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스티브잡스는 프로그래머인가?
요즘 유행하는 말 가운데 '웃프다'는 표현이 있다. 웃기다 와 슬프다 가 결합된 신조어인데 단순히 생각해보면 웃기지만 조금만 생각해보면 슬프다는 의미가 담겼다. 하긴 멀리서 보면 희극인 것이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는 건 찰리 채플린의 영화만 봐도 알 수 있다.
하지만 아무리 우리 인생이 그렇다고 해도 일부러 그런 상황을 만들 필요까지는 없을 것이다. 새 정부의 정책과제인 창조경제를 둘러싼 정책과 사회현상에서 나는 문듯 웃프다는 표현을 쓰고 싶다. 우선 새로운 정책 뉴스 하나를 소개한다. 한국교육과정에서 어릴 때부터 컴퓨터를 교육시키겠다는 것이다. (출처)
"우리나라 젊은이들이 어려서부터 컴퓨터 랭귀지를 습득할 수 있도록 초등학교부터 코딩 교육을 시키겠다."
5월 22일 서울 코엑스에서 열린 미래창조과학 국제컨퍼런스에 참석한 미래창조과학부 윤종록 제2차관은 이같이 말했다. 이날 윤종록 차관은 창조국가를 위해 청년들이 다양한 아이디어를 구현할 수 있는 비옥한 토양을 만들 것이라고 다짐하면서, 시기별 전략을 발표했다.
단기적(1년)으로는 비타민을 만들어내는 과정으로, 모든 산업 분야가 ICT와 융합해 각 산업이 보다 활발하게 움직면서 창조경제의 비타민의 역할을 수행하도록 할 계획이다.
중기적(5년)으로는 우리나라 젊은이들이 능숙하게 컴퓨터 언어를 구사할 수 있도록 초등학생들을 대상으로 컴퓨터 프로그램 개발 교육을 진행할 예정이다. 어릴 때부터 컴퓨터 교육을 진행하면서 창조경제에 적합한 인재를 키워내겠다는 전략이다.
그는 "초등학교 4학년부터 재미있고 쉬운 컴퓨터 코딩 교육을 받는다면 청년이 되어 코딩에 능숙한 전문가들이 늘어날 것이고, 그 중에는 스티브잡스와 같은 인재들이 나타날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장기적(10년)으로는 기초과학을 통해 미래 산업을 일궈낼 계획이다. 특히 기초과학을 발판 삼아 의료, 해양, 우주, 생명 분야에서 집중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 정책 하나 만으로 놓고 볼 때 나쁜 것은 아니다. 분명 어릴 때부터 컴퓨터를 교육시키겠다는 건 좋은 일이다. 나 역시 어릴 때 8비트 컴퓨터로 베이직 언어를 배우며 흥미를 가진 적이 있다. 그런 방법을 통해 컴퓨터에 흥미를 가지게 된다면 분명 한국 IT산업을 이끌 인재도 생길 수 있다. 10년에 걸친 장기적으로는 기초과학을 통해 미래산업을 일궈낼 거란 방향도 나쁘지 않다.
그런데 정작 불협화음은 초등학교가 아니라 대학교에서 나오고 있다. 다음 기사를 보자. (출처)
"이번에는 철학과, 독문과지만 당장 다음에는 우리 과가 될지 모르니까요."
한남대 철학과와 독문과에 대한 '폐과' 논의가 진행 중이라는 소식을 접한 문과대학 소속 A 교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한남대는 지난해부터 취업률과 충원율 등 4개 지표를 바탕으로 학사 구조조정을 진행하고 있다. 낮은 점수대에 머무르는 학과는 '퇴출' 수순을 밟게 된다.
가장 낮은 순위를 기록한 철학과가 폐지 여부 1순위에 올랐다. 함께 폐과가 추진됐던 독일어문학과는 논의가 1년 유예될 것으로 알려졌다.
"1년 유예가 되든, 지금 폐과가 되든 결국은 모든 인문학과가 비슷한 수순을 밟게 될 것"이라는 불안과 상실감이 교수들 사이에서 팽배하다.
인문학과의 잇따른 폐지는 비단 한남대만의 문제는 아니다. 앞서 배재대는 국어국문학과와 독일어문화학과, 프랑스어문화학과 등을 통폐합하기로 했다. 목원대도 독일언어문화학과와 프랑스문화학과를 폐지한다. 대전대는 올해부터 철학과 신입생 모집을 중단했다. 건양대는 국문과를 이미 폐지했다.
이 같은 상황을 결정하고 있는 것은 사실상 '취업률'이다. 교육부가 선정하는 이른바 '부실대학' 기준에 취업률이 차지하는 비중은 20%에 달한다. 결국 지역대 구조조정의 기준도 이 '취업률'을 중심으로 이뤄질 수밖에 없다.
이 교수는 "이렇게 가다가는 학문 후속세대들은 씨가 마르게 될 것"이라며 "인문학은 다른 학문의 근간인데 뿌리째 흔들린 인문학에 대한 대가는 언젠가 치르게 될 수밖에 없다"고 우려했다.
한국의 스티브잡스는 프로그래머인가?
교육은 목적이 분명한 과정을 통해 인재를 만들어내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런데 위의 두 뉴스를 사실로 인정해보자.
1. 초등교육과정에서 컴퓨터와 언어를 가르친다.
2. 대학에서는 돈이 안되는 인문학과를 없애버린다.
만일 초등학교에서 컴퓨터를 좋아하고 프로그래밍 언어를 배워서 장래 스티브 잡스가 될 꿈을 가진 인재가 나왔다 치자. 막상 그 인재는 대학에 들어가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 초등학교 때 배운 컴퓨터가 이제 대학에서 인문학을 만나고 기초과학을 만나야 스티브 잡스 같은 인재가 나올 수 있다. 스티브 잡스는 이미 애플이 나아간 길을 기술과 인문학의 만남이라고 표현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컴퓨터 프로그래밍을 잔뜩 가르친 영재가 막상 대학에 가면 인문학을 배울 수가 없게 된다. 다시 돈이 되는 공학분야나 컴퓨터 학과 밖에 선택의 여지가 없다. 그러면 결국 나오는 것은 스티브 잡스처럼 인문학을 베이스로 컴퓨터를 혁신하는 사람이 아니다. 처음부터 프로그래밍과 코딩을 배우고 나중에도 코딩만 잔뜩 배운채 정작 인문학 지식은 없어서 사회를 잘 모르고 사람에 둔감한 엔지니어만 나온다.
결국 한국이 원하는 스티브 잡스는 당장 컴퓨터 앞에서 키보드를 두들겨서 돈 되는 앱을 만들어내는 사람- 프로그래머에 불과하다. 장기적으로 고민하고 방황도 하고, 엉뚱한 상상을 디자인과 인문학에 접목시키는 사람은 구조적으로 나올 수 없다. 개별적인 돌연변이로 나올 수야 있겠지만 그걸 교육이 키워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차라리 말이나 못하면 밉지나 않지. 라는 표현이 있다. 스티브 잡스를 키우겠다고 잔뜩 꿈을 부풀려놓고 만든 초등 교육과정에서 인생을 결정한 사람들이 있다면? 대학에 가서 스티브 잡스가 강조한 인문학이 아예 없는 한국 대학과정을 보고 무엇을 느낄까. 정부에 속았다고 느낄까? 아니면 한국이 원하는 스티브 잡스란 원래 앱이나 만드는 프로그래머였다고 체념할까? 그 어느 쪽이든 그저 웃기고 슬픈 - 웃픈 현실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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