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음식에는 그 나라의 전통과 문화가 담겨 있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는 본고장 음식을 인정한다. 술 역시 음식의 하나이기에 그런 식으로 생각하기 쉽다. 예를 들어 막걸리 열풍이 분 일본에서 한국의 전통 막걸리를 제조하겠다고 나서면 우리는 웃을 수 밖에 없다. 성분이야 비슷하게 만들 수 있겠지만 한국의 전통이 밴 맛을 일본회사가 단기간에 낸다는 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도 와인을 만든다고 하는 말을 들었을 때 내가 처음 느낌 감정 역시 그런 냉소를 넘지 못했다. 예전에 호기심에 사서 먹어보았던 진로의 저가 포도주가 고작해봐야 <포도맛 소주>에 불과한 맛을 냈던 안 좋은 기억도 있다. 한국에서도 분명 포도가 나오니까 단순히 포도를 기계에 넣어 즙을 짜내 만드는 <포도주>는 만들 수 있겠지. 하지만 유럽과 서구인 식생활의 대부분을 점령한 문화적 의미의 <와인>을 만들 수 있을까. 이것이 내 중요한 의문이었다.



그러나 때로는 사람이 자기 생각의 우물에 갇혀 사고가 좁아지는 경우가 있다. 내 경우에도 비슷했다. 대부도에 있는 그랑꼬또 와인을 맛보고 설명을 듣고 나서 내 생각이 크게 바뀌었기 때문이다.


좋은 와인을 만드는 요소에는 무엇이 있을까?

첫째로 좋은 재료가 있다. 습기가 많고 따스한 해양성 기후가 좋은 포도를 만드는 조건이다. 캠벨이라는 품종이 와인 만들기에 좋은 종이라고 한다.
두번째로 좋은 기계를 써서 질 좋은 즙을 짜내는 일이다. 설비 하나에 수억씩 하는 기계는 전부 외국제다. 같은 기계를 쓴다면 그 과정에서 얼마나 사람이 정성들여 감독하는 지가 문제다.
세번째로 발효, 숙성과정의 관리와 감독이다. 옛날 방식으로 참나무통에 넣어 발효시키는 것도 좋지만 그건 다분히 금속으로 만든 좋은 통을 확보하기 어려운 옛날의 여건도 있다. 요즘은 금속통에 각종 장비를 달아 과학적으로 관리하는 선택도 좋다.



대부도에 있는 그랑꼬또는 이런 조건들을 모두 만족시키려 애썼다. 포도재배에 좋은 자연환경 하에 지어진 비닐하우스와 그 안에서 봉지를 씌워 재배하는 포도들이 있다. 그리고 산지에서 직접 딴 포도에서 신선할 때 기계를 이용해 즙을 짜낸다. 그리고 그 신선한 포도주스를 이용해 발효시켜 와인을 만든다. 이것이 가장 간단하지만 좋은 와인을 만들기 위한 비결이다.

그랑꼬또는 규모가 작은 편이다. 그러나 그 안에는 한국에서 가장 좋은 와인을 만들기 위한 좋은 시설과 열정이 자리잡고 있다.


발효실에서 나오는 향긋한 포도 발효의 향기가 매우 좋았다. 냄새만으로도 취할 수 있다는 말이 실감이 난다.

보통 우리는 프랑스산이니, 백년 된 와인이니 하는 말에 혹하기 쉽다. 신의 물방울이란 만화처럼 와인에 대한 신비감을 가지기 쉽다. 그러나 실상 와인은 서구인에게 그저 일상적으로 식사와 함께 마시는 술이다.



그랑꼬또 와인을 제조하는 대표의 설명은 그런 면에서 매우 흥미로웠다.
와인에서 우리의 다소 그릇된 문화적 선입관과 열등감을 제거하고, 순수한 맛과 취향으로 본다면 프랑스산이든 칠레산, 이탈리아산이든 좋은 와인의 조건은 동일하다. 또한 한국 음식을 먹으며 마시는 와인이란 면에서 오히려 한국 와인이 나아갈 길이 명백해진다. 그것은 바로 짜고 매운 한국 음식의 특징에 가장 맞는 와인을 만드는 것이다. 한국 사람의 입맛과 미각은 바로 한국인이 가장 잘 안다는 자신감이다.




