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마트폰이 본격적으로 보급되기 이전인 20년전에 마치 포유류가 번성하기 이전의 공룡처럼 각광받던 IT기기가 있었다. 개인정보기기라고 불리던 PDA가 바로 그것이다. 애플의 뉴턴 메시지패드에서 시작되어 갈라져 나온 팜 파일롯이 전자메모와 일정관리, 간단한 앱을 중심으로 인기를 얻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비교적 강력한 성능에 멀티미디어까지 재생가능한 윈CE계열 PDA도 존재했다.

양쪽 기기의 성능 차이는 주로 그 안에 들어가는 CPU가 만들었다. 팜은 배터리 성능이 지금보다 훨씬 떨어지는 가운데서 낮은 성능이지만 매우 적은 전력만 소모하는 모토롤라의 드래곤볼 칩을 사용했다. 반대로 윈CE PDA는 인텔이 ARM 기술을 받아들여서 만든 스트롱암 칩을 사용했다. 스트롱암은 제법 성능이 좋았지만 전력소모가 상대적으로 높아서 사용시간이 짧은 결점이 있었다. 한동안 제법 쓰이던 이 스트롱암은 결국 PDA가 소멸되며 완전히 시장에서 사라졌고 인텔과 ARM의 협력도 끝났다. 

그런데 최근 인텔이 ARM과 다시 협력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인텔은 12일(현지시간) ARM과 협력을 맺고 인텔 파운드리 18A 공정을 통한 ARM 저전력 컴퓨팅 시스템온칩(SoC) 설계를 함께 한다고 밝혔다. 인텔 파운드리 서비스(IFS)와 ARM이 칩 설계자들이 인텔 18A 공정에 저전력 컴퓨팅 SoC를 설계할 수 있도록 하는 멀티 제너레이션 협력 계획이 그 내용이다. 

모바일 SoC 설계에 중점을 두고 자동차, 사물인터넷(IoT), 데이터센터, 항공우주산업 등에 적용할 예정이다. 차세대 모바일 SoC를 설계하는 ARM 고객사가 최첨단 인텔 18A 공정 기술을 이용해 제조할 수 있다는 것이다. Arm과 IFS는 인텔의 개방형 시스템 파운드리 모델을 활용하여 애플리케이션과 소프트웨어에서 패키징 및 실리콘에 이르기까지 플랫폼을 최적화하기 위해 협력한다는 설명이다.

이번 협력은 일단 ARM 설계를 이용하는 칩 회사가 인텔 파운드리에서 생산을 쉽게 맡길 수 있다는 효과가 주요 효과다. 
그렇지만 좀더 깊이 생각한다면 이런 협력은 인텔이 ARM의 저전력 기술을 습득할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단순한 생산 협력이 아니라 전략적인 기술 협력에 가깝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서 인텔은 현재 AMD와 벌이고 있는 치열한 CPU 성능경쟁에서 과도한 발열과 전력소모를 줄일 수 있는 기술 개발에 도움이 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주목할 가치가 있다.

그런데 이런 인텔의 ARM 협력이 과연 시너지 효과를 만족스럽게 낼 수 있을까? 인텔이 그동안 수많은 기회가 있었음에도 굳이 ARM과 협력을 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지를 생각할 필요가 있다. RISC와 CISC의 역사부터 시작해서 기술적으로 꼬여있는 CPU발전의 역사를 고려한다면 ARM의 저전력 기술과 인텔의 성능 향상 기술은 거의 반대 방향을 향해 있다는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또한 인텔은 한때 연구개발에서 성능향상을 소홀히 하면서 저전력에만 집착하다가 성능우위를 잃어버린 뼈아픈 과거도 있다.

서두에서 언급한 PDA CPU인 스트롱암은 왜 실패했을까. 단순히 생각하면 이미 성능에서 우위였던 스트롱암이 전력소모만 계속 줄이면 성공했을 것이라 예상할 수 있다. 그런데 그것이 잘 안된다. 기초 설계 부분에서 스트롱암은 인텔의 고성능 기반 기술이 핵심이었다. 이것에 ARM의 기술이 보조로 들어갔는데 보조가 메인의 결점을 완전히 채울 수는 없었던 것이다. 반대로 그때 모토롤라의 드래곤볼 칩은 ARM 저전력을 보조로 다른 기술로 고성능화를 노렸는데 끝내 만족할 수준의 고성능이 되지 못했다. 

현재 인텔 기술도 똑같을 수 있다. 고성능에 최적화된 인텔칩이 완전히 방향이 다른 ARM 기술을 효과적으로 받아들이기는 힘들다. 기초설계부터 완전히 바꿔야 하는데 자칫하면 인텔의 장점인 고성능까지 사라지며 이도저도 아닌 제품이 나올 수도 있는 것이다. 

물론 인텔의 이번 협력은 매우 제한적이다. 단순히 ARM의 설계를 가지고 인텔이 가진 파운드리에서 생산만 효율적으로 하겠다는 단계에 그칠 수도 있다. 그럼에도 전반적인 발표내용에는 상당한 기대가 묻어나는 것이 사실이다. 장기적으로 두고봐야 명확해지겠지만 인텔이 '돌고돌아' 다시 ARM과 협력하는 것이 충분한 시너지를 내기에는 아직 부족하다고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