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미래를 예측할 수 없다. 그러나 누구나 미래를 궁금하게 여긴다. 그것이 좋은 미래든 나쁜 미래든 말이다. 그래서 인간은 통계를 내고, 확률을 계산하며, 역사를 배운다. 절대로 볼 수 없는 미래를 조금이라도 들여다보고 싶은 욕망 때문이다.

스티브 잡스가 없는 애플이 어떻게 변할 것인가에 대해 많은 전문가들이 추측한다. 일반인들도 흥미있게 여긴다. 더구나 나이도 있고 건강이 별로 좋지 않은 잡스가 앞으로 백살까지 살아서 애플을 이끌고 나갈 거라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건강악화로 인해 애플을 떠날 그날이 조만간 오게 될 거란 사실은 분명하다.


스티브 잡스란 존재가 없는 애플의 모습이란 게 그다지 상상이 안되다보니, 희망적인 낙관과 절망적인 비관이 교차한다. 잡스가 후계자를 준비하고 있다는 말은 있지만 구체적인 행동으로 나타난 바는 없다. 결국 아직까지 잡스는 애플의 모든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세계 모든 회사 가운데 현재 시가총액 2위의 회사가 오로지 한 사람만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건강도 상당히 안좋은 한 사람만 말이다. 놀랍지 않은가?

나는 굳이 잡스가 없는 애플의 장래를 낙관하지는 않지만 굳이 비관적으로 보지도 않는다. 솔직히 잡스가 당장 오늘 은퇴를 발표하더라도 애플이 앞으로 5년 정도는 별 문제없이 굴러갈 것이다.



문제는 그 이후다. 애플에서 근무하다가 퇴사한 전직 직원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지금 잘나가는 것처럼 보이죠. 하지만 앞일은 모릅니다. 잡스가 애플을 떠나고 우리가 두 번만 실패작을 내면 금방 휘청거릴 겁니다.' 라고 말이다. 애플이란 회사가 현재 받고 있는 칭송과 주가에는 그만큼 당장의 실적 이외에도 잡스의 카리스마와 이후 애플 제품에 대한 너무 높은 기대가 숨어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과연 애플이 잡스가 떠난 이후에도 이런 소비자들의 기대를 만족시킬 수 있을까? 나는 최근 벌어진 한 사건에서 어두운 그림자 하나를 보았다. 우선 관련 뉴스를 소개한다. (출처)

애플은 지난 주 새 $299 타임 캡슐을 출시했다. 그러나 프랑스 사이트 Macbidouille의 분해결과에 의하면, 타임 캡슐은 애플 홈페이지에 기록된 선전과 달리 서버급 하드 드라이브를 사용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서버급 하드 드라이브 대신에 새 타임 캡슐에는 소비자급 $80 웨스턴 디지털 Cavier Green 하드 드라이브가 사용되었다.

번역: 클리앙 최완기님

너무 건조하게 쓰인 이 기사만 봐서는 잘 모를 사람이 많을 것이다. 설명해보겠다. 애플은 자사 매킨토시에 쓰이는 백업장치를 '타임캡슐' 이란 이름으로 팔고 있다. 그런데 이 백업 장치를 선전하면서 기업들이 중요 데이터를 보관하고 전송하는 데 쓰이는 전문 서버와 동급의 성능을 발휘한다고 광고했다.


그런데 막상 이것을 뜯어보자, 그 안에는 전문 서버용은 커녕 시중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일반 소비자 저가 하드디스크 가운데서 가장 싸고 성능이 부실한 제품이 들어있었다. 때문에 기술에 대해 좀 아는 사람들은 어떻게 가장 성능이 낮은 하드디스크가 들어간 백업장치가 '서버급' 의 성능을 낼 수 있냐고 지적하고 있다. 이것은 명백한 애플의 과대광고이다.

오죽하면 이것을 지적한 원문 기사의 말미에도 이런 문구가 추가되었다.

Hopefully Apple isn’t filling up North Carolina with these for iCloud.
바라건대 애플이 이 제품을 노스캐롤라이나에 있는 그들의 아이클라우드용으로 쓰지 않기를 바란다.

적당한 유머지만 매우 뼈있는 말이다. 클라우드 서비스에 쓰이는 하드디스크는 도저히 이런 저가 소비자용 하드를 써서는 안된다. 데이터 전송 속도도 느리고 수시로 고장이 나서 데이터가 날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본래 기업용, 서버용 하드 디스크는 비싼 대신 내구성과 전송능력이 뛰어난 제품이다.

그럼 어째서 애플은 이런 과대광고를 했을까? 지나친 의욕이 넘친 것도 있지만, 중요한 건 타임캡슐이란 제품을 비싸게 팔기 위해서다. 다른 애플 제품도 그렇지만 타임캡슐은 애플이란 회사가 주는 믿음과 뛰어난 디자인, 혁신적인 기능이 어우러진 제품이다. 따라서 같은 성능의 동급제품에 비해 훨씬 비싼 가격에 팔리고 있다.


