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로는 단 한사람의 존재가 나머지 업계 전부를 합친 것보다 큰 위력을 가지기도 한다. 한동안 세계 금융계가 미국 연방준비위원장 그린스펀의 말 한마디에 출렁거렸던 것, 지금 미국 대통령의 환률 발언 한 마디가 세계를 환율전쟁에 대한 공포로 몰고 가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지금 IT 업계에서 그런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이 누구인가. 바로 애플의 CEO 스티브 잡스다. 그는 개인용 컴퓨터의 초창기부터 성공한 기업가로서, 아이폰과 매킨토시의 성공을 이끌어낸 신화적 존재로서 막강한 발언권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그의 말 한마디는 당연히 모두의 주목을 이끌어 낸다.
 

지난 몇 달동안 우리는 아이패드를 비롯한 태블릿이 궁극적으로 이동성을 위해 10인치를 버리고 7인치로 화면사이즈를 줄여갈 거란 사실을 의심하지 않았다. 아이패드는 10인치에 가까운 시원한 화면크기를 가지고 있지만 너무 크고 생각보다 무겁다는 평가가 많았다. 그것은 잡스가 이 기기를 거실용 컨텐츠 소비기기로 소개했지만 받아 들이는 측에서는 모바일 컴퓨터로 넷북이나 노트북의 역할을 원했기 때문이다.

전자책으로 봐도 화면크기는 줄어야 했다.
지난해까지는 아마존의 전자책 단말기 '킨들DX'의 크기가 9.7인치라는 점을 들어, 관련업계 및 전문가들은 9~10인치대가 적정크기라고 입을 모았다. 가독성이 가장 뛰어난 크기라는 것이 이유였다. 사실상 이 말은 아이패드가 10인치 남짓인 것과도 관련이 있다.


하지만 삼성전자를 필두로 7인치 제품이 점점 늘면서 점점 분위기가 바뀌기 시작했다. 아마존의 킨들 역시 6인치 모델을 내놓았으며  삼성전자는 다음 달 중으로 7인치 갤럭시탭을 출시한다. 스마트폰 '블랙베리'로 유명한 리서치인모션(RIM)은 이미 7인치 '블랙베리 플레이북'을 공개했다. 미국의 PC제조업체 델 역시 조만간 7인치 태블릿PC를 출시할 예정이다. 이런 식으로 주류의 움직임이 7인치로 이동하는 가운데 아이패드2는 7인치로 나올 거라는 예상이 대세였고 루머 역시 그런 방향으로 움직였다.

그러나 어제 뉴스에 따르면 스티브 잡스는 이런 업계의 움직임에 강력한 제동을 걸었다. (출처)

애플의 CEO 스티브잡스가 18일(현지시간) 애플의 4분기 실적발표 자리에서 7인치 태블릿PC에 대해 개인적인 생각을 밝혔다.

우선 잡스는 7인치 아이패드 출시설을 일축했다. 현재 태블릿PC 시장에서는 아이패드에 대적할 만한 경쟁자가 적으며, 이들 대부분이 7인치 화면을 채택한 PC들이라고 말했다. 이어 7인치 디스플레이로는 좋은 태블릿 앱을 만들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그는 인간의 손가락에는 10인치가 태블릿의 최소 크기가 되어야 한다며 이는 다방면의 실험을 거쳐 내놓은 결과라고 밝혔다. 또 태블릿PC 사용자들이 대부분 스마트폰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포켓 사이즈(7인치)가 전혀 필요 없다고 주장했다.

한 마디로 7인치로는 휴대폰으로는 크고, 아이패드와는 경쟁하기 어려운 애매한 크기라고 결론 지었다. 그는 구글조차도 태블릿용으로 프로요가 적합하지 않다고 인정했다는 사실을 언급하기도 했다.


원래 이 자리는 애플의 신제품 발표회가 아니다. 그저 실적을 발표하기 위한 자리일 뿐이다. 또한 아이패드가 예상보다는 약간 낮은 판매량을 기록했다는 소식에 애플 주가가 떨어지는 상황에서 잡스가 적극적으로 대처하기 위해 나왔다. 아이패드의 판매부진은 물량부족으로 주문을 전부 대지 못했기 때문이라 분석된다.

