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이 발전한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군사기술 등 몇 가지 예외적인 경우만 빼놓는다면 기술은 대체로 인간을 보다 편하고 즐겁게 해주는 쪽으로 발전하기 때문이다. IT기술, 그 가운데서 반도체 기술을 놓고 본다면 항상 더 빠르게, 더 풍부하게, 더 낮은 전력소모를 향해서 움직인다.



엑시노스4



하지만 그런 기술발전 과정에서도 방법의 차이는 존재한다. 누군가는 보다 많은 전력소모를 통해 고성능을 제공하려고 한다면, 누군가는 낮은 전력 대비 높은 처리속도를 제공하는 기술에 고심한다. 누군가는 더 많은 명령어를 통해 한꺼번에 처리할 수 있는 능력을 높이려고 한다면, 누군가는 반대로 명령어를 줄이는 대신 명령어 처리 하나에 드는 시간을 획기적으로 단축해서 속도를 높이려고 한다. 이런 것들은 어느 것이 정답이라기 보다는 결국 최종적으로 시장에서 소비자의 선택에 의해 승부가 결정되기 마련이다.


지금 가장 관심을 모으고 있는 스마트폰에 들어가는 APU기술 경쟁이 치열하다. 컴퓨터로 말하자면 CPU에 해당하는 이 칩은 스마트폰 처리능력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핵심기술이다. 여기서 좋은 실적을 보이는 업체 가운데는 한국의 삼성전자가 있다. 삼성전자의 엑시노스 칩은 해외에서도 좋은 평판을 ARM 계열 칩으로 가장 높은 성능을 제공하며 현재 쿼드코어 칩까지 상용화되어 있다.


그런데 이번에 새로 발표한 삼성의 새로운 APU인 엑시노스5를 둘러싸고 논란이 일고 있다. 시장에서 삼성의 경쟁자이자 또 하나의 주요 APU 제조업체인 퀄컴이 엑시노스5의 기술에 대해 평가절하를 했기 때문이다. (출처)



퀄컴회장



1월 16일(현지시간) 미국 IT 전문매체 언와이어드뷰에 따르면 폴 제이콥스 회장은 최근 중국 내 언론을 대상으로 한 미디어 행사에서 "삼성전자와 같은 기업들이 많은 코어수의 AP로 소비자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 사용하는 '옥타코어' 마케팅 뒤에 큰 문제가 숨어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엑시노스5 옥타의 경우 4개의 고성능 코어의 전력소비가 너무 심해 삼성전자는 균형을 맞추기 위해 4개의 저성능 코어를 장착한 것"이라며 "퀄컴이 새롭게 선보인 스냅드래곤800과 스냅드래곤600은 쿼드코어 임에도 각각의 코어가 독립적으로 작동해 성능과 전력소비 면에서 탁월한 강점을 가진다"고 말했다.


제이콥스 회장은 "옥타코어라는 용어가 '많은 것이 좋다'는 생각을 가진 이용자들을 현혹시키게 되지만 이는 소비자들을 오도하는 일"이라며 "조만간 코어수를 무조건 늘리는 경쟁은 사라지는 대신 제조사들도 부드러운 그래픽이나 낮은 전력소모 등 다른 스펙에 관심을 가지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삼성전자는 지난 9일(현지시간)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세계 최대 가전전시회 CES 2013에서 8개 코어를 집적한 옥타코어 모바일 AP 엑시노스5 옥타를 최초로 공개했다.


엑시노스5 옥타는 암(ARM)의 최신 저전력 설계구조인 ‘빅리틀(big.LITTLE)을 적용한 제품으로 ARM 코어텍스A15와 코어텍스A7을 혼용해 모바일 기기에서 3D 게임 등과 같이 고사양이 필요할 때는 4개의 고성능 코어텍스A15 코어가, 웹서핑이나 이메일 등 저사양 작업에는 4개의 저전력 코어텍스A7 코어가 사용될 수 있도록 하는 기술이다.


이 같은 퀄컴의 공세는 치열한 모바일 AP 시장에서 강력한 경쟁자로 떠오른 삼성전자에 대한 견제 차원인 것으로 풀이된다. 퀄컴은 모바일 AP 시장에서 38.8%의 점유유로 1위를 지키고 있으며 삼성전자는 25.9%로 뒤를 바짝 쫓고 있다.



