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 학창시절때 내 친구 가운데 한 명은 일본을 몹시 싫어했다. 일본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은 물론이고, 일본어나 일본글자까지도 싫어했다. 그 친구가 가끔 내뱉던 말 가운데 "일본이 없어져버렸을면 좋겠다!" 가 있었다. 그때 지나친 항일교육의 탓인지 나도 문득 수긍하곤 했었다.



철이 들어서도 가끔은 그런 상상을 해보았다. 일본이 없었다면 우리가 더 잘살게 되었을 지도 모른다는 가정, 혹은 지금이라도 일본이 없다면 우리가 더 강한 나라가 될 지도 모른다는 희망 말이다. 그렇지만 이제 나이와 지식이 쌓이면서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란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일본은 현재 고강도의 지진과 쓰나미, 이어지는 원전의 방사능 유출로 매우 혼란스럽다. 여진도 이어지고 있으며 피해지역에는 도로가 무너지고 전력이 공급되지 않는다. 때문에 산업에도 타격이 있어서 동북부의 주요 생산시설들이 가동하지 않고 있다.

물론 일본 회사들도 요즘은 대부분 외국에서 생산을 하니까 상관없는 부분이 많다. 하지만 여전히 일본 땅에서 나오는 제품도 있는데 주로 정밀기기나 전자제품의 기초소재들이다. 이 소재의 부족 때문에 스마트폰을 비롯해 세계 굴지의 모든 업체들의 제품생산에 커다란 차질을 빚게 되었다고 한다.(출처)



하반기에 본격적인 제품공급을 예상하고 있는 전세계 스마트폰· 태블릿업계가 6월 이후 계획대로 제품출시를 하기 힘들 것이란 전망이 나왔다. 일본대지진 여파로 통신칩용 필수재료인 BT(bismaleimide-triazine·BT)수지의 공급 지속 여부가 불투명해졌기 때문이다.

파이낸셜타임스는 19일(현지시간) 일본 지진여파로 세계 휴대폰.태블릿PC 칩용 BT수지충전재(레이진)의 절반을 생산하는 미쯔비시가스케미컬(MGC)이 BT수지 생산을 중단하게 됐다고 보도했다. 또 이 재료의 재고가 소진되는 1~2개월 이후로 예정된 스마트폰, 태블릿PC의 공급도 차질을 빚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특히 퀄컴의 야심작인 새 스냅드래곤칩도 이 플래스틱수지를 사용하고 있어 여파가 우려되고 있다. 새 스냅드래곤칩은 HP의 새 태블릿 등에 사용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어 이 재료 공급부족이 장기화될 경우 HP태블릿도 영향권에 들게 될 전망이다.

파이낸셜타임스는 대만과 한국의 기술회사들이 많은 휴대폰용 부품 대체제를 만들고는 있지만 특수 수지 등 일부는 여전히 일본업체에 의존하고 있다며 이같이 밝혔다. 아직까지 지난 달 겨우 발표된 새 스냅드래곤을 어떤 단말기기 제조사가 채택할 것인지는 불투명하다. 이전 버전인 스냅드래곤의 경우 아수스의 이PC 넷북에서 구글의 넥서스원폰과 HTC스마트폰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사용됐다. 이번 사태는 일본이 전세계 전자제품 생산고리에서 차지하는 속성을 잘 드러내주고 있다.

전세계가 글로벌하게 물류를 교환하며 서로가 장점이 있는 부분을 나누어 생산한다. 그리고 최고로 가격과 성능이 좋은 제품을 소비자에게 싸게 공급한다. 이런 효과는 좋지만 그것을 위한 세계 산업의 고리는 이처럼 취약점이 있다. 어느 한 부분의 고리가 전혀 대체 불가능한 경우에 전체가 그 부분의 문제로 인해 멈춰서 버릴 수 있다는 것이다.



현재 IT산업의 글로벌 생산을 가장 잘 보여주는 애플의 아이폰을 예를 들어 보자.

