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플2 시절을 지나서 이후 본격적으로 애플 제품의 개발과 홍보에 관여할 수 있게 되었을 때부터 잡스는 디자인을 매우 중시했다. 특히 외관적인 디자인과 실용성의 조화를 최우선적인 과제로 놓았다.

 

잡스는 흔히 미니멀리즘이라고 하는 산업디자인 개념을 매우 좋아했던 것 같다. 필요한 기능을 구현하는 것 외에는 나머지 외관에서 일체의 번잡스러움을 생략한 스타일이 바로 미니멀리즘이다.

 





예를 들어서 애플 2이후로 잡스가 내놓은 컴퓨터인 매킨토시는 모니터와 본체가 일체로 되어 있다. 모니터와 본체를 연결하는 잡다한 케이블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미니멀리즘 디자인이 운반이 편하다는 기능성과 조화를 이룬 모습이다. 이후 따로 독립해서 만들었던 NEXT 역시 일부러 싸구려 플라스틱이 아닌 다이캐스트 마그네슘이란 재질을 썼으며 깔끔한 마무리와 매우 아름다운 디자인으로 유명하다.

 

잡스의 일화를 다룬 책 ‘아이콘’에 따르면 일정에 차질이 생겨서 막상 이 NEXT 컴퓨터 자체에서 운영체제도 구현되지 않은 상태에서 프레젠테이션을 한 일이 있었다. 완전히 아무것도 든 게 없는 빈깡통을 가지고 비즈니스를 해야 했던 순간이다.

 

그럼에도 잡스가 등장해서 음악과 효과음을 울리며 보자기에 있는 컴퓨터에 스포트라이트를 비추고는 ‘이것이 바로 미래입니다!’ 라고 말하자 모두가 열광했다고 한다. 정작 그 매끄럽고 아름다운 케이스 안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할 컴퓨터는 전원을 켜도 아무 것도 보여주지 못하는 상태였음에도 말이다. 결국 잡스는 모두에게 ‘대동강물’을 사야한다는 말에도 기꺼이 박수를 치게 만들었던 셈이다.

 





이때 스티브 잡스의 연출력을 뒷받침해 준 것은 바로 디자인이었다. 아무리 그가 설득력이 좋다고 해도 이때 별볼일없는 허름한 외관을 들고 나와서 그렇게 말했다면 과연 그 많은 사람들이 의심 없이 설득 당했을까? 잡스가 디자인에 그렇듯 열중한 것은 적어도 이때 보답을 받았다.

 

그렇다면 ‘모든 제품에서 디자인을 중시하라.’ 는 것이 정답일까?

 

앞서 쓴 ‘아이폰과 스티브 잡스 열풍은 과장된 허상이다.’ 란 글에서 나는 잡스와 애플을 모델로 한 경영이론 대부분이 잘못된 것이라고 지적했다.

 

즉, 스티브 잡스와 애플이 취한 행동을 가지고 누구에게나 추천하고 적용할 수 있는 일반 이론을 끌어낸다는 건 의미가 없다는 뜻이다. 스티브 잡스는 천재적인 경영자일 뿐 일각에서 농담으로 말하는 ‘종교교주’가 아니다. 또한 어느 시사잡지에 풍자된 듯한 ‘예수 그리스도’는 더더욱 아니다. 그러니 그가 한 결정을 똑같이 한다고 해서 성공한다는 보장은 없다.

 

스티브 잡스가 고비에서 보인 리더쉽은 그저 잡스의 선택일 뿐이다. 굳이 이론이란 말을 붙인다면 잡스 이론(Jobs Theory) 정도가 어울릴 듯 싶다. 이제부터 내가 말하는 잡스의 모든 리더쉽과 전략은 어디까지나 잡스 개인이 취한 선택이며 장단점이 따른다. 나는 잡스가 어떤 선택을 했으며 그것이 불러온 결과를 말할 뿐 무조건 찬양할 생각은 없다. 판단은 이 글을 읽는 사람의 몫이다.

 

그럼 이제부터 이른바 ‘잡스 이론’을 시작해보자.

 





현재 우리나라를 비롯한 세계 사람들을 매혹시키고 있는 아이패드와 아이폰의 디자인을 보자. 전문가들은 이것을 미니멀리즘과 완벽주의가 만들어낸 최고의 디자인으로 평가한다. 그리고 이런 형태의 디자인은 다른 IT제품에서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파란 투명 플라스틱으로 유명했던 아이맥과 간단하지만 강력한 휠 인터페이스로 무장한 아이팟 역시 마찬가지다. 한번 쫓겨났다가 다시 돌아온 잡스가 애플을 살리기 위해 가장 심혈을 기울인 부분은 제품 자체의 혁신성과 함께 디자인의 완벽함이었다. 어떨 때 그것은 거의 ‘편집광적’ 이라고 까지 말해진다.

 





예를 들어 잡스가 새로운 제품을 만들 때 단 하나의 나사도 없이 설계하라고 지시했다. 그런데 실제 잡스의 손에 들어온 제품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부분에 나사가 딱 하나 있었다. 그러자 잡스는 즉시 제품 설계를 다시하게 만들고 그 설계자를 해고했다고 한다.

