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전에 어떤 블로거가 나에게 물었다. 소설가와 IT 평론가를 동시에 하는 것이 힘들지 않냐고 말이다. 한번도 고민해본 적이 없는 일이라 나는 간단히 ‘힘들지 않다.’고 대답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좀더 구체적인 질문이 돌아왔다. 소설가로서 자유롭고 감성적인 상상력을 펼치는 글을 쓰다가, 다시 어느 순간 차가운 이성과 격식을 지켜야하는 평론글을 쓰는게 쉽게 가능하느냐? 라고 말이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상대가 무엇을 묻고자 하는지 알 수 있었다. 


그것은 단지 어렵다, 쉽다의 문제가 아니었다. 간단하게는 정체성의 문제이고 더 깊게 들어가면 추구하는 꿈의 문제다. 같은 문학계열의 예술이지만 소설은 창작으로서 꿈이 들어있는 반면, 평론은 응용분야료서 꿈보다는 철학에 가깝다. 하긴 그래서 그럴까. 요즘 나는 평론글을 쓰는 한편으로 자유로운 소설가 생활을 그리워하고 있다. 평론을 그만두고 다시 소설가로 돌아갈까 하는 생각도 계속 든다.

한때 스타크래프트란 게임리그를 매우 즐겨보면서 그 속에서 열광했던 것이 몇 년전이다. 어쩌면 그때 나의 영혼은 지금보다 더 순수했고 꿈에 넘쳐있었을 지 모른다.  게임이란 E-sports가 진정한 스포츠인가에 대한 논란은 잠시 접어두자. 나는 현실에서 이룰 수 없는 머나먼 우주와 외계문명, 지휘관과 병사가 되어 전쟁터에서 승리하고 정의를 지키는 남자의 로망을 스타란 게임에 투영시키고 있었다.


마치 어린 아이가 꿈을 차츰 잃어버린 것처럼 스타리그를 보지 않게된 최근 몇년 동안 그래서 나는 게임에 관심이 없었다. 보는 데 열광하지도 않았고, 하는 데 몰두하지도 않았다. 내 일상에서 순수한 의미의 감동이 점차 사라져간 시기도 이때였다. 그 빈 자리를 차가운 이성이 채우게 되었다. 

최근 우연히 접하게 된 게임 채널의 폐쇄와 스타리그의 쇠퇴소식에 맞물려서, 내가 다시 스타리그를 보러가기로 결심한 것은 이런 꿈을 찾아보기 위해서다. 게임자체보다는 그 게임을 통해서 내가 돈도 안되고 실용적인 것도 아닌 어떤 것에 순수하게 즐거워할 수 있는가를 보는 것이다. 나는 아직 배가 나와서는 부동산과 주식투자를 말하고, 골프나 치러다니는 어른이 되고 싶지 않다. 


이번 진에어 스타리그 결승전이 벌어진 곳은 용산에 있는 전쟁기념관이다. 전쟁무기와 함께 한국의 전쟁사를 조망하고, 힘을 키워 다시는 비극을 겪지 말자는 이 장소와 미래 전쟁게임인 스타 크래프트는 절묘하게 어울린다. 가을을 맞아 시원하게 부는 바람속에서 사람들이 게임을 보기 위해 모여있다.

물론 몇년전의 열광했던 분위기에 비해 사람 숫자도 적었고 열기도 그때같지는 않았다. 한때 한국에 온 용병 농구선수가 한국에서 제일 인기 있는 스포츠는 스타 크래프트 인 것 같다고 말할 정도로 인기있던 시절은 이제 지났다. 부산 광안리 해변에서 결승전을 해서 10만 관중을 모았다는 것도 이젠 전설이 되어 버렸다.



하지만 그럼에도 여기 모인 관중과 경기하는 프로게이머, 해설자들은 오히려 순수한 열정을 확실히 드러냈다. 목이 쉬도록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노력하는 해설자와 이에 호응하며 가족단위로 구경온 관객들의 성원은 여전히 스타리그의 앞날이 그렇게 어둡지는 않다는 걸 보여주었다. 더구나 가장 중요한 결승전 경기내용은 최고였다.



신인걸그룹과 가수공연 후 펼쳐진 결승전은 대단했다. 마치 전통처럼 여겨진 ‘가을의 전설’ - 이것은 가을이면 늘 열세이던 프로토스가 기적과도 같은 승리를 거둔다는 캐치프레이즈였다. 스타리그에서 김동수, 박정석, 오영종으로 이어지는 이 가을의 전설은 그러나 요란한 분위기와는 달리 실제로는 5년에 1번 달성되던 희귀한 전설이다. 그만큼 프로토스는 약했고, 상대 종족은 강했다.

저번 리그에 이어 이번에도 우승을 차지하겠다는 SK티원의 테란 정명훈은 자신만만했다. 팀 자체가 강팀인데다가 결승전에 무려 5번이나 나왔다는 관록도 있었다. 경기운영에 있어서도 정평이 나있는 선수였다. 단 한번만 지고 결승에 올라올 정도로 파죽지세였다.


