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인 시오노 나나미가 쓴 '로마인 이야기'는 매우 유명하고도 유익한 책이다. 이 책은 어떤 역사가도 감히 하지 못했던 로마의 모든 역사를 전부 제대로 서술한 책이기 때문이다. 또한 매우 쉽고도 재미있는 문장으로 쓰여졌기에 일반독자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어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하지만 바로 이 점이 동시에 비판의 원인이 되었다. 당초 비전문가인 시오노 나나미가 이 책을 쓰게 된 동기는 로마인에 대한 경외심과 호의였다. 때문에 이 책은 지독한 로마중심주의 서적 내지는 '로마 오다쿠의 팬픽' 이라는 비난까지 듣는다. 게다가 전문성이 부족하다는 말도 듣고 있다. 하지만 이런 비난을 하는 사람들은 시중에 로마 역사를 이렇게 까지 섬세하고 재미있게 서술한 책이 없다는 점을 종종 무시한다. 본래 쉽고 재미있게 쓰려면 다소간의 과장이나 의도된 중심점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어려운 학술서가 되어 버린다.

나는 애플과 삼성을 비교하면서도 학술서나 논문 같이 재미없는 글을 쓰고 싶지는 않다. 때문에 나는 다분히 각 인물의 개인적 시선이나 감성적 측면을 끌어낸다. 그것을 가지고 비난하거나 사실이 틀렸다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건 단지 관점의 차이다.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에서 가장 극적인 장면 가운데 하나는 브루투스가 케사르(시이저)를 찔러 죽이는 장면이다. '부루투스, 너마저도!' 란 대사는 두고두고 회자되는 명대사가 되었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는 케사르를 영웅으로, 브루투스를 배신자로 알고 있다. 그런데 막상 지독한 로마 중심주의라고 비난받은 나나미조차도 다음과 같은 시각을 제시했다.



과연 브루투스는 왜 케사르를 찌른 것일까? 그건 아마도 케사르가 베푼 개인적인 은혜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 자기를 낳고 키워준 모국 로마의 빛나는 체제-공화정이라 생각했던 게 아닐까? 따라서 그걸 파괴하려는 야심을 가진 케사르를 찌르는 건 배신이 아니라 더 큰 대의명분에 입각한 의거라고 생각했던 게 아닐까?

나는 지난 포스팅인 애플은 어째서 삼성을 견제하려고 할까? 에서 애플과 스티브 잡스가 내부의 적에 대한 공포심이 있다고 말했다. 그에 대해 몇몇 사람들이 그런 사적인 감정보다는 냉철한 기업이익에 따라 행동한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생각해보자. 내부에서 키운 적은 대개 외부의 적보다 더 무섭다. 따라서 내부의 적에게 배신당하게 되면 당연히도 기업이익에 심각한 피해가 온다! 그러니까 그들의 말과 내 말은 전부 맞는 것이지 누가 틀린 게 아니다. 브루투스가 찔렀을 때 케사르는 배신만 당했을 뿐 손해본게 아니던가? 무엇보다 소중한 목숨을 빼앗기기 않았던가?

하지만 여기서 잠시 생각해볼 부분이 있다. 과연 어떤 회사가 자기를 배신했다고 보고 있는 다른 회사들의 행동은 과연 객관적인 의미로도 '배신'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일까?

1) 우선 애플의 입장을 보자. 애플은 혁신적 의미의 스마트폰인 아이폰으로 한동안 거의 독무대를 차지했다. 하지만 사외이사 자리까지 준 구글이 본격적인 경쟁을 위해 내놓은 안드로이드폰이 나왔다. 그러자 스티브 잡스는 격분했는데 그건 단지 기업이익이 깨졌다는 냉정함이 아니라 믿었는데 배신당했다는 분노였다. (출처, 광파리님 블로그, 와이어드 )



이번 미팅에서는 구글과 어도비도 화제가 됐다. 구글은 1월5일 안드로이드폰 넥서스원을 내놓았다. 그러자 잡스는 바로 그날 아이튠스/앱스토어에서 앱(응용 프로그램) 다운로드가 30억회를 돌파했다고 발표하게 했다. 10억회 돌파라면 얘기가 되지만 20억회 30억회는 별로인데 잡스가 열받은 것 같다.