(사진 : 인가젯)

따라서 이런 비싼 제품을 사는 소비자에게 '당신은 다른 싸구려 소비자용 제품과는 다른 제품을 샀습니다. 이건 애플이 특별히 당신을 위해 서버급으로 만든 제품입니다!' 라고 말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애플은 싼 부품을 가지고 최대한 비싸게 팔아서 높은 이익률을 올릴 수 있다. 높은 애플의 주가와 주주배당은 모두가 이런 마케팅 전략의 성공에서 기인한다.


이때까지는 이런 전략에 별 문제가 없었다. 아이폰과 아이패드, 매킨토시 등은 단순한 부품의 가격이 문제가 아니라 애플이 직접 고안한 운영체제와 혁신의 편리함이 잡스의 카리스마와 맞물려 비싼 가격의 값어치를 했다. 소비자도 만족하고 비싸게 샀으며 거기서 얻은 높은 이익률을 유지하는 애플도 행복했다.

그런데 타임캡슐은 다르다. 이 제품은 지금 열이 많이 나고 소음도 심한 편이며, 수시로 고장이 잘 나서 데이터가 날아가는 애물단지로 평가받고 있다. 또한 가장 중요한 점으로 스티브 잡스의 관심에서도 멀어진 상태다. 또다른 애플 직원의 말에 따르면 애플 내부에서는 스티브 잡스의 관심을 받는 부서는 무엇이든 일사천리로 진행되고, 관심을 못받는 제품은 회의만 할 뿐 되는 것도 안되는 것도 없다고 한다.



스티브 잡스가 없는 애플, 무슨 일이 일어날까?

아마도 모든 개인 데이터를 애플의 데이터센터에서 관리하려는 아이클라우드가 최대의 관심사가 된 잡스에게 이제 이런 개인 백업장치 따위는 구시대의 유물이라고 생각될 지도 모른다. 그래서 관심이 없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설령 잡스가 관심을 잃었다고 해도 타임캡슐의 개발과 판매를 맡은 사람들 역시 애플 직원이다. 또한 잘나가는 실리콘 밸리의 인재들이다. 애플에서 일한다는 것만으로도 영광인 그들이 겨우 잡스의 눈길이 잠시 사라졌다고 이런 한심한 제품을 내놓은 것이다. 이건 혁신도 아니고 아무 것도 아니다.

오죽하면 애플을 열심히 옹호하던 사람들도 이 기사 앞에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WD의 캐비어 그린이란 제품은 실제 한국에서 살 수 있으며 그것이 안정성과 성능에서 얼마나 낮은 등급의 제품인지 알기 때문이다. 여기에 감히 '서버급'이라는 광고를 한 애플에 대해 대체 무슨 변명이 가능할까?

나는 굳이 이 사건을 두고 단순히 애플을 나쁘다고 욕하거나 놀릴 생각은 없다. 이건 그저 하나의 헤프닝일 뿐이고 이 제품을 안 사면 그만이다. 또한 타임캡슐은 그다지 일반인이 많이 구입하는 제품도 아니다. 다만 앞서 말했듯이 이 사건이 담긴 의미가 무엇인지를 생각해볼 뿐이다.

단지 잡스의 관심이 좀 멀어졌다. 그것외에는 아무것도 변한 것이 없는데 금방 이렇게 값만 비싸고 허풍만 잔뜩 들어갔으며 성능은 따라주지 못하는 제품을 내놓을 수도 있는 것이 애플이다. 즉 우리가 지금 열광하는 애플의 능력이란 스티브 잡스가 쉴새없이 날카로운 감시의 눈을 번뜩이며 직원들을 채찍질할 때만 나올 수 있다는 뜻이 아닐까?


그렇게 볼 때 앞으로 잡스가 완전히 떠난 상태의 애플이 이런 욕만 먹는 타임캡슐 같은 제품을 또 만들어내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 나아가서 잡스가 없는 애플이 싸구려 부품을 쓰고는 적당히 이름과 디자인만 근사하게 붙인 뒤 값을 비싸게 매긴 아이폰6, 아이패드4를 내놓지 않는다고 보장할 수 있을까?

나는 정말로 그것이 걱정되며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기를 바란다. 왜냐하면 나 역시 애플이 만들어내는 혁신을 너무도 좋아하기 때문이다. 먼 훗날 애플의 역사가 담긴 '타임캡슐'에 '잡스가 떠난 이후에도 애플은 한번도 사용자들에게 실망을 주는 제품을 만들지 않았다' 라고 당당히 적히게 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