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IT업계는 그야말로 변혁의 시대다. 수많은 첨단기기가 찬사와 함게 함께 화려하게 등장한다. 내노라하는 기업들이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을 발표한다. 뒤져있는 기업은 도약하기 위해서, 선두에 있는 그룹은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 안간힘을 다한다. 그런 가운데 시대에 적응하지 못하는 기업은 가차없이 도태된다.


얼마전까지 절대 넘볼수 없는 휴대폰 1위 기업이던 노키아가 걷잡을 수 없는 무너져내리고 있다. 아이폰으로 대표되는 감성 스마트폰 시대에 대응하지 못한 대가라지만 너무도 급작스러운 퇴조다. 이런 움직임은 마치 46억년 동안 지구의 생물이 진화하고 도태되는 과정을 수년 정도로 압축해서 보는 듯한 착각조차 느끼게 한다.

이런 변화의 움직임은 심지어 사무기기에도 예외가 아닌 듯 하다. 사무기기에서 압도적인 브랜드 인지도와 매출을 자랑하는 신도리코가 치밀한 준비끝에 변신을 선언했기 때문이다.


신도리코란 브랜드는 보통 소비자로서는 그다지 많이 입에 올리는 이름은 아니다. 1960년에 창립된 이 회사는 주로 디지털 복합기와 레이저 프린터, 팩스 등의 사무용 주변기기를 생산하고 판매하는 회사기 때문이다. 제품 특성상 이제까지는 주로 기업고객을 상대해왔다. A3용지로 대표되는 복사기 시장에서는 확고한 1등을 차지하고 있다. 또한 국내 사무용 복합기 시장에서도 1위 기업이다.


이런 선두 업체가 어째서 과감한 변신을 시도해야 했을까. 보통 이런 변신은 뒤진 기업의 필사적인 승부수일 경우가 많은데 말이다. 그것은 아마도 앞서 내가 말한 이런 시대의 흐름을 읽었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최근 애플과 아이폰으로 대표되는 디자인과 감성 흐름에 따라가지 못하면 아차하는 사이에 주도권을 잃을 수 있기 때문이다.


신도리코가 던진 승부수는 디자인이다. 새로운 복합기를 발표하면서 이곳에 첨단 기술력과 함께 세계적인 디자인 기업 탠저린의 디자인을 결합시켰다. 탠저린은 애플의 수석디자이너이자 아이폰과 아이패드를 디자인한 '조나단 아이브' 를 배출한 디자인 회사다. 이곳의 최고경영자인 마틴 다비셔가 신도리코의 새로운 제품 디자인을 맡았다.




조나단 아이브 그리고 마틴 다비셔. 같은 디자인 회사에 있었던 이 두 명이 추구하는 영국식 디자인의 특성이 무엇일까. 매우 흥미가 생기는 주제다. 우선 마틴 다비셔가 디자인했던 제품을 조사해보았다. 매우 재미있는 제품이 나왔는데 브리티쉬 에어웨이의 좌석 디자인이었다.

보통 항공기 좌석은 제한된 공간에 될 수 있도록 많은 사람을 수용해야 한다. 그래야만 채산성이 좋아지기 때문이다. 반면 승객은 한정된 예산 안에서 보다 편안하고 넓은 좌석을 원한다. 항공기 좌석의자가 180도로 시트를 젖힐 수 없는 건 그래서 당연시되었다. 공간을 더 차지하기 때문이다.


마틴 다비셔는 발상의 전환을 통한 디자인으로 이 문제를 극복해냈다. 기존의 공간만으로 좌석 디자인을 S자 형으로 바꿔 두 사람이 편안하게 누워갈 수 있게 했다. 디자인이 단지 겉보기가 아니라 혁신적인 실용성까지 주게 되는 대단한 혁신이었다.

신도리코가 이런 디자이너와 협력하게 된 건 참으로 당연한 일이다. 사무기기는 겉보기가 좋은 디자인과 함께 사무실에서의 실용성이란 두가지가 함께 가야만 한다. 그런 의미에서 마틴 다비셔와 신도리코의 조합이 만들어낸 결과물이 궁금했다.



마틴 다비셔의 디자인 철학은 기본적으로 애플의 조나단 아이브와 비슷하다. 미니멀리즘이란 것으로 가장 필요한 기능과 장치만 남기고 나머지를 극단적으로 생략한다. 또한 화려한 외양이 아닌 극도로 절제된 가운데 가장 간단한 도형의 조합이 만들어내는 아름다움을 추구한다. 아마도 이것은 디자인 회사 탠저린 전체의 전반적인 디자인 철학이 아닐까 싶다.


이런 미니멀리즘 디자인을 통해 신도리코가 원하는 목표는 무엇일까. 그것은 주력제품인 복합기와 프린터를 단순한 '주변기기'가 아닌 '인테리어 소품'으로 끌어올리는데 있다. 이제까지 사무실에서 복사하고, 출력하는 기기는 가장 많이 쓰는 장치이면서도 밋밋한 디자인에 그저 아무도 안보는 구석자리에서 배치할 뿐이었다. 아무도 그 장치의 디자인에 신경쓰지 않았다. 만드는 회사도 디자인에는 관심이 없었고, 구입하는 회사와 사용하는 사람도 아예 아름다움을 원하지 않았다.


