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이란 말은 어쩐지 진한 향수를 낳는다. 영화 '마지막 황제'라든가 초등학교때 내가 감명깊게 읽은 알퐁스 도데의 소설 '마지막 수업'은 그래서 아직도 내 마음에 남아있다. 

'나는 이 마지막 수업을 평생 잊을 수가 없겠지요.'

마지막 수업에서 가장 인상깊었던 문장이다. 마찬가지로 한때 나를 사로잡았던 게임인 스타크래프트1을 주제로 한 온게임넷 스타리그가 마지막 결승전을 한다고 했을 때 내 안의 무엇인가가 외쳤다. 이건 꼭 가봐야 한다고 말이다. 그래서 나는 주저없이 황금같은 토요일 저녁을 마지막 스타리그 현장을 위해 쓰기로 했다.


토요일 오후 6시. 잠실학생체육관의 분위기는 심상치 않았다. 사실 이전에 취재했던 전쟁기념관에서의 스타리그가 그렇게 많은 관중이 들지 않았던 터였다. 점차 식어가는 스타리그의 인기가 걱정스러워서 다소 조촐한 규모가 되지 않을까 생각했었다. 그래서 나라도 이 뜻깊은 자리에 참석해야겠다는 생각도 있었다.


그러나 현장에 도착한 나는 그것이 얼마나 쓸데없는 생각이었는가를 깨달았다. 경기 시작 30분 전부터 이미 현장은 거의 채워진 관중석과 더 들어오려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아마도 모두가 나와 비슷한 생각일 듯 싶었다. 마지막 스타리그라는 현장을 자기 눈으로 보고 느껴야겠다는 생각에 달려온 팬들일 것이다.


그래서 현장은 마지막답게 비장한 분위기였을까? 그건 아니었다. 유명 가수의 콘서트장처럼 신나고 즐거운 분위기였다. 예전부터 보아왔던 스타리그 결승전의 분위기와 다를바 없었다. 오히려 많은 청중들로 인해 달아오른 것이, 전성기 스타리그의 분위기까지 느끼게 했다.


우연이었을까? 이번 스타리그 결승전에 올라온 사람은 지난번 용산 전쟁기념관에서의 스타리그 결승전 멤버와 동일했다. 프로토스의 허영무와 테란의 정명훈이다. 이전 취재에서도 엄청난 경기력과 대역전극이란 명승부를 연출했던 두 사람이다. 새삼 각본도 없는 이런 대회에서 마지막을 장식하게 될 줄이이야. 경기를 충분히 기대해봐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취재진과 팬들, 그리고 보도진으로 가득한 경기장에서는 분위기를 띄우기 위한 이벤트 매치가 준비를 마치고 있었다. 레전드 매치로서 바로 스타리그의 팬이라면 누구나 아는 임요환과 홍진호의 대결- 바로 임진록이다. 


그때 시절의 유니폼까지 전부 갖춰입은 두 사람은 이제는 선수라기 보다는 각 팀의 코치들이다. 풋풋한 신인시절에 승부를 겨뤘던 사람이 스타가 되고 코치가 되어서 승부하는 모습은 마치 차범근 감독이 다시 축구를 하고, 선동렬 감독이 다시 볼을 던지는 것만큼이나 감동스럽다. 더구나 두 사람은 아직도 게임 기량을 충분히 유지하고 있다.


외국인들까지 방청하는 현장에서는 스타리그의 역사와 감동적인 장면들을 편집한 영상들이 흘러지나갔다. 많은 영광의 순간을 지니고 16년을 이어온 대회가 공식적으로 화려한 종결을 맞는 자리이다. 영상만 봐도 뭉클하고 추억이 떠오르는 건 스타리그와 더불어 내 인생이 그즈음에 어떠했는지를 기억하기 때문이다.


원하는 꿈이 있고, 그것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하겠다는 의지가 있던 시절이다. 당시 나도 가난한 소설가로서 힘겨울 때도 많았지만 스타리그를 보고 그 안에서 선수들의 성공을 보면서 힘을 얻었다. 스포츠란 그런 것이다. 직접 뛰지 않는 사람에게도 투지와 의욕을 준다. 목적을 이루었을 때의 보상을 보면서 성공을 향한 집념도 강해진다.


