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IT 기업세계는 매우 극적이고, 재미있는 일이 많이 벌어지는 듯 싶다.

비밀주의와 엄숙주의에 묻혀있는 동아시아의 기업(한국,일본,중국)과 달리 미국의 기업가들을 둘러싼 화제와 언행을 보고 있으면 기업세계라기 보다는 헐리우드 영화, 혹은 화려한 WWE 프로레슬링을 보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미국 IT기업이라는 무대에는 무명선수로의 출발과 도전할 상대에 대한 도발, 링 위에서 혈전을 불사하는 투혼이 있다. 게다가 때로는 적이었던 상대와도 연합해서 더 무서운 강적을 향해 태그매치를 벌이는 가 하면 중간에 부상이나 기권으로 선수가 바뀌기도 한다. 상대를 기권 직전까지 몰아넣었다가 아차 하는 순간에 다시 역전되어 자기가 기권해버리는 경우도 있다. 이런 것들 때문에 미국의 컬럼리스트와 블로거들은 딱딱하기 쉬운 경제면을 정말로 재미있는 내용으로 뒤덮을 수 있는 것 같다.


얼마전 국내 포털 사이트에 단지 몇 줄로 언급된 뉴스가 있다. IT업계의 거물 회사 휴랫팩커드(HP)에 관한 뉴스였다. ( 출처: 한국일보 )

세계 최대 컴퓨터 제조사인 휴렛팩커드(HP)의 최고 경영자(CEO) 마크 허드(53)가 성희롱 추문으로 낙마했다.
HP는 마케팅 대행사의 여성 대표가 성희롱을 당했다는 제보에 따라 진상조사를 벌여, 관련 내용 일부를 확인한 것으로 8일 전해졌다.
HP 이사회는 허드의 정직성 등을 문제 삼아 더 이상 CEO직을 유지하기 어렵다는 판단을 내렸다.

사실 국내에서 HP는 좋은 의미로나 나쁜 의미로나 그다지 사람들이 관심을 잘 가지지 않는 기업이다.

좋은 의미로는 기업 행보나 이미지가 좋아 그다지 반감이 없고, 건실한 제품을 많이 내놓기 때문에 안티도 거의 없다. 한때 HP의 잉크젯 프린터의 리필 카트리지 관련 정책에 불만이 제기된 적도 있고, 서비스 기간이 끝난 제품에 대한 AS가 너무 칼같다는 문제제기도 있었다. 그러나 심각한 불만은 아니었고 시간이 지나며 해결되거나 이해되었다.
또한 나쁜 의미로는 혁신적인 제품을 내놓은 적이 없다보니 흥미를 끌고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는 경우도 없어 관심을 가질 일이 적었다.


나 역시 그래서 이 뉴스를 아무런 관심도 없이 그냥 넘겼다. 그러나 해외에서 쓴 칼럼을 보니 아무래도 이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질 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은 ( 더 이코노미스트 ) 의 관련 컬럼 가운데 일부 내용이다.

HP는 실리콘 밸리의 원조 격 기업이다. 빌과 데이브는 1938년, 팔로알토의 한 차고에서 회사를 창립하였고, 투자자금은 $538이었다. 그랬던 기업이 세계에서 제일 영향력 있는 하이테크 기업이 되었다. HP는 주머니형 계산기처럼 세상을 바꾼 제품을 만들어냈을 뿐만 아니라, 높은 윤리기준과 조직행동에 대한 HP의 경영 스타일도 세웠다.

허드는 다른 어떠한 CEO보다 그 돈을 받을만했다는 데 문제가 있다. HP의 주가는 그가 있을 때 두 배로 뛰어 올랐고, 세계 제일의 IT 기업인 IBM을 수입 면에서 초월하기도 하였다. HP는 또한 1천 억 달러 이상의 실적을 올린 최초의 IT 기업이 되기도 하였다. 허드가 세계 최대의 개인용 컴퓨터 기업, HP를 다시 일으켜세웠고, EDS과 3Com, Palm을 인수하여 수 십억 달러 어치의 계약을 연속 성사시키는 등, 성장 기반을 닦아 놓기도 하였다. 게다가 그는 이 모든 일을, 비용절감까지 시키면서 해냈다.