문제는 잡스의 이 말은 애플이 당분간, 어쩌면 영원히 10인치 이하 사이즈의 아이패드를 만들 가능성이 없다는 의미일 수 있다는 점이다. 그동안 7인치 아이패드설이 흘러나온 쪽에서는 그것이 애플의 정확한 정보에 근거한 것이 아니었다. 아이패드를 직접 써보니 조금만 더 작으면 휴대하기 좋겠다는 것과 적정 크기가 7인치 정도라는 짐작이 섞인 희망사항에 불과했다.

애플조차도 7인치 아이패드로 간다고 믿고 있던 태블릿 업계 역시 충격을 받았다. 왜냐하면 그들의 안드로이드 태블릿은 전적으로 아이패드가 뚫어놓은 길을 뒤이어 나가는 전략이었기 때문이다. 애플이 10인치를 고수하는 가운데 다른 업체들만 줄줄이 7인치로 가는 건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 것이다. 갑자기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모바일 태블릿=7인치 라는 공식을 전부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 원인은 잡스의 발언이다. 업계를 내다보고 아이패드를 성공시킨 잡스가 말했으니 뭔가 있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각 기업은 별안간 다시 회의를 열고 기업전략을 수정해야 될 지도 모른다.



스티브 잡스가 태블릿 업계를 지배하는가?

이번 스티브 잡스의 발언은 암묵적으로 점점 표준화에 가까워지는 차세대 주력 태블릿의 화면 사이즈를 다시 모호하게 만들었다. 그 중심에는 삼성의 갤럭시탭이 있다. 갤럭시탭은 가격만 빼면 그 성능과 무게, 배터리 성능에서 아이패드와 좋은 경쟁상대가 되고 있다.

잡스는 이런 갤럭시탭을 비롯한 경쟁 태블릿에 대해 독설을 퍼부어서 병원에 도착하기 전 숨진 환자에 비유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 말에 아직 아무도 반발하지 않았다. 태블릿 업계는 지금 잡스가 혼자 지배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 없다. 데스그립은 어떤 폰에나 있다는 잡스의 발언에 강력히 반발하던 스마트폰과는 양상이 다르다. 아이패드의 행보에 따라 신제품 전략을 다시 수정할 기업은 꽤 많으며 그들은 싫든좋든 잡스의 입만 쳐다보고 있다.


이것은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다. 잡스는 분명 뛰어난 거장이지만 엄밀히 말해서 그는 좋은 CEO일 뿐이다. 화면 사이즈나 사운드 크기 같은 영역에는 보다 많은 공부를 하고 꾸준한 연구를 병행한 전문가들이 있다. 그런 전문가들이 뽑아낸 것이 모바일 기기로서 휴대성과 편의성에서 가장 효율적인 타협은 7인치라는 결론이었다. 이것에 잡스는 뒤늦게 정면으로 반박했다. 잡스는 자기 직감과 회사 연구진을 신뢰하고 있다.

그는 항상 슈퍼 사용자로서 많은 전문가들의 예측을 헛소리로 만들고 자기 예상을 들어맞도록 만들기도 했다. 이번에는 아이패드의 화면크기를 변화시키지 않을 것을 선언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아무도 반박하지 않고, 아무도 논쟁하지 않으려 하는 듯 하다. 과연 스티브 잡스의 판단은 전문가보다 더 올바르고, 설령 틀리다고 해도 옳도록 상황이 조성되는 것일까? 마치 신과 같이?
 
스티브 잡스가 정말로 태블릿의 지배자이고 모두가 그 뒤를 따르는 것만으로 애플의 성공에 숟가락 하나를 올려놓으려 한다면 문제는 아주 쉽다. 그냥 7인치를 포기하고 잡스의 말대로 10인치를 만들면 되는 일이다. 그러나 그것은 업계가 개성이나 자기판단을 포기하고 그저 한 업체에 종속 혹은 편승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는 안된다. 각자가 자기 판단에 믿음을 가지고 <다르게 생각하고> 새로운 것을 시도하며 모험을 해야 한다. 애플이 아이패드를 영원히 10인치로만 만든다 할 지라도 다른 경쟁 업체는 7인치든,6인치든 11인치든 다양한 것을 시험해보고 노력해주기 바란다. 그것이 바로 진정한 경쟁이 아니던가.


그저 스티브 잡스를 말없이 태블릿의 지배자로 인정해주고 그 뒤를 졸졸 따라가는 건 소비자에 대한 배신이다. 나는 다양성을 바란다. 애플 하나의 노선에 모두가 도전을 포기한 통일성을 보고 싶지 않다. 안드로이드 진영은 정말로 스티브 잡스가 태블릿 업계 전체를 지배하길 바라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