구글과 관련해서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검색 시장에 들어가지 않았는데 구글은 휴대폰 시장에 들어왔다. 구글은 아이폰을 죽이고 싶어한다. 우리는 그렇게 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 다른 질문이 나왔지만 잡스는 다시 구글 얘기를 했다. ‘악마가 되지 말자’는 구글 모토, 그건 헛소리(bullshit)다.

지난해 에릭 슈미트 구글 최고경영자(CEO)가 애플 이사회에서 밀려날 때부터 ‘전쟁은 시작됐다’고 했는데 잡스가 구글 모토를 “헛소리”라고 맹비난했으니 이젠 선을 넘었습니다.

여기 스티브 잡스가 한 말에서 사실 냉정함은 거의 없다. 예전에 애플이 망하기 직전에 몰렸을 때 델의 CEO가 '애플은 차라리 사업을 접고 남은 재산을 주주에게 돌려주는 게 나을 것이다.' 라고 한 말에 대해 '기업 리더의 말로서는 품위가 없다.' 고 대응한 잡스다. 그래놓고는 자기는 더한 말을 경쟁기업에 던졌다. 이게 감정적 배신감의 소산이 아니면 무엇일까?

2) 애플에게 지금 배신자 취급을 받고 있는 삼성의 경우를 보자. 삼성이 감정적 배신감을 준 기업은 애플 만이 아니다. 실은 매우 초기의 금성사(지금의 LG)에게 심한 배신감을 주었는데 바로 전자산업에 뛰어들겠다는 선언 때문이었다. 10년이상 먼저 사업을 시작해 고생하며 개척한 시장에 숟가락만 얹겠다는 행동으로 비춰졌기 때문이다.



1959년 10월, LG전자(전 금성사)는 국내 최초의 라디오인 'A-501'을 생산했다. 이는 LG전자가 내놓은 첫번째 제품이자, 회사의 사활을 건 야심작이기도 했다.
1969년 3월, 삼성전자는 일본의 산요전기와 합작 투자 계약을 체결하고 정부에 전자사업 인가 신청을 낸다.

LG 구인회 회장은 삼성 이병철 회장이 전자 사업을 시작한다는 소식을 듣고 꽤나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동향, 동창에 사돈관계이기까지 한 이병철 회장이 자신의 '텃밭'인 전자 사업에 뛰어들겠다고 하니 구 회장의 입장에서는 불만을 가질 수 밖에 없는 노릇이었을 것이다. 이병철 회장의 장남 이맹희씨는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회상한다.,

그날 야외 테이블에서 아버지와 구 회장님, 그리고 내가 앉아서 커피를 마시며 이런저런 담소를 나누다가 아버지가 전자사업에 대해서 이야기를 꺼냈다.
"구회장, 우리도 앞으로 전자 사업을 하려고 하네."
지금도 분명히 기억하고 있지만 아버지는 꼭 이렇게 이야기했다. 아버지는 별다른 생각없이 지나가는 투로 이야기를 던졌는데 반응은 예상치 못하게 터져나왔다.

구회장은 벌컥 화를 내면서 "남으니까 하려고 하지!"라고 느닷없이 쏘아붙였다. 즉, 이익이 보이니까 사돈이 하고 있는 사업에 끼어들려고 하지 않느냐는 뜻이었다. 그때까지 퍽 친하게 지내셨던 두 분은 이 일로 아주 서먹서먹해졌다. (출처: 삼성 vs LG, 박승엽,박원규 지음)


삼성과 구글, 과연 애플을 배신한 것일까?

