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만일 종업원 1만명 이상을 거느린 거대 기업체의 사장이라고 상상해보자.

어느날 당신 앞에 양복이 아닌, 검은 터틀넥 셔츠와 청바지를 입은 남자 한 명이 나타나서 말한다.

당신의 회사에는 혁신이 필요합니다.

남자는 준비해온 서류봉투에서 매끈한 노트북을 꺼낸다. 그리고 뒷주머니에 꽂힌 날렵한 휴대폰을 뽑아서 보여준다.
 
우리는 당신 회사 직원이 보다 쉽고 편하게 업무를 처리할 수 있도록 해 줄 겁니다. 물론 가격은 좀 높습니다. 그러나 직관적인 인터페이스로 인해 직원교육도 쉽고 유지보수도 우리가 책임집니다. 더구나 이 감성적이고 철학이 담긴 인터페이스와 완벽한 디자인을 보세요! 놀랍지 않습니까? 이것이 바로 미래입니다.

그러나 막상 하루하루를 다른 회사와의 피말리는 원가경쟁과 자금 압박에 시달리는 당신은 아마도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혁신? 그래서 그 비싼 돈을 치르고 고작 직원이 좀 편하게 일하게 하라고? 비싼 봉급주고 고용하는 사원이 회사기계에 적응해야지, 왜 내가 게으른 직원을 위해 비싼 돈을 주고 편한 인터페이스를 쓰게 해야 되는데? 디자인? 디자인이 돈 벌어주나? 철학이니 미래니 뜬구름 잡는 이야기야. 그렇게 누구든 간단히 써서 업무를 처리할 수 있다면, 좋아! 당장 우리 회사 경리를 전부 해고하고 내가 그 컴퓨터로 경리보면 되겠나?


특별히 내가 이 남자가 <스티브 잡스>이며 여기서 말한 우리가 <애플>이라는 건 말하지 않아도 이미 전부 짐작했을 것이다.

내가 왜 이런 다소 과장된 상상을 서두에 제시했을까? 그건 바로 아이폰, 더 나아가 애플 제품이 과연 비니지스용으로 성공할 수 있을 지 논하기 위해서다.

미국 스마트폰 시장에서 점유율 1위는 여전히 캐나다 기업 RIM의 블랙베리다. 최근 NPD 그룹의 조사에 의하면 RIM은 36%의 점유율로서 21%인 애플을 여전히 큰 차이로 따돌리고 있다. 이렇게 블랙베리가 1위를 계속해서 유지할 수 있는 큰 이유는 바로 비지니스 시장 때문이다.

애플의 아이폰이 아무리 인기가 많고 구글의 안드로이드폰이 급성장을 하지만 블랙베리를 넘어 설 수 없는 건 여전히 많은 기업들이 블랙베리를 사업 커뮤니케이션 수단으로 선택하기 때문이다. 특히 BES (Blackberry Enterprise Server)라는  기업 업무용 스마트폰 솔루션은 비지니스 시장에서는 블랙베리의 인기를 뒷받침해주는 필수 요소다.

그런데 최근 이런 블랙베리의 비지니스 시장에 아이폰이 파고 들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일반 소비자 시장의 인기를 등에 업고 기업용까지 진출하려는 의도다.
최근 Reuters에 실린 기사에 의하면 75,000명의 사원을 둔 영국 은행인 Standard Chartered에서 회사 커뮤니케이션  수단으로 블랙베리를 버리고 아이폰을 선택했다. 보안과 신뢰를 중시하는 금융기업이 아이폰을 채택했다는 것은 큰 의미라고 평가하는 사람도 있다.



아이폰은 비지니스용으로 성공할 수 있을까?

그러나 내 의견은 부정적이다. 아이폰이 약간의 성공은 거둘지 모른다. 하지만 결국은 애플이 가진 한계로 인해 비지니스 시장에서 실패할 것이다. 그 이유를 하나씩 진지하게 생각해 보자.

1. 애플은 소비자 지향 회사다.
흔히 애플의 장점을 이야기할 때 소비자에게 친근하고 소비자를 생각하는 기업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말은 장점인 동시에 단점이 된다. 바꿔서 말하면 이른바 B2C에 강한 반면 B2B라는 기업시장에는 무관심하거나 소홀하다는 이야기가 되기 때문이다.

사실 애플은 업무용으로 성공했던 경험이 있다. 스티브 워즈니악이 만든 애플2 컴퓨터는 소비자를 상대로한 개인용으로는 어느 정도의 판매량을 보였지만 최초로 본격 업무를 볼 수 있는 소프트웨어인 <비지칼크>가 개발된 후 엄청난 판매증가를 경험했다. 그것이 애플의 성공을 뒷받침했다.