허드는 모든 조각을 맞춰서 거대한 기업을 변환시켜 놓았다. 그는 EDS를 인수하여 HP를 세계 두 번째 가는 IT 컨설팅/서비스 업체로 올려 놓았고(1위는 IBM이다), 3Com을 인수하여 네트워크 하드웨어에서 Cisco와 경쟁할 수 있도록 해 놓았다. Palm의 인수로 HP는 이제 애플 아이패드하고도 경쟁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이 조각들은 아직 합쳐지는 중이다. Palm이 애플에 대한 경쟁상대가 될 때까지는 아직 상당 기간 기다려야 하기 때문이다.


즉 HP가 지금 엄청나게 유능한 CEO를 단지 의혹에 불과한 성추문 때문에 쫓아내는 엄청난 실수를 하고 있다는 뜻이다.


 더구나 허드가 이뤄놓은 것과 목표하는 바는 의외로 명확하다. 그는 HP를 애플과 경쟁시키기 위해 이윤을 늘리는 동시에 유력한 모바일 운영체제를 인수했다.

HP가 인수한 팜은 공교롭게도 애플이 개발한 뉴튼 프로젝트에서 갈라져나간 인력들이 만든 PDA 운영체제다. 애플 역시 이 회사를 인수하기 위해 비밀리에 인수전에 뛰어들기도 했다. 그러나 당장 운영체제가 급한 HP가 인수했고 허드는 이걸 바탕으로 아이폰, 아이패드의 애플과 본격적인 경쟁을 벌이려 했던 게 아닐까?

허드의 사임에 대해서 돈 버는 데 탁월한 재능을 가진 유능한 CEO인 오라클의 경영자 래리 앨리슨은 아주 의미있는 평가를 내렸다. ( 출처 : 디지털 타임스 )


9일(현지시간)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래리 앨리슨은 마크 허드의 사퇴에 대해 "오래 전 애플 이사회가 스티브 잡스를 해임한 바보 같은 행동을 한 이후로 HP 이사회가 가장 최악의 결정을 했다"며 강도 높게 비판했다. 그는 "이사회 결정이 스티브 잡스가 복귀해 애플을 살리기 전까지 애플을 거의 파괴했다"며 이같이 말했다.

허드를 스티브 잡스에 비유한 것부터가 기묘하게 위의 흐름과 맞아 떨어진다.  아마도 앨리슨은 HP를 지휘하던 허드의 최종목적이 애플과의 한판 승부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게 아닐까.

HP는 애플의 라이벌이 될 기회를 놓쳤다?

하지만 위에서 말한 대로 HP 이사회는 허드가 애플을 노리고 세운 원대한 계획의 마지막 퍼즐조각이 맞춰지기 전에 그를 해임시켰다. 이 결정이 이후로 전세계 IT에 어떤 영향을 미칠 지 당장은 알 수 없다. 하지만 만일 시간이 흘러 HP가 애플에게 저항 한번 제대로 해보지 못하고 회피하거나, 어설픈 타협을 한다면 이 일은 두고두고 뼈아픈 기억이 되지 않을까.

실리콘 벨리에서 똑같이 <차고를 사무실로 삼아> 성공한 기업이 바로 HP와 애플이다. 둘의 본격적 경쟁을 보는 것은 마치 프로레슬링에서 똑같은 인파이터가 정면으로 싸우는 것을 보는 것만큼이나 재미있었을 지 모른다. 그러나 아쉽게도 지금 한쪽 선수에게 약간의 차질이 생긴 것처럼 보인다.


MS가 엉거주춤 비틀거리고, 구글은 묘한 아웃파이팅만 하고 있는 지금, 애플에게 <여기 내가 돌아왔다!>라고 외치며 뛰어드는 전통의 강호 HP의 등장은 살짝 내 가슴을 뛰게 만들 기회였다. 과연 전직 CEO 허드의 퇴장으로 HP는 애플의 라이벌이 될 기회를 포기하고 링 아래로 조용히 내려갈 것인가? 아니면 그래도 여전히 투지를 선보이며 애플에 도전할 것인가?

앞으로 애플과 HP의 행보를 주의깊게 지켜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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