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KBS뉴스]



흔히 기간통신망이라 부르는 전화망과 인터넷 통신망의 특징은 마치 수도나 전기처럼 해당 서비스를 어떻게든 쓰지 않고는 제대로 된 생활을 누리기 힘들다는 점이다. 인터넷 데이터로 모든 소통을 다할 수 있을 것 같아도 음성전화로 대표되는 전화통화는 우리 생활 속에 확고히 자리 잡고 있다. 간단한 의사소통이나 안부인사는 메신저나 문자로 할 수 있지만 사적인 긴밀한 내용을 주고 받을 때는 음성통화를 하는 것이 일반적인 사용형태다.

때문에 이윤이 중요한 사업자라고 해도 이런 기간 통신망을 운영하는 회사에게는 국가와 국민에 대한 일정한 의무가 주어진다. 일정부분 독점적인 이윤추구를 인정해주는 대신, 이윤이 적거나 손해가 나는 지역에도 서비스를 제공하고 사회적 재화의 필수 공급망 역할을 기대하는 것이다.

그런데 최근 이런 기간통신망 운영자로서 과연 국내 통신사들이 제대로 된 의무를 다하고 있는 지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특히 피해자가 양산되고 있는 보이스피싱 차단을 위한 조치가 너무 미흡하다는 지적이다.

요즘 보이스피싱의 특징은 사설중계기를 이용한 송수신번호 조작이다.  보이스피싱 범죄 조직은 해외 콜센터를 거점으로 활동하면서 우리 국민이 국제전화번호로 송신하면 잘 받지 않는다는 점에 따라 발신된 국제전화번호를 이동전화 전화번호로 바꿔 피해자를 속인다. 이 과정에서 '심박스'로 불리는 불법 번호변작 중계기(심박스)를 사용한다.

그동안 경찰에서 이러한 번호변작 중계기를 직접 단속하는 방식에만 의존해 차단해왔다. 신호를 추적해서 물리적인 하드웨어를 끊고 압수하는 방식이다. 그런데 이러다보니 범죄조직들이 단지 물리적인 경찰단속만 피하면 계속 범죄를 저지를 수 있다고 인식하게 됐다. 결국 사설중계기를 땅에 파 묻고, 은신처로 쓰는 집에 숨기고, 차로 이동하면서 사용하는 등 추격하는 경찰과 보이스피싱의 숨바꼭질이 시작됐다.

단속에 걸리지 않는 사설중계기는 계속 보이스피싱 피해자를 만든다. 국내 일반 휴대폰 번호로 연락이 오게 되니 의심없이 전화를 받는다. 일단 받고 나면  검찰청이라고 사칭하면서 통화하기가 쉽다. 등기우편이 반송 됐다고 하면서 오는 전화를 비롯해 각종 개인정보를 노린 범죄 모든 것이 일단 국내 번호로 걸려온 전화를 받으면서 시작된다.

문제는 이런 피해다발에 비해 조치는 매우 늦다는 점이다. 겨우  작년 12월부터 번호변작 중계기 등 보이스피싱에 이용된 단말기를 네트워크 기반으로 즉시 차단이 가능하게 됐다. 최근에야 과기정통부는 주요 단말기 제조사와 협력해 전화번호 일부분만 일치해도 저장된 이름이 표기되는 문제를 개선했다. 

보이스피싱 의심 문자를 수신하는 즉시 이용자가 단말기에서 쉽고 간편하게 신고할 수 있도록 간편 문자 신고채널을 구축했다. 올해 3월부터는 인터넷 발송 문자사업자 별로 식별코드 삽입을 통해 최초 불법문자 발송지를 신속히 확인해 불법문자 신고 접수부터 발송자 차단까지 소요기간을 이전 일주일에서 앞으로 이틀 이내로 줄였다.

얼핏보면 이런 조치가 이제라도 이뤄졌으니 보이스피싱이 근절될 것 같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사용자 개인 신고 시스템 같은 건 보조장치에 불과하다. 실제로는 통신사가 나서서 지능형 설비를 갖추고 신호 등을 잘 추적해 자동 차단하는 노력이 강해야 이 문제를 근절할 수 있다.

실제로 보이스피싱 조직의 대응은 법제화된 제도를 우회하기 위해 더욱 진화했다. 최근 고액 아르바이트 공고에 넘어간 이십대 청년이 010으로 발신번호를 변환하는 ‘번호 변작 중계기’를 가방 안에 넣고 시내버스를 타고 떠돌다 경북 경주에서 경찰에 붙잡혔다. 한달에 300만원을 준다는 제안을 받고 ‘인간 중계기’가 된 것인데 이런 식으로 우회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이 오히려 놀랍다. 경찰 수사결과 총책이 공급한 중계기는 수도권 13개소, 경상권 10개소 등 총 44개소 통신중계소에 전국적으로 분포되어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사설중계기 피해방지를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것을 기간통신망 교란이자 중대한 국가보안의 문제로 봐야한다는 점이다. 사실 지금이 평시라서 이런 식으로 돈을 노린 개인범죄에 사용되는 것일 뿐이다. 장차 외국과의 전시, 준전시 상황이 되었을 때 이런 허술한 시스템을 이용해 전면적인 국가통신망 마비를 노릴 수도 있다. 점점 사이버전을 비롯한 하이브리드전이 중시되는 흐름을 잘 읽어야 한다.

중요한 것은 통신사의 의지와 투자다. 적극적인 의지만 있다면  보이스피싱의 원천이 되는 송수신번호 감지와 차단은 100퍼센트는 아닐 지라도 대다수를 차단할 수 있다. 중계기 수입사, 국내 교환망, 네트워크 중계기 등을 통해 화이트리스트를 부여하고 그 외의 중계기에서 온 접속이나 변조 시도를 차단하면 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십여년 전 돈과 관련된 카카오톡 전화서비스인 보이스톡 문제가 터졌을 때, 통신사에서는 인터넷을 오가는 패킷의 성격까지 지능형으로 분석했다. 그래서 음성통화 데이터인 것 같으면 일부러 패킷을 손실시키고 접속을 끊는 방법으로 못하게 방해했다. 돈이 되는 분야에는 이 정도의 기술력과 즉시 대응이 가능하다는 증명이다.

안타깝지만 아마도 자발적으로 통신사가 돈도 안되는 보이스피싱 방지에 투자를 하고 신경을 쓸 것 같지는 않다. 그렇다면 남는 방법은 규제당국의 압박과 의무를 법제화하는 것이다. 이동통신을 겸하는 각 통신사는 현재 5G 수혜를 입어 해마다 많은 순이익을 거두고 있다. 기간통신망으로 볼 수 있는 음성통화 중계기에 대해 당국이 강한 보안투자를 요구해주길 바란다. 그래야 보이스피싱으로 인한 억울한 피해자를 한시라도 빨리 줄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