1) 전체적인 제품 디자인과 설계는 미국의 애플사가 서부 캘리포니아에서 한다.
2) 기초 소재와 가공 같이 재료의 밑작업에 해당하는 부분을 일본 기업이 맡는다.
3) 일본에서 넘겨받은 기초 소재를 사용해서 한국과 대만 업체가 중간 부품을 만든다.
4) 부품을 넘겨 받은 중국의 조립 공장 폭스콘이 최종적으로 인력을 투입해 조립한다.
5) 제품을 검사한 애플이 자사가 만든 핵심 소프트웨어인 운영체제를 탑재해서 포장해 출시한다.

이것이 위에서 말한 생산고리를 잘 보여주는 예이다. 여기서 대체 불가능한 단계는 1번과 5번으로 전부 애플이 맡고 있다. 하지만 엄밀히 보면 2번도 대체가 가능하려면 상당한 시간과 노력이 들기에 전환이 힘들다. 나머지 단계는 애플이 일부러 부품 공급선을 여러군데로 두는 점이나, 조립공정이 단순하다는 점에서 대체 가능하다.

스마트폰 부품으로 보는 일본과 한국의 차이는?



일본이 조금씩 한국에게 밀리고 있지만 아직도 강세를 유지하는 부분이 있다. 바로 이런 기초 소재와 정밀 계측이다. 완제품에서도 일본은 아날로그적 광학 기술인 렌즈와 결합되는 디지털 카메라 부분에서 엄청난 강세를 보인다. 세계 시장에서 가장 많이 쓰는 전문 카메라인 DSLR(렌즈교환식 디지털 카메라)에서는 일본업체인 니콘과 캐논이 시장을 양분해서 가지고, 나머지도 펜탁스, 올림푸스, 후지 등 일본업체끼리 경쟁하고 있을 정도다. 뉴스에서 보니 일본 지진으로 인해 일제 디지털 카메라 공급이 끊어질까 우려가 되서 가격이 올랐다는 소식도 있다.

소재와 정밀 계측 기기에서도 일본 업체의 특징은 매우 오랫동안 한 분야를 집중적으로 연구한 결과, 그 분야에 있어서는 항상 세계에서 독보적인 경쟁력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일본 업체가 아니면 생산자체가 힘들거나, 채산성이 맞지 않든가 하는 부분이 많다는 이야기다. 선택의 여지가 없는 부분이 되고 있기에 일본의 저력은 무시할 수 없다.

맨 위에서 농담으로 말했듯이 만일 일본이 없어진다면? 한국에게 밝은 미래가 기다리고 있지는 않은 것 같다. 일본에서 소재를 받아와서 부품으로 만들어 수출하는 한국에게도 치명적이다. 스마트폰 부품에서 보듯 일본의 기초 소재 기술은 대체하기 힘들게 확실히 자리매김하고 있다.


그렇다면 한국의 경우는 어떨까? 삼성이나 엘지가 자랑하는 반도체나 디스플레이, DVD 드라이브, 초소형 카메라 모듈 같은 부품은 다른 외국 업체도 생산하고 있다. 한국쪽이 약간 효율이 더 좋기는 하지만 당장 한국 업체가 생산을 못한다고 해도 잠시만 지나면 대만이든 일본이든 어딘가에서 금방 생산할 수 있다. 대체가 가능한 것이다.

물론 이렇게 된 이유는 분명 있다. 한국과 일본의 출발점이 다른 것도 있을 뿐더러 인구와 시장, 그리고 급속한 발전계획 가운데 주력한 분야가 다른 점도 있다. 우리가 무조건 일본이 맡은 부분까지 치고 들어가 다 할 필요가 있다는 그런 의미는 아니다.

하지만 이쯤에서 한번쯤 냉정하게 생각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한국이 과연 이제 일본을 전혀 필요로 하지 않을 정도로 발전했을까. 세계적 산업구조에서 과연 한국이 일본을 뛰어넘었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을까? 이번 지진사태를 통해 한국의 현실을 한번 돌아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