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자를 열광시키는 애플 제품의 매력 가운데 디자인이 차지하는 비중에 꽤 크다는 것은 누구나 동감할 것이다.

개인용 컴퓨터가 단순히 베이지색 박스에 담겨 나오던 시절부터 스티브 잡스가 디자인을 맡은 애플2는 남다른 색깔과 매끄러운 곡선 디자인으로 주목을 끌었다. 비록 실패한 컴퓨터지만 리사(Lisa)의 디자인은 매우 미래지향적이다. 또한 매킨토시와 NEXT, 아이맥과 지금의 아이폰, 아이패드에 이르기까지 잡스가 관여한 제품은 모두가 매력적인 디자인을 하고 있다.

과연 스티브 잡스는 왜 이토록 디자인에 신경을 쓴 걸까? 또한 어째서 내놓는 디자인마다 대중의 관심과 감탄을 자아낸 걸까? 나는 오래전부터 이런 의문을 가졌지만 아무도 이걸 설명해주지 않았다. IT전문지나 블로그는 대부분 애플 제품의 내용물인 하드웨어 스펙이나 소프트웨어의 구성, 사용자 경험에 관심이 있을뿐이었다. 디자인에 대해서는 그냥 <멋지다> 수준 이상의 논평이나 분석을 내놓지 않았다.


다소 스티브 잡스를 비꼬는 외국의 누군가는 이렇게 언급했다. <컴퓨터 하드웨어를 만드는 재주도 없고, 그렇다고 코딩으로 소프트웨어를 만들줄도 모르는 잡스가 유일하게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건 제품 껍데기 디자인 뿐이다.> 라고 말이다.

일견 이것도 맞는 말이긴 하다. 그러나 여기에는 반쪽의 진실 밖에 들어있지 않다. 왜냐하면 우리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개발부 부장이나 사장님 가운데는 역시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모르면서 심지어 디자인까지 관심없는 분들이 허다하기 때문이다.

현재 세계시장을 선도하는 디자인 회사 프로그의 창립자 하르트무트 에슬링거가 쓴 책 <프로그>를 우연히 읽게 되었다. 그러자 위에서 언급한 스티브 잡스와 디자인에 대한 내 의문의 일부가 풀렸다. 참고로 하르트무트는 전세계적으로 디자인 혁명을 일으킨 인물로 애플의 <스노 화이트> 디자인 언어 및 애플 컴퓨터, 소니 트리니트론 TV, 디즈니 유람선과 가전제품, 루이뷔통, 루트프한자, 아디다스 등 많은 글로벌 기업의 성공에 공헌했다고 한다.


나에게 중요한 건 이 디자이너와 스티브 잡스 사이의 이야기였다. 이 <프로그>란 책은 매우 유익하고 가치있는 책이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좋은 구성을 가진 책이 아니다. 디자이너인 하르트무트가 직접 쓴 글인데 <디자이너는 차라리 디자인만 하고, 이런 책은 전문작가에게 맡기면 어땠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각 기업의 사례와 개인의 체험만 진솔하게 늘어놓았어도 군더더기 없는 좋은 책이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무엇인가 교훈을 주고 주장을 하겠다는 욕심이 앞선 나머지 횡설수설이 아닐까 싶을 만큼 중언부언 격인 지침들이 나온다.

재미있는 건 디자이너인 필자는 자기에게 컨설팅을 의뢰하는 회사에 대해 <디자인은 전문가에게 맡기는 게 좋다>란 교훈을 끊임없이 상기시킨다는 점이다. 그러면서 막상 스스로는 전문분야도 아닌 책을 그냥 스스로 썼다. 그것도 별로 좋은 문장이나 구성도 못한 채로. 이런 게 아마도  우리 인생의 아이러니인 듯 싶다.

어쨌든 250페이지 남짓한 이 책 안에는 잘만 가려읽으면 매우 흥미있는 내용이 많았다. 특히 가장 인상깊었던 것은 이것이다.

디자인 회사 프로그가 본 애플 성공의 비밀은?

내가 이 책에서 가장 주목 했던 건 몇 가지 부분을 소개 하겠다.