흔히 기업은 냉정하고 이익이 있을 뿐 감정은 없다고 한다. 영원한 적도 동지도 없다는 하는 말도 맞다. 하지만 기업도 사람이 하는 것이니 이렇듯 분명히 감정도 존재한다. 애플이나 LG의 입장에서 보면 분명 삼성은 배신자다.

하지만 여기서 나는 앞서 브루투스의 예를 들며 의문을 제기해보고 싶다. 배신이란 명분이 없이 이익만을 노리고 상대에 해를 가하는 걸 의미한다. 그렇지만 구글이 안드로이드를 만들 때 시장에는 아이폰에 대한 실질적 의미의 경쟁자가 전혀 없었다. 스마트폰 시장이 실질적 독점상태에 빠져들 우려까지 있었다. 그런 와중에 구글은 스스로도 애플편에서 충분히 승자가 되어 이익을 볼 수 있음에도 과감히 경쟁 플랫폼을 출시했다. 이건 적어도 '경쟁체제 확립' 이라는 대의명분이 분명하다.



삼성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이때 한국 시장이 좁기는 했지만 가전과 전자에서 실질적으로 LG 혼자 독점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알다시피 독점이 되면 소비자는 더 좋은 제품을 싸게 살 기회를 잃게 된다. 삼성의 행동이 LG에게는 배신이었을 지 몰라도 소비자에게는 좋은 대의명분과 이익이 있다. 역시 '자유경쟁 체제 확립' 이라는 측면에서 말이다.

재미있는 건 시간과 공간을 떠나 삼성과 구글의 배신을 맞은 리더들의 반응이 똑같았다는 점이다. 위에서 말했든 스티브 잡스는 구글에게 '애플은 검색시장에 들어가지 않았다. 그런데 왜 구글은 스마트폰을 만드냐?' 하고 신사협정을 위반했다는 식의 비난을 했다. 또한 나중에 LG 역시 삼성에게 마찬가지 감정이었다.

이를테면 구 회장은 장남 구자경 현 LG그룹 명예회장을 불러 "그쪽에서 꼭 그래 하겠다면, 서운한 일이지만 우짜겠노. 서로 자식을 주고 있는 처진데 우짜노 말이다. 한 가지 섭섭한 점이 있다면 금성사(현 LG전자)가 지금 어려운 형편에 있는 점을 노려서 다리를 걸어 넘어뜨리자고 덤비는 것 같은 기라. 하지만 나는 내 할 일만 할란다. 나도 설탕 사업 할락하면 못할 거 있나. 하지만 나는 안 한다. 사돈이 하는 사업에는 손대지 않을끼다."라며 서운한 감정을 드러냈다. (출처: 삼성 vs LG, 박승엽,박원규 지음)



소비자는 어디까지나 경쟁을 원한다. 하지만 기업들은 이익을 위해서 때로는 서로 뭉쳐 경쟁을 하지 않으려고 할 때가 있다. 이럴 때 경쟁을 하겠다는 행위는 어떤 경우에든 권장받아야 한다. 이건 배신이 아니다. 오히려 짜고서 소비자를 우롱하는 것이 바로 담합인데 이것이 도리어 소비자에 대한 배신이다. 조폭끼리의 '의리'가 아무리 아름다워도 그로 인해 피해를 보는 선량한 시민 입장에서는 '의리'가 아닌 '협잡'일 뿐이다.

때문에 나는 애플과 스티브 잡스가 겪은 '내부의 적에 대한 공포심' 을 만든 기업들의 행동을 결코 객관적인 의미의 '배신'이라고 보지 않는다. 또한 LG에 대한 삼성의 전자사업 진출을 배신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단지 잡스 입장에서의 배신, 구인회 회장 입장에서의 섭섭함 뿐이다. 적어도 소비자인 우리는 그렇게 보아야만 나은 미래를 보장받을 수 있다. 나는 모두가 보다 소비자 입장에서 생각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