 징벌적 배상금제도가 있기 때문이다.

애플과 MS, 누구를 위해 재판정에 가는가?

애플 역시 이 재판에 나가며 <소비자를 위해서>라고 말할 것이다. 자기들은 소비자를 위해 혁신기술을 개발해서 상품을 만들려한 죄밖에 없다고 말이다. 사실 애플은 누구보다도 이 계열의 특허를 많이 보유하고 있으며, 다른 회사를 고소해서 벌금을 물리기로 유명하다. 그런 애플조차 수세에 몰려 엄청난 배상금을 무는 모습은 비록 재미있긴 해도 씁쓸한 느낌을 준다. 미국의 IT관련 재판이 진정으로 누구를 위해서 존재하며, 고소를 연발하며 거기에 나가는 기업들이 누구를 위해 그 재판을 치르는 지를 생각해보자.

본래 소송과 재판이란 정말로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정상적 방법으로 해결이 불가능할 때, 국가기관의 도움을 빌어 문제를 강제적으로 해결하고자 하는 수단이다. 그런데 미국의 IT업체는 협상수단부터 시작해 단지 대화를 유리하게 이끌기 위해서, 자기 이익을 지키려는 목적으로, 시간을 벌기 위해서 등등 온갖 수단으로 고소를 남발하고 재판정을 이용하고 있다. 그러다보니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진다고 애플이 패소해서 막대한 배상금도 물게 되는 일이 생긴다. MS는 반독점법 재판에서 호되게 당한 지 얼마되지도 않아 이번에는 다른 업체를 마구 고소하기 시작한다.



이 과정에서 진정으로 소비자가 끼어들 틈은 없다. 아마도 MS와 모토롤라의 재판이 원만하게 끝나면서 모토롤라가 MS에 합의금을 주게 되면 소비자들은 약간 오른 스마트폰 가격을 감당해야 한다. 애플이 패소해서 막대한 벌금을 물고 커버플로우 기능을 빼거나 돈을 주고 넣게 되면, 반대로 다음세대 아이폰이나 아이패드  가격이 오를 가능성이 높다. 결국 피해는 소비자가 다 보게 된다. 이런 흐름을 잘 알면서 <소비자를 위해서>라고 말하는 걸 더이상 믿을 것인가.

현재 PC운영체제의 92퍼센트 가량을 쥐고 있는 기업과 스마트폰 시장의 30퍼센트를 가진 기업의 재판정 뉴스 두가지를 보며 잠시 생각해보자. 과연 이들 기업이 그 점유율만큼 모든 면에서 소비자를 중시하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