1. 잡스는 그의 꿈과 '고객시장'에 대해 자주 이야기했고, 컴퓨터가 가져올 변화할 미래에 대한 비전 전략을 공유했다. 놀랍게도 잡스의 비전은 비교적 짧은 시간 안에 현실로 이루어졌고, 오늘날 애플은 디자인 중심 비즈니스의 선두주자가 되었다.

2. 애플의 제품을 '최고'로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 그렇지 않은 것은 어떤 것인지 결정하는 지휘권은 늘 잡스가 쥐고 있다. 다행스럽게도 그의 판단은 거의 옳았다. 그리고 옳지 않을 때도 옳았다.(즉, 그의 판단은 대부분 옳다).

3. 그러나 이러한 애플의 혁신전략은 '과정'을 무시하거나 정치적인 내분이 발생할 가능성이 큰 기업에는 적용되기 어려울 것이다. 전 세계적으로 애플과 같은 성공을 거둔 기업이 드문 것도 이 때문이다.


나는 단순한 뜬구름 잡는 이야기를 싫어한다. 따라서 직설적으로 말하겠다.

1번에 주목한 이유는 <디자이너가 업체 사장과 비전전략을 공유했다>는 의미에 있다.
보통, 디자이너들은 스스로를 예술가로 생각하고 나머지 기업 관계자는 장사꾼이나 기술자로 생각하기에 마음을 잘 열지 않는다. 하물며 미래에 대한 비전을 공유할 정도가 된다면 그건 스티브 잡스가 디자이너가 생각하는 바를 정확히 이해했으며 자기의 열정을 디자이너에게 옮길 정도로 친숙했다는 이야기다.



오늘날 세계의 대부분 CEO가 디자인을 중시한다. 하지만 직접 디자이너와 만나 꿈을 공유할 정도까지 대화하고 친밀감을 쌓은 경우는 거의 없다. 이것이 애플의 디자인 성공을 가져온 첫번째 비밀이다.

2번은 저 말 자체에 있지 않다. 까다로운 디자이너를 이렇게까지 수긍하게 만드는 카리스마의 문제다.
1번은 친밀한 친구관계지만 자칫하면 완전 대등한 관계가 되어, 원하는 것을 요구하지 못하게 되는 수가 많다. 그러나 잡스는 꿈을 공유하면서도 결국 <그것은 내 꿈이며, 내가 결정한다.>는 것을 디자이너에게 완전히 이해시켰다. 디자이너가 자발적으로 CEO의 뜻에 따르게 만드는 것이 두번째 비밀이다.


3번의 말은 뒤집어 생각하면 답이 있다.
 <애플은 과정을 무시하지 않았고 정치적인 내분도 발생하지 않았다.> 여기서 과정이란 디자인과 기능의 효과적인 배치에 필요한 여러 커뮤니케이션과 조정을 말한다. 디자이너들과 나머지 부서의 요구를 서로 잘 수용하면 일단 과정이 지켜지는 셈이다.


한번 결정된 일이 쓸데없이 뒤집히거나 엉뚱한 요구가 추가되지 않는게 필요한다. 이런 건 주로 기업 내의 정치적 파워게임에서 나오는 경우가 많다. 개발부가 자기 힘을 시험해보려고 그럴 수도 있고 영업부가 무슨 일로 화가 나도 그럴 수 있다. 애플은 그야말로 잡스가 하라고 하면 일사천리로 통과되는데 따라서 프로그는 잡스와 이야기만 하면 더이상 그 후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니 안심하고 일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게 세번째 비밀이다.


결국 디자인 회사 프로그의 창립자 하르트무트가 애플 성공의 비밀로 제시한 이유는 이렇게 압축된다.

1. 디자이너와 잘 교감하며 디자인을 최고로 중시하라.
2. 결정과 지휘는 확실히 해라.
3. 한번 결정한 일은 제품 외 적인 요소로 변경되지 않도록 하라.

이것이 나올 때마다 사람들을 감탄하게 만드는 애플 제품의 잘빠진 디자인을 만드는 원동력이다.

이 밖에도 이 책에는 마치 모래사장에 파묻힌 동전더미 처럼 많은 가치있는 내용들이 흩어져 있다. 관심있는 사람은 한번쯤 구해서 전체를 읽어보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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