그러나 점차 감성에 눈을 뜨고 있는 소비자와 기업들이 언제까지나 이 상태에 머물러 있을 리 없다. 약간의 시기 차이는 있겠지만 곧 사무기기 시장에도 디자인과 감성을 중시한 제품이 거스를 수 없는 대세로 밀어닥칠 게 분명하다. 기능과 상관없이 장식을 주렁주렁 장착한 그런 우스운 제품을 말하는 게 아니다. 기능 자체를 최대한 발휘하면서도 사무실의 인테리어에 잘 어울릴 디자인을 갖춘 제품을 말하는 것이다.

이번에 신도리코에서 새로 내놓은 제품인 M401을 보자. 이것은 보통 우리가 쓰는 16절지인 A4 용지를 쓰는 흑백 복합기다. 복사와 프린트, 스캔, 팩시밀리를 한대로 이용할 수 있다. 공간과 시간, 경제성에서 좋은 제품이다. 더구나 이 제품은 A4의 두배 크기인 A3 용지도 취급할 수 있는 별도 옵션 장치를 추가할 수 있다. 기능상으로도 충분히 우수한 제품이다.


이제 제품의 디자인을 한번 보자. 흑백 복합기라는 점을 상징하듯 무채색인 흑과 백으로 이루어진 색채와 함께 정제된 다각형의 단순함, 모서리를 라운딩 처리한 부드러운 감성을 함께 갖췄다. 사용자들이 가장 많이 쓰는 버튼 패널의 디자인과 배치에 있어서도 우아함과 기능미가 느껴진다. 마틴 다비셔의 말에 따르면 보통은 기능을 위해 디자인을 희생시키는 경우가 많은 데, 이번 제품에서 신도리코는 디자이너의 생각을 전폭적으로 반영하면서 기능을 배치했다고 한다.

기본적으로 이 제품은 복사, 프린트, 스캔의 기능을 가진 A400에서 시작된다. 여기에 팩스 기능을 추가한 옵션장치를 얹으면 M400이 되고, 그 위에 A3용지에 대응하는 확장장치를 올리면 M401이 된다. 마치 다목적 전투기가 임무에 따라 무장을 추가하는 형태를 보는 듯 해서 재미있다.


이 제품은 심지어 사용자들이 거의 보지 않는 뒷면의 디자인에도 신경을 썼다. 애플의 스티브 잡스가 보통 보지도 않는 메인보드 모양과 부품배치에도 신경썼다는 일화가 생각난다. 그만큼 감성적인 디자인과 장인정신이 깃든 제품을 만든다는 건 섬세한 일이다.


이런 노력은 세계에서도 인정받았다. 
A400 프린트와 M400 복합기 시리즈는 3월 독일 레드닷 어워드 2011 디자인 상을 받았다. 또한 A400 프린트는 미국 ‘굿 디자인 어워드 2010’을 수상해 레드닷 어워드와 굿디자인어워드 등 2관왕을 수상한 바 있다. 기능과 디자인이 절묘하게 결합된 것이 높은 평가를 받는 것 같다.


신도리코의 변신, 감성 디자인 전략의 의미는?

이번 신도리코의 변화된 전략은 크게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로 사무기기 시장의 경쟁포인트를 감성으로 확장시킨다. 기능과 가격 만을 비교하는 구도에서 감성과 디자인으로 넓힌다. '사무기가의 아이팟' 같은 존재를 만들어내면서 사용자의 감성을 사로잡게 되면 더이상 가격대 성능비 만으로 단순하게 비교할 수 없게 된다. 보다 사무실 환경에 미학적으로도 잘 어울리고 쾌적한 느낌을 주게 된다면 그것만으로도 별도의 커다란 가치를 얻게 된다.


둘째로 나아가서 사무기기에 '사용자경험(UX)' 이란 측면을 요구하는 신호탄이 될 것이다. 디자인은 단순한 미학이 아니다. 제품에 애정을 갖게 한다. 그것을 쓰면서 작업을 수행한다는 느낌에 더해 쓰는 즐거움을 준다. 우리가 낚시를 하면 단지 물고기를 낚는 결과에만 즐거움을 느끼는 게 아니고 그 중간의 기다림과 낚시줄을 당기고 푸는 손맛에도 즐거움을 느끼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다. 세련된 디자인과 감성 중시 전략은 최종적으로 사용자 경험을 극대화시킨다.

선두 자리에 있는 기업이 스스로 자각해서 과감한 변화를 시도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그럼에도 앞장서서 사무기기 업계의 변화를 촉진시키는 신도리코의 전략은 상당히 흥미있다. 앞으로 어떤 제품이 나오고 시장에 어떤 변화를 줄 지 지켜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