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에이서]

 


ICT 산업이 기존 산업과 어떤 다른 점이 있는가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곳에서 다루고 있다. 그래서인지 다르지 않은 점에 대해서는 그다지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것 같다. 혁신과 패러다임 변화가 계속 이뤄지는 ICT 역시 제조된 물건을 소비자에게 팔아야 하는 산업이다. 여기서 잊으면 안되는 것이 '브랜드 신뢰도'다.

브랜드 신뢰도는 몇 가지 요소로 이뤄진다. 이 브랜드를 달고 나온 제품은 최소한의 품질과 성능이 뒷받침 된다는 점, 제조과정에서 잘못된 결함은 리콜해서 수리해준다는 점, 사용하다가 고장이 생겼을 경우 유무상으로 수리받을 수 있다는 점이다. 이것이 각 제조사가 브랜드를 달고 나오는 이유이며, 그게 없다면 소비자가 굳이 브랜드를 확인하며 제품을 구입할 이유가 없다. 그냥 스펙을 보고 저렴한 걸 사면 그만이다.

에이서가 한국 시장 재진출을 선언했다. 에이서는 글로벌 상위 5개 PC 제조사 가운데 하나이며 대만에서 1976년에 설립되어 지금은 전 세계 160여 개국에 7000여명의 직원을 두고 있다. 에이서는 1996년 한국 법인을 설립하며 영업을 했지만 판매 등에서 고전하다 2001년 지사를 폐쇄하며 완전 철수했다. 



그 당시 에이서는 갑작스럽게 철수하면서 한국의 기존 자사 제품 구매자들의 사후 서비스 조치를 제대로 해주지 않았다. 많은 소비자들이 수리나 교환 조치를 받지 못하는 등 피해를 겪은 바 있다. 이후 2009년 국내 시장에 재진출했으나 소비자 반응은 부정적이었다.

이렇게 완전히 포기하고 한번 철수한 시장에 왜 다시 진출하려는 걸까? 니엔 지사장은 그 이유로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성장할 수 있는 PC 시장이라는 이유를 들었다. 동남아시아가 더 이상 시장을 넓힐 여지가 없는데 한국은 아직도 성장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예시로 한국 노트북 시장은 삼성전자와 LG전자 등 토종업체들이 80%를 차지했는데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 때 게임용과 기업용(B2B) 제품을 앞세운 외산업체들의 점유율이 많이 늘었다는 사실을 들었다. 결국에는 '외산 노트북도 더 많이 팔릴 여지가 있어서'라는 이유다.

시장 분석 자체는 냉정하게 했고 그에 따라 한국 시장에 재진출했다. 이익이 있는 곳으로 움직이는 자본주의 시장에서는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문제는 에이서가 제품을 팔려는 한국 소비자의 시선도 냉정하다는 점이다. 신뢰를 무너뜨린 브랜드, 소비자를 버리고 철수한 브랜드에 대해 호의적인 평가가 있을 리 없다. 

에이서의 주력제품인 노트북은 쓰다가 고장나면 버리면되는 저가 소비재가 아니다. 고가로 구입해 몇 년 이상을 사용하려는 기기다. 에이서가 그저 수익을 노리고 한국 시장에 들어왔다면, 소비자 역시 에이서 제품에 대해 철저히 제품 스펙과 가격만 보면서 거기에 실추된 브랜드 신뢰도에 냉엄한 감점을 주면서 구매가치를 따질 것이다. 결국 어쨌든 초기에는 경쟁사 제품에 비해 비슷한 제품을 압도적으로 저렴한 가격으로 팔아야만 의미있는 매출이 발생할 것이다.

에이서도 이런 면을 알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에이서가 이번에 발표한 주력제품은 게임 애호가들을 겨냥한 고성능 노트북 '프레데터'와 무게 1.6킬로그램, 두께 14.9밀리미터의 얇고 가벼운 사무용 및 학습용 노트북 '스위프트 고'다. 스위프트 고는 휴대성이 좋은 라인업이지만 게이밍 노트북에 탑재되는 인텔 13세대 H 프로세서 i5-13420H, 3.2K 해상도 OLED 16인치 디스플레이를 넣었다. 정식 발매가 118만9000원인데 한국 한정 할인가로 89만9000원 판매 예정이다. 

에이서 관계자에 따르면  본사가 있는 대만 대비 50만원 이상 저렴한 가격으로 전 세계 중 한국에서 가장 저렴한 가격이다.이런  가격 경쟁력을 앞세워 지난해 대비 올해 5배 이상 판매를 늘리겠다는 포부도 밝혔다. 문제가 된 브랜드 신뢰도에 대해서도 일단 조치는 취했다. AS는 한성컴퓨터와 국내 총판 계약을 맺고 한성컴퓨터 10개 직영점을 통해 전국 AS를 하겠다면서 나중에 서비스센터를 100개 이상 확대하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에이서로서 할 일은 했다. 한국 시장에 재진출하면서 어느 정도 사과도 했고 가격으로도 파격적으로 낮게 내놓았다. AS센터 확보도 약속했다. 그럼 이제 문제가 전부 해결된 걸까? 아니다. 서두에 말했듯이 브랜드신뢰도는 무너지기 쉬워도 쌓는건 다시 긴 시간과 노력을 들여 증명해야 한다. 당분간 소비자는 에이서를 언제든 매출이 안나오면 철수할 수 있다고 생각할 것이며 에이서 제품은 재수없으면 AS를 완전 포기해야 하는 리스크 있는 제품으로 인식할 것이다. 

노트북 같이 고가 IT제품은 가격만 충분히 저렴하다고 팔리지 않는다. 단순히 가격이 저렴한 것보다 오랜 기간 잘 쓸 수 있는 제품을 원하는 소비자도 많다. 애플 제품 마니아는 어떤 경우 맥북을 수리해가며 8~9년 썼다고 자랑하기도 하며 다음 제품에서도 맥북을 최우선으로 고려한다. 국내에서 삼성이나 LG의 AS정책에 대한 신뢰는 굳건하다. 같은 대만 브랜드라고 해도 ASUS나 기가바이트는 국내사업을 유지하며 나름의 신뢰도를 쌓았다. 

에이서는 이제 기초부터 하나씩 해야한다. 좋은 제품을 알리고 저렴하게 팔며, AS를 친절하게 하며 신뢰를 쌓으면서 단기 매출 저하가 발생해도 철수하지 않는다는 믿음을 확보해야 한다. 에이서가 장기적인 이익을 바라고 한국 시장에 다시 진출했다면, 정공법으로 소비자의 마음을 얻으며 정당한 경쟁을 통해 국내 시장에 자리잡게 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