이에 비해 삼성 칸의 프로토스 허영무는 간신히 결승에 왔을 정도로 힘들었다. 하지만 가을의 전설이란 확률낮은 기적을 바라는 관객과 주최측의 보이지 않는 격려가 힘을 주는 듯 해다. 하긴 워낙 못이기는 종족을 이렇게 해서라도 잘싸우게 하는 것도 나쁘진 않다. 홈경기인 듯 한 분위기를 주는 것뿐이지, 경기 밸런스에는 어떤 영향도 없으니까. 결국 실력이 강한 사람이 이기기 때문이다.

스타리그 결승전, 나에게 감동을 전해주다.

역대 제법 많은 스타리그를 봤고 결승전을 보았지만 이번 결승전은 단언하건대 최고의 경기였다. 나뿐만 아니라 이 자리에 참석한 모든 사람이 전율을 느낄 정도로 좋은 경기였다.

첫째로 두 선수의 실력이 워낙 좋았다. 보통 같은 결승전 상대라고 해도 처음부터 실력에 차이가 나는 경우가 있다. 그런 경우는 경기 양상 자체가 늘 한쪽이 머리싸움에서 다 이겨놓고 시작하기에 일방적이어서 재미가 없을 수 있다. 심할 때는 5판 3선승제에서 한쪽이 내리 3경기를 이기고 끝나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이번 경기는 그렇지 않았다. 마치 약속이나 한 듯 두 선수는 상대의 허를 찌르는 전술로 나왔고 한판을 이기면 다음판을 내주는 식으로 엎치락뒤치락하며 싸웠다.

둘째로 두 선수가 서로 지능적인 플레이를 했다. 어떤 경우에는 한 선수가 전략적으로 성공하면 다른 선수는 그저 무식하게 힘으로 밀어부친다든가, 물량만으로 이기는 경우도 있다. 그런 경우에는 경기 자체는 화려해도 그 안에는 스릴이 없고 감동이 없다. 당연히 이길 경기를 이기고 지는 경기를 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 결승전은 그렇지 않았다. 두 선수는 초반부터 치열한 전략싸움을 했는데, 이후 한번도 상대가 바라는 방법의 무난한 전술을 쓰지 않았다. 항상 상대가 예상하지 못할 방법으로 나와서 승부를 걸었다. 따라서 지루한 소모전이 없이 모든 전투가 승부를 가르는 결전이었다.



셋째로 두 선수 모두의 투혼이 돋보였다. 약간 패색이 짙어도 결코 함부로 미리 경기를 포기하지 않았다. 바늘끝만한 허점이라도 잡아서 반드시 공격을 했으며 이것은 상대를 일순간 당황하게 만들었다. 노력한 해설자들마저도 시시각각으로 바뀌는 경기상황에 결과를 놓고 갈팡질팡할 정도였다. 

허영무의 최종승리를 가져온 마지막 경기 역시 마찬가지였다. 테란 정명훈 병력이 진을 치고 본진과 멀티의 자원채취를 모두 방해한 상태에서 캐리어를 가던 허영무는 건물마저 일부 잃고는 심각한 상황을 맞았다. 사실 여기까지면 이미 80프로 이상은 진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캐리어를 신들린 듯이 조절해서 상대 지원병력을 끊고 역습을 나가며 승부를 되돌렸다. 

이어서 판세를 유리하게 가져가면서 상대의 최후 승부수까지 간파해내면서 대비를 했다. 결국 최후 결전의 타이밍마저 빼앗긴 정명훈은 분전했지만 결국 자원이 없어 패배를 시인했다.



매순간 긴장하게 만드는 이 결승전  경기에 나는 감동을 받았다. 지금은 사실 스타리그와 한국 E스포츠 자체의 위기다. 스타1은 점차 관심이 식고 있으며 스타2는 예상보다 인기를 못 얻고 있다. 시청률이 떨어져 게임채널 하나는 음악방송으로 바뀔 예정이며, 블리자드사와 한국게임리그 쪽은 법적 권리를 두고 다투고 있다. 이런 가운데 터져나온 승부조작 사건은 치명타를 가하고 있다.

그렇지만 이런 나쁜 환경속에서도 오히려 프로게이머들의 실력은 예술의 경지에 이를 정도로 세련되게 발전했다. 그들은 예년보다 적은 호응과 적은 관중 속에서도 최고의 경기를 선보였다. 충분히 박수를 받을 자격이 있다. 나는 그들의 프로정신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스포츠는 계속 되어야 한다. 일부가 물을 흐리고, 각종 사건 사고가 방해하더라도 진정으로 그 스포츠를 사랑하는 선수와 즐기는 관객이 있는 한 발전해야 한다. 좋은 경기를 보면서 다시금 예전의 꿈을 꿀 수 있었던 나같은 사람을 위해서라도 말이다. 외국인들도 많이 보인 결승전 같은 이런 이벤트를 통해 한국이 IT와 게임에 관해 더욱 독보적이고 꿈이 있는 나라로 발전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