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드웨어에 넣어야만 보고 즐길 수 있는게 컨텐츠다. 음악, 동영상, 전자책 등의 컨텐츠는 이론상 무한히 복제가 가능하다. 따라서 컨텐츠는 정당한 이용으로는 원가가 거의 들지 않는 엄청난 이윤을 창출할 수 있다. 하지만 반대로 불법으로 복사되는데도 원가가 들지 않는다. 이것을 방지하기 위한 소프트웨어적 장치가 DRM이라는 것이다.


전세계적으로 인기를 얻은 애플의 아이팟을 둘러싸고 한동안 이 DRM이 논란이 되었다. 소비자는 분명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고 MP3음악을 샀다. 그런데 그 음악을 단지 아이팟에서만 들을 수 있다. 컴퓨터나 다른 하드웨어에서는 아예 이동과 복제가 불가능한 것이다. 심지어 같은 회사 제품이라도 하드웨어가 달라지면 재생이 안되는 경우도 있었다.

당연히 소비자들은 격렬히 항의했지만 유통회사와 음반사의 입장은 완강했다. 함부로 DRM을 없애거나 완화하면 불법복제 때문에 수익에 심각한 피해가 예상된다는 것이다. 애플 역시 초기 아이튠스와 아이팟에는 강력한 DRM을 걸었다. 그렇지만 결국 돈주고 구입한 소비자들만 괴롭힌다는 지적에 잡스는 직접 편지까지 써가며 DRM해제를 촉구했고 결국 그렇게 되었다.

전자책 시장을 보자. 전자책은 지금 막 DRM이 적용되는 초창기다. 자유로운 이용을 위한 해제는 고사하고 각 회사마다 다른 형식의 DRM이 나와서는 표준화조차 이뤄지지 않았다. 이것은 위에서 지적한 초기 음원시장과 똑같은 불편과 반응이 예상된다. 당연히 해제나 표준화를 촉구하는 목소리가 있는데  막상 업체들의 이익 때문에 조치는 느릿느릿 하기만 하다. (출처)
 


한국저작권위원회는 ‘국제 표준 ePUB 기반 eBook DRM 표준 레퍼런스 소프트웨어 기술 개발’(이하 DRM 표준 레퍼런스)이라는 연구 용역 사업을 2013년께 완료할 계획이다. 2년짜리 이 연구 사업은 파수닷컴과 한글과컴퓨터, 교보문고, 한국이퍼브, DRM인사이드가 컨소시엄을 구성해 맡았다. 정부예산은 2년간 총 10억원이 투입될 예정이다.

사업명에 ‘DRM 표준’이라는 단어가 있지만, 한국저작권위원회는 전자책 업계에 특정 DRM을 쓰라고 강제할 계획은 아니다. 전자책 DRM간 호환성을 높이고자 하는 게 한국저작권위원회의 목표다. 쉽게 말해 전자책 DRM의 기본 틀을 마련해 공개하겠다는 이야기다. 컨소시엄에 참여한 5곳 업체는 전자책 파일을 암호화하는 방식과 키 전달 방식, 라이선스 정보와 형식에 대한 틀을 마련할 계획이다. 이 틀은 API 형태로 공개된다.

전자책 DRM은 단순하게 어느 뷰어에서만 보여줄 것인지를 가리는 건 아니다. DRM은 디지털 파일에 대한 판매와 정산, 대여, 파일 접속 권한 등을 관리하는 솔루션이기도 하다. 전자책 DRM이 업체마다 호환돼도 이 기능은 유지돼야 한다.

안혜연 부사장은 “API 개발을 완료해 EPUB 뷰어에 적용하고 실제 시스템에서 제대로 구현되는지도 볼 것이며, 2개 이상의 솔루션이 상호 연동되는 모듈도 테스트해야 한다”라며 진행 계획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발걸음을 재촉하는 듯하지만, 컨소시엄이 전자책과 DRM 전문 업체로 구성된 터라 순조롭게 진행될 것으로 보인다. 한글과컴퓨터는 EPUB 저작도구를 만들고, EPUB을 국제 표준으로 만드는 작업에도 참여하고 있다. 한글과컴퓨터는 전자책 DRM을 서비스하는 곳이기도 하다. 여기에 DRM 전문업체인 파수닷컴이 컨소시엄을 이끌고 있다.



정부는 정부대로 과도한 개입을 통해 경쟁을 억제한다는 비난을 받지 않으려고 예산지원에만 그칠 뿐 강력하고 빠른 표준화를 하지 못하고 있다. 또한 업체들도 지금은 그저 기능위주의 솔루션 개발에만 그칠 뿐 소비자가 정작 중요하게 여기는 게 무엇인지는 그다지 생각하지 않고 있다.

전자책 DRM, 표준화가 급히 필요한 이유는?

솔직히 이야기해보자. 업체에게야 컨텐츠 보호와 거기에 돈을 정확히 징수하는 게 중요할 지 모른다. 하지만 정작 그 전자책을 사고 돈을 지불하는 소비자 입장에서야 그게 뭐가 중요한가? 소비자는 간단하고 편리하게 책을 보고 싶다. 이런 거 저런거 신경쓰지 말고 말이다. 그걸 가능하게 해주니까 애플은 천문학적인 돈을 벌고 있다. 그런데 국내 업체나 정부는 한가롭기만 하다. 


2년계획에 10억원이라는 데 IT 업계에서 2년이면 어떤 일이 벌어질 지 예상조차 할 수 없다.  아이폰이 혼자 지배하던 시장에 안드로이드가 나타나 판도를 뒤집어버리는 데 딱 2년이면 족했다. 그런데 그 동안 표준화도 안된 DRM 을 느긋하게 개발해서 뭘 어쩌자는 건가? 그때쯤이면 전세계적으로 DRM Free가 유행이 되어 아예 저 프로젝트 자체가 쓸모없어질 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스티브 잡스는 시장조사를 하는 대신 매일 아침 거울을 보면서 ‘내가 무엇을 원하는가?’라고 물었다고 한다. 그런데 전자책 업체와 정부는 거울도 안보고 그런 질문조차 하지 않는 것 같다. 최소한 스스로 직접 돈을 주고 사서 전자책을 즐길 생각이라면 저런 느긋하고도 허술한 일정이 나올 리가 없다.


예상하건대 전자책 DRM은 결국 없어지게 될 것이다. 그 중간이라고 할 지라도 표준화가 잘 되어 소비자에게 최대한 불편을 덜끼치는 방향으로 발전할 것이다. 그런 세계적 추세와 변화에 뒤떨어진 채 홀로 고립되지 않으려면 이런 느긋한 계획은 바뀌어야 한다. 보다 빨리, 강력한 표준화와 간략화를 추진해야 한다. 생산자의 입장이 아니라, 돈을 주는 소비자를 조금이라도 편하게 해줄 생각을 하자. 그래야 정말 전자책으로 돈을 벌고 전자책 산업이 발전할 것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