그렇지만 스티브 잡스가 기업용으로 내놓은 리사는 1만달러의 고가와 결함으로 실패하고는 매킨토시는 아예 개인용으로만 판매전략을 취했다. IBM PC의 획일적인 인터페이스와 효율 위주의 철학을 비웃는 데는 성공했다. 하지만 그것은 곧 기업체에게 애플은 비지니스용이 아니라는 선입관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2. 애플의 운영체제는 폐쇄성을 지향하고 있다.
폐쇄적이라고 나쁜 건 아니다. 폐쇄와 개방은 결국 사용자를 위한 방향선택일 뿐이다. 소비자에게는 애플의 적당한 통제와 폐쇄정책은 많은 장점으로 다가온다. 하지만 표준과 자료호환, 유지보수가 중요한 기업시장에서 애플의 폐쇄성은 결코 장점이 될 수 없다.


기업시장을 지배하는 운영체제는 IBM등 오랜 시간 굳건한 신뢰성을 쌓아온 기업들이 쓰는 유닉스이거나 유닉스에서 파생되어 소스가 공개된 리눅스 계열이다. 하지만 매킨토시 운영체제나 여기서 갈라져나온 아이폰의 iOS는 시간을 두고 신뢰성을 검증받은 적도 없고, 소스도 공개하지 않았다. 문제가 생기면 무조건 애플에서 조치를 취할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데 그런 운영체제와 하드웨어를 과감히 채택하는 데는 큰 용기가 필요하다.
 
3. 애플 제품이라고 특별히 해킹이나 바이러스에서 안전하지도 않다.
최근 아이폰과 PC를 싱크해주는 아이튠즈의 계정이 해킹당했다. 애플을 옹호하는 쪽에서야 그저 취약한 윈도우 PC의 문제점으로 인해 뚫렸을 뿐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 그러나 현재 맥과 아이폰을 같이 쓰는 사용자가 몇 퍼센트나 될까? 윈도우용 아이튠즈도 애플에서 만든 것인 만큼 책임을 벗어날 수는 없다.

특히 비지니스용 솔루션을 팔아야 하는 입장에서 이런 사고는 치명적이다. 방법이야 어쨌든 만에 하나라도 고객정보가 해킹당할 수 있다면 금융기관의 개인 계좌번호와 비번이 넘어가 수백만, 수억달러가 넘어갈 수도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런 우려를 지우지 못하는 비지니스 업체에 대고 아무리 아이폰과 매킨토시의 편리한 사용자 환경과 미려한 디자인, 독특한 감성을 선전해봐야 소용없다. 내가 사장이어도 그런 불안의 여지가 있는 솔루션을 앞장서 고가에 구입한다는 결정은 내리지 않는다.

물론 지금 최고라고 말해도 좋을 정도로 잘 나가는 애플과 아이폰에게는 굳이 비지니스 시장까지 반드시 성공해야겠다는 생각이 필요없다. 기업에게 팔지 못한다고 애플이 무슨 손실을 입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역대로 애플은 비지니스 시장에 공을 들였다. 소비자는 유행에 민감해 금방 기기를 바꾸지만 기업은 한번 신뢰하면 오랫동안 써주기 때문이다. IBM의 굳건한 지위는 바로 그런 신뢰에 바탕하고 있다.

스티브 잡스는 빅맥 전략을 통해 매킨토시에 유닉스 형태 운영체제를 얹어 기업시장에 공급하려고 했으며, 애플 서버를 통한 솔루션을 공급하기도 했다. 비지칼크의 성공으로 한때 세계 PC 시장 점유율 30프로를 넘는 기염을 토한 애플2의 영광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기업용 시장에서 애플의 입지는 너무 좁다. 안정되고 단단하면서도 적당한 가격의 유닉스라는 유료 솔루션과 아예 공짜인 리눅스 솔루션 사이에서 고가정책을 취할 수도 없고, 상대적으로 싸다고 메리트를 제시할 수도 없다. 그렇다고 유닉스만큼의 실적도 안정성도 보장하지 못한다.


이런 이유로 인해 아이폰을 비롯한 애플 제품은 비지니스용으로 성공할 수 없다. 그것은 애플이 가진 장점의 다른 면이 단점이 되어 압박하기 때문이다. 서두에 썼듯이 스티브 잡스가 아무리 직접 찾아와서 마법을 부린다고 해도 그것은 바꿀 수 없다.

기업은 혁신보다는 안정성을 원한다. 비지니스는 감성보다는 이성과 합리성을 중시한다.

이것이 바로 아이폰을 비롯한 애플 제품이 비지니스용으로 성공할 수 없는 근원적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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