짧은 시음회에서 여러 종류의 그랑꼬또 와인을 마셔보았다. 껍질과 씨를 함께 넣은 레드와인, 과육만으로 만든 화이트 와인, 늦게까지 따지 않다가 수확한 당도높은 와인으로 만드는아이스 와인, 적당한 껍질을 함유한 로즈와인 등 다양한 와인이 제공되었다.

비록 미각이 약간 둔한 나였지만 각각의 와인이 펼치는 색깔과 독특한 향기, 맛은 구별할 수 있었다. 신선한 포도의 향기가 묻어나오는 와인을 마시는 기분은 말할 수 없이 행복했다. 그저 취하기 위해 술자리에서 마시던 술맛과는 전혀 달랐다.


보통 백년이니, 오십년이니 하지만 대표의 경험상 와인이 가장 맛있는 것은 십년 내외의 발효숙성기간이라고 한다. 발효기간이 오래될 수록 떫은 맛이 사라지고 맛이 순해지는 건 사실이다. 그러나 그 떫은 맛이 서구인에게는 기름진 스테이크 등의 느끼함을 해소시켜주는 비결이다. 한국의 김치와도 같은 역할이다. 그런데 그런 맛을 완전히 없애면 과일 발효주로서의 특성도 사라지는 것이나 마찬가지란 논리다.

한국인에게는 한국요리에 맞는 특성을 가진 와인이 가장 좋다. 이 말에 문득 의문이 들었다. 그런 논리라면 굳이 한국 요리에 서양술인 와인을 마셔야 할 이유가 무엇이 있는가? 차라리 한국의 전통술이나 막걸리를 마시는 게 낫지 않겠는가? 궁금해진 나는 질문을 던졌다. 그러자 돌아오는 대답이 놀라웠다.



그랑꼬또는 와인 역시 한국 전통주의 하나로서 만들고 팔고 있습니다. 그래서 전통주 박람회에도 출품합니다.

이 한마디에 모든 의문은 해소된다. 그렇다. 와인이란 서구이름을 떠나서 포도주란 한글이름을 붙이고 우리 땅에서 재배한 과일로 만들면 그것이 바로 전통주다. 포도로 술을 만들면 전부 남의 것이라고 생각할 필요가 없지 않은가?

그랑꼬또의 와인은 맛과 품질에서 벌써 많은 사람들의 인정을 받고 있다. 나름 명품 전략을 취하기에 일반적인 백화점의 유통채널을 통하지 않고 직접 주문을 받아 판매한다고 한다. 이곳의 성공에 자극받아 인근에 많은 와인 제조업자가 나왔지만 안이하게 영업하다가 거의 다 실패했다고 하니 무조건 만들어 판다고 다 되는 건 아닌것 같다.



그럼 왜 이름이 프랑스식인 그랑꼬또인가? 와인 병과 라벨에는 한글은 단 한글자도 없다. 그냥 보면 외국의 수입와인인지 아닌지 구별도 할 수 없다. 한국 전통주를 지향하면서 한글이름 하나 못짓나? 라고 생각할 수 도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맛 이외에 품격과 문화적 차별을 두는 소비자들의 취향이 영향을 주고 있다. 그랑꼬또가 처음으로 시작한 20년 전쯤에 만일 생소한 한국와인을 만들며 <대부도 포도주>란 이름을 붙였다면 과연 그 맛과 상관없이 소비자들이 샀을까? 만일 그랬다면 저는 진작 망했을 겁니다. 라는 대표의 농담은 농담만이 아니다.



어쨌든 한국에서 이처럼 열정과 도전정신으로 와인을 만들어 성공하고 있는 그랑꼬또를 보며 새삼 흐믓함을 느꼈다. 더구나 한국 전통주의 개념으로 접근한다는 점이 이채롭다. 대부도의 아름다운 낙조를 보며 그랑꼬또 와인의 맛을 되새겨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