영광을 차지하는 증거인 트로피가 중앙에서 빛난다. 그리고 그 트로피를 두고 입장하는 레전드 매치의 주인공 임요환과 홍진호. 두 사람의 인연 만큼이나 재미있는 대결 내용은 아직도 기억이 난다. 


당시 저그의 최강자였지만 번번히 테란 임요환이란 벽에 막혀 2위에 머물러야했던 홍진호는 그래서 스타리그 우승경력이 없다. 영원한 2인자란 뜻의 '콩라인' 이란 유행어도 만들었다.  이날도 해설자는 이런 부분을 부각시키며 웃음과 투지를 이끌었다. 임요환은 이번에도 이겨주겠다고 자신만만했고, 홍진호는 이번에야 말로 그런 말을 실력으로 끝장내 주겠다고 응수했다.


테란의 황제와 폭풍 저그의 마지막 대결은 그렇게 길지 않았다. 특기인 바이오닉 테크크리를 탄 임요환의 진영을 성공적으로 정찰한 홍진호는 뮤탈리스트로 초반의 기선을 제압했다.

웅크리고 있다가 한번에 나와서 역전하려는 임요환은 차분히 마린-메딕 병력을 모았지만 역부족이었다. 곳곳에 이미 멀티를 확보한 홍진호는 러커와 울트라리스크까지 뽑아냈다.

가난한 테란과 부자 저그가 끝까지 싸우게 되는 가운데 홍진호는 팬들의 즐거움을 위해서 상대방 진영에 가스채취장을 만들고, 커맨드 센터를 감염시키는 여유까지 부렸다. 결국 홍진호의 압도적인 물량에 임요환은 드랍쉽을 하나 띄웠지만 정찰하던 스컬지에 격추되며 패하고 말았다.
 


흥을 돋우기 위한 레전드 매치는 이렇게 끝났다. 좋은 승부를 마친 두 사람은 나란히 코믹스러운 '콩댄스'를 추는 것으로 자리를 마쳤다. 좋은 경기에 이어 끝으로 좋은 예능까지 보여준 두 사람은 역시 스타였다.

이어서 펼쳐진 결승전은 분위기가 싹 바뀌었다. 상금과 함께 마지막 스타리그 우승자란 명예까지 걸렸다. 프로토스에게 걸린 가을의 전설이란 징크스도 있고 테란 정명훈에게는 설욕이란 사명도 주어졌다. 드라마 시크릿 가든을 패러디한 영상과 함께 팽팽한 긴장이 흐르는 결승전이 시작되었다. 


선수입장. 화려한 조명과 벚꽃 같은 종이가 날리는 가운데 입장하는 두 선수. 역대 스타리그 결승전의 맥을 잇는 마지막 입장이다. 이제 더이상 입장하는 선수는 없을 것이다. 

이날은 경기 자체의 내용보다 오히려 경기의 결과가 가지는 상징성이 강조되었다. 스토리를 만들어가는 엄재경 해설위원의 특징이다. 프로토스의 2회 연속 우승은 김동수만이 이룬 결과인데 여기서 허영무가 우승하게 되면 동일 기록자가 나온다는 것이다. 반대로 정명훈은 완성형 테란이면서도 어쩐지 부실한 모습이었는데 여기서 이겨야 진정한 왕자로 인정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경기의 흐름은 이전 결승전과 비슷했다. 프로토스의 허영무는 기발한 전략을 이용해서 승부를 던지는 전술가이자 승부사이다. 반대호 테란의 정명훈은 어떤 경우에도 안정적인 경기 운영과 물량을 통해 승부를 내는 전략가이다. 마치 제갈공명과 사마중달의 대결을 보는 것과도 같다.


첫경기는 허영무의 빠른 캐리어 작전이 돋보였다. 캐리어를 너무 강조해서 김캐리라는 별명까지 붙은 김도형 해설위원의 얼굴이 클로즈업되는 가운데 빠른 캐리어 전략은 정명훈의 벌처-탱크 전략의 의표를 찔렀다. 대공전력이 하나도 없는 테란은 뒤늦은 골리앗으로 대항했지만 패하고 말았다.