엑시노스5



사실 이 뉴스에서 퀄컴 회장의 평가 자체는 그렇게 주목할 필요가 없다. 시장에서 직접 경쟁하는 업체가 상대방의 신제품에 대해 칭찬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마이크로소프트의 빌게이츠는 애플에서 아이팟이 나왔을 때든 아이폰이 나왔을 때든 언제나 부정적 평가를 내놓았다. 아이패드에 대해서도 비슷했다. 마음속으로는 어떻게 생각할 지 몰라도 겉으로는 단점을 더 크게 지적해야 하기 때문이다.


펩시콜라 사장이 언론에 대고 '이번에 나온 코카콜라 신제품 훌륭하던데요? 단맛이 살아있고 톡쏘는 맛이 일품이네요!' 라고 말할 수야 없는 것 아닌가?


하지만 삼성과 퀄컴의 엑시노스5를 둘러싼 논란은 단순하게만 평가하기에는 약간 음미할 점 있다. 그래서 그 점을 한번 다뤄보겠다.


삼성 vs 퀄컴, 엑시노스5를 둘러싼 논란은?



엑시노스5_1



우리가 쓰는 데스크탑 CPU에서 처음 듀얼코어가 등장했을 때 사람들은 충격과 기대를 동시에 가졌다. 한 칩 안에 두개의 처리장치가 들어있는 이런 발전은 이어서 쿼드(4)코어와 헥사(4)코어, 옥타(8)코어의 등장을 예고했다. 단순히 비교하자면 예전에 싱글(1)코어로 한 개의 프로그램이 1초에 할 수 있었던 작업이 있다고 치자. 이제는 한 개의 컴퓨터에서 1초에 똑같은 작업 8개가 동시에 실행된다는 이야기니까 말이다.


그러나 실제로 기술과 시장은 그렇게 흘러가지 않았다. 현재 데스크탑 시장은 딱 쿼드코어에서 머물러서 그다지 나아가지 않고 있다. AMD는 헥사코어, 옥타코어를 밀고 있지만 인텔은 쿼드코어에서 속도만 약간 더 올리는 것으로 효율적인 대응을 하고 있다. 상대적으로 기술력이 뒤진 AMD의 옥타코어가 인텔의 쿼드코어 처리속도와 비슷하기에 가능한 이야기다.


삼성의 엑시노스5가 옥타코어라는 건 분명 훌륭한 발전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소비자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8개의 코어가 동시에 작동해서 최고의 작동속도를 보여주려는 그런 생각에서 설계된 칩은 아니다. 저전력 작업의 쿼드코어와 고성능 작업의 쿼드코어가 교대해 가며 일하는 구조이다. 이 점에 대한 퀄컴회장의 지적은 분명히 맞는 부분이 있다. 일반적으로 옥타코어에 기대하는 그런 방식은 아니기 때문이다.



스냅드래곤



하지만 그럼에도 퀄컴의 칩이 최근 삼성 엑시노스 칩에 성능면에서 밀리고 있다는 점은 분명히 생각해보자. 성능과 기술력이 뒤진 업체가 옥타코어를 들고 나왔다면 눈속임이겠지만 성능이 앞선 업체가 들고나온 것은 선두에서 새로운 방식을 실험해보고자 하는 개척이라고 볼 수 있다. 만일 이런 방식이 의외로 배터리 효율이 좋다면 뒤늦게 퀄컴도 같은 방식을 채택할 수도 있다. 


실제로 치열한 경쟁을 벌였던 인텔과 AMD사이에는 비슷한 일들이 많았다. 클럭속도와 처리속도를 둘러싸고, 진정한 멀티코어의 적용방식을 둘러싸고, 64비트 칩의 호환성을 놓고 두 회사는 항상 상대방의 방식을 평가절하해 왔다. 그리고 항상 결과는 소비자가 판정했다.


그러니까 퀄컴회장의 발언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엑시노스5가 적용된 제품이 실제로 얼마만큼의 효율을 보여줄 것인지 하는 점이다. 그리고 그것을 소비자가 좋다고 받아들인다면 그것으로 충분한 것이다. 시장에서 소비자의 선택은 항상 옳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