 

어째서 잡스는 이렇게까지 디자인에 집착하게 된 것일까? 적어도 스티브 워즈니악이 만든 애플2는 그다지 디자인에 집착하지 않았다. 말하자면 디자인 중시는 완전히 잡스 개인의 고집이란 뜻이다. 아마도 여기에는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첫 번째로 잡스가 엔지니어가 아니란 점이다. 그는 설계를 직접 해 본적이 없기에 제품을 볼 때 설계자로서 만들기 편한가에 관심이 없다. 철저히 그 제품을 써보는 소비자로서 제품이 매력적인지 아닌지 결과물을 중심으로 본다.

 

즉 잡스 입장에서는 이 물건이 과연 소비자가 반해서 돈을 주고 기꺼이 구입할 만한 것인지가 중요하다. 설계자가 물건을 설계하기 위해 들이는 기술적인 난점은 이차적인 문제다. 더욱이 잡스에게는 그 물건의 시제품을 가지고 직접 돌아다니며 홍보를 해야 하는 임무도 있었다.

 

엔지니어가 아닌 잡스로서는 그 안의 CPU가 어떤 구조로 되어 있다느니, 운영체제의 어떤 계층적 구조가 기술적으로 더 우수하다느니 하는 식의 홍보는 할 수 없다. 잡스가 가장 잘 홍보할 수 있는 요소는 당장 눈앞에서 누구나 당연히 볼 수 있는 세련된 외관과 그 안에서 돌아가는 프로그램이 엔지니어가 아니어도 누구든 쉽게 쓸 수 있으며 강력하다는 점이었다.

 




두 번째로는 잡스가 유달리 튀는 것을 좋아하고 파격을 추구했다는 점이다. 한때 동양사상을 비롯해 마약에도 손을 댔다는 의혹이 있는 잡스다. 적어도 그가 만드는 것은 남들과 달라야 했다. 이때 다른 미국 컴퓨터 업체에서는 철저한 합리주의로 일관했다.

 

컴퓨터나 IT제품은 어차피 그 기능에 목적이 있어서 사는 것이다. 예술적인 아름다움 같은 데 들일 비용이 있다면 차라리 값을 낮추거나 제품 성능을 올리는 게 쓰겠다.

 

이것이 이때 미국을 비롯한 서양 컴퓨터 업체가 외쳤던 합리성이다. 하지만 잡스의 마인드는 ‘모든 면에서 최고의 제품을 원하는 고객도 있다. 나는 미래를 원하는 고객을 상대하겠다.’ 는 것이었다.

 

어떻게 보면 잡스에게는 과거의 트라우마도 있다. 초창기 애플컴퓨터 시제품을 들고 언변에 서툰 워즈니악 대신 은행에 생산자금을 빌리기 위해 돌아다니다가 거절당했을 때 잡스가 무엇을 느꼈을지 상상해보자. 엔지니어가 아닌 잡스에게는 기술적인 면에서 설득할 능력이 부족했다. 은행 담당자 역시 기술에는 무지하다.





잡스는 담당자 앞에서 볼품없는 허름한 나무판과 전선으로 얼기설기 조립된 장치를 꺼낸다. 그 상황에서 ‘이것이 미래입니다.’ 라고 말했을 잡스에게서 어떤 포스가 뿜어나올 수 있을까. 은행 담당자가 미래전망이 있는 천재가 아니라면 실패한 것이 당연했다. 아마도 그때부터 잡스는 자기가 홍보할 제품이라면 척 보기만 해도 사람들이 홀딱 반해야 한다고 굳게 결심했던 게 아닐까.

 

요즘 연일 화제가 되고 있는 아이패드와 아이폰을 비롯한 애플 제품의 디자인이 매력적인 이유는 바로 이것이다. 사람들이 말하는 잡스의 마법과 같은 설득력은 무엇보다 그 첫 번째가 제품의 매력적인 디자인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디자인이야 말로 애플 제품의 절반이다. 나머지 절반은 어떻게라도 집어넣은 혁신성이다. 아이팟을 예로 들어보면 기능이란 면에서는 그냥 MP3 플레이어였고 음질도 최고수준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세련된 디자인과 휠 인터페이스란 혁신적 조작기능이 원투펀치를 형성해서 시장을 휩쓸어버렸다. 우리가 지금 보는 아이패드 역시 아이팟에서 갈라져 나왔다는 점을 감안할 때 매력적인 디자인을 가지는 것은 당연하다고 하겠다.

 





한편으로 잡스뿐만 아니라 서서히 IT제품 전반에 걸쳐서 디자인을 중시하는 일련의 그룹이 생겨났다. 그것은 미국업체가 아니었다. 바로 바다 건너에서 가전제품 회사로 출발해 IT로 발을 들여놓은 일본 업체들이었다. 소니로 대표되는 이 회사들은 잡스와 많은 영향을 주고 받게 된다. 이 점에 대해서는 이어지는 후속편에서 다뤄 보겠다.

 




이 글이 오늘자 다음 메인에 올랐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