두번째 경기는 빠른 허영무의 빠른 다크템플러 작전이 나왔다. 그것으로 상대를 흔들어놓고는 아비터의 스테이시스 필드를 적절히 이용해서 공략하려는 작전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비교적 간단히 정명훈에게 막히고 말았다. 


이후 압도적인 물량을 운영하며 허영무와 싸운 정명훈은 기세로 눌러서 이겼다. 마치 허영무에게 네 전술이 안통하면 이렇게 된다는 교훈을 주는 것 같은 한판이었다.

가장 감탄을 자아낸 것은 세번째 경기였다. 허영무는 여기서 중앙에 건물을 하나 지어놓고는 리버드롭을 시도했다. 하지만 정명훈은 빠른 정찰로 이것을 간파했다. 이것만으로는 테란의 절대적 승리가 예상되는 전개였다. 특히 정명훈은 이럴 경우 상대의 타이밍을 기막히게 봉쇄하는 맞품 전략이 장기이다.


하지만 허영무는 미리 준비해온듯 바로 드라군 만으로의 3센티 드롭을 펼쳤다. 리버라면 조금 늦게 들어왔을 그 타이밍에 닥친 변경된 드롭작전에 정명훈은 크게 흔들렸다. 결국 허둥거리며 대응하려는 정명훈에게 준비된 후속의 리버공격을 먹이면서 허영무는 다시 한번 승리했다.


이날의 경기는 신기하게도 이전 두 사람의 대결과 비슷했다. 경기내용도 그랬지만 흐름도 그랬다. 승패도 비슷하게 가져갔다. 이전 대결에서는 네 번째 대결에서 다시 정명훈이 이기고 제 5경기까지 갔었다.


하지만 이날은 약간 다른 느낌이었다. 비슷하긴 하지만 어쩐지 정명훈이 조금 약해진 듯한 느낌이었다. 이겨도 시원하게 보이지 않고, 질 때는 너무도 맥없이 졌다. 이런 기세의 차이 때문에 네 번째 경기는 주목 받을 수 밖에 없었다.


여유때문일까. 허영무는 다시 한번 빠른 다크템플러를 썼다. 그런데 정명훈은 여기서 다시 한번 결정적인 대응미스를 저질렀다. 저번의 결승전이라면 차갑게 막아버리고 대번에 상대를 짓밟았을 포스가 보이지 않았다. 


공세조차 취하지 못하는 수세적인 태도는 비극을 불렀다. 다크템플러에 대한 아무런 대비가 없었던 것이다. 결국 초반에 일꾼까지 나와서 막는 궁지에 몰리고는 눈물겹게 버텼지만 이미 그것만으로 승패는 결정나버렸다. 허영무의 압승으로 마지막 스타리그 결승전은 마무리 되었다.


마지막 스타리그 결승전,  환상을 마무리하다.

승자가 결정되고 환호성이 우리는 경기장에서 마지막 감동의 순간이 펼쳐졌다. 나는 여기서 감동과 함께 아쉬움과 안타까움도 느꼈다. 이런 좋은 경기와 열정이 이것으로 끝이라는 아쉬움이다. 

물론 이것은 단지 스타1 리그의 끝이다. 스타크래프트2라는 경기로 다시 이런 좋은 모습이 넘어가게 되리라 믿는다. 모든 것은 시작과 함께 끝이 있다. 따라서 이런 좋은 모습으로 끝낸 스타리그는 내 평생의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을 것이다.


소설 마지막 수업은 다음과 같이 끝난다.

선생님은 흑판을 향해 돌아서더니, 백묵을 쥐고 커다란 글씨로 이렇게 쓰는 것이었어요. 
'프랑스, 만세!' 
선생님은 벽에 이마를 댄 채 한참 계시더니, 우리에게 손짓하면서 알려 주는 것이었어요. 
"끝났다...... 다들 돌아가거라!"
 
나도 이제 이 글에 덧붙여 다음과 같이 쓰고 싶다.


'스타리그, 만세!'


환상은 이렇게 마무리 되었다. 이제는 나도 돌아가야겠다. 그리고 남겨진 다른 게임리그를 주목하고 그 안에서 무엇인가 다른 것을 얻도록 노력해야겠다. 그것이 아마도 이 마지막 스타리그가 나에게 주는 결론이 아닐까. 나는 환상의 끝에서 새로운 출발을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