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크로드란 말을 들으면 무엇이 떠오를까. 대부분은 사막과 낙타, 그리고 대상들이 비단을 싣고 이동하는 광경을 떠올릴 것이다. 좀 더 아는 사람은 매우 클래식한 어떤 음악을 떠올릴 수도 있다. 그렇지만 여기서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을 떠올리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다. 학창시절 잠시 역사교과서에서 흘려듣던 문구를 제대로 의미있게 기억하는 사람이 드물기 때문이다.



신라승려인 혜초가 지금의 인도인 천축국과 당나라를 포함한 중앙아시아와 서역을 거쳐서 이 실크로드를 발로 돌아다니며 쓴 기록이 바로 왕오천축국전이다. 불교가 국교도 아니고, 비단이 그리 의미있는 직물도 아니며, 돈이 되지 않는 학문적 테마에 관심이 현저히 떨어지는 현대의 한국에게 있어 왕오천축국전은 그래서 그다지 알려지지 않았는 지 모른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리는 실크로드전은 비록 아직은 금전과 시간적 여유가 없어 가보지 못하지만, 언젠가는 가고 싶은 진짜 실크로드를 대신해 가상경험을 할 수 있는 기회였다. 그러기에 이 전시회를 기꺼이 찾았다. 이번 전시의 테마 역시 '혜초와 함께하는 서역기행이다.



실크로드는 본래 처음에는 중앙아시아와 중국, 페르시아를 연결하는 다소 좁은 교역로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그러나 연구가 많이 이뤄짐에 따라 세 갈래 길로 나눠지고 길이도 연장되어 한쪽으로는 신라의 경주에 이르고, 다른 한쪽으로는 안티오크까지 이른다. 일본의 나라지방까지도 실크로드로 치는 견해도 있다.


승려인 혜초는 그럼 왜 이 실크로드를 걸었던 것일까? 불법의 본고장과 중간 지역을 보고 들음으로서 견문과 학식을 넓히기 위한 목적이다. 보통은 비단장수들이 서방과 중국 사이를 오가며 엄청나게 비싼 비단을 팔아 돈을 벌기 위한 목적이었지만 말이다.


우리에게 유명한 작품 서유기에서도 이 길 가운데 서역북로라 불리는 길을 소개하고 있다. 삼장법사가 손오공을 데리고 요괴를 무찌르고 불경을 가지러 갔던 이 곳은 타클라마칸 사막 북쪽, 천산산맥 남쪽 오아시스, 도로를 연결하는 길이다. 혜초가 직접 지났던 길이기도 하다.



실크로드의 문화를 살펴보면 당시 동서양의 문화가 적절히 섞여 있는데 로마십자가는 이를 정확히 보여준다. 중국인이라기 보다 페르시아인에 가까운 얼굴모양 두상도 발견된다. 유목민족이라서 모든 재산을 몸에 지니고 다니려 하기 때문에 거대한 어떤 것보다는 부장품 위주로 발견되는 문화재들의 특성이 재미있다.



동양의 익숙한 용과 서양에서 익숙한 사자 문양이 섞인 장식이다. 동양이라면 사자 대신 호랑이가 들어갔을 것이고, 서양이라면 이런 용이 아니라 뚱뚱한 도마뱀 모양의 드래곤이 들어갔을 것이다.



중국 외 지역으로 최초 비단 생산지인 호탄에 얽힌 이야기는 참 재미있다. 중국에서 공주를 왕비로 맞아들이면서 '우리나라는 비단을 만들수 없으니 입고 싶으면 공주가 직접 만들어 입어야 한다.' 라고 하자 공주가 마치 문익점처럼 머리장식에 뽕나무 종자와 누에고치를 가지고 와서 비단을 생산했다고 한다. 훈훈한 미담일 수도 있지만 '여자의 사치욕이란 자기 나라도 배신하게 만드는 건가?' 라는 교훈도 주는 것 같다. 역시 보는 관점이 중요하다.


비단이 워낙 비싼 물건이고 그 과정에서 수입하는 경로가 길어지니, 당연히 중간 상인들이 이익을 보았다. 중계무역을 하는 소그드인은 엄청난 부를 축적했다. 자식이 태어나면 입에 꿀을 먹이고 손에는 아교를 묻힌다. 달콤한 말로 손님을 유혹하고, 손에 들어온 돈은 놓지 말라는 의미다. 어떤 의미로 장사의 비법이긴 하지만 무섭다.


사막에 묻힌 미녀의 미이라는 여러가지 생각을 하게 한다. 저렇게 원형이 잘 보존된 미이라는 당시 사람들의 골격과 체형, 미모까지 나타내는 좋은 자료가 된다. 나무로 만든 가짜 미라는 행방불명된 사람 등의 묘에 넣는 가짜시체로서 농경민족이 아닌 특성으로 타지에서 위험하게 죽는 경우도 있음을 보여준다.


재미있는 도구 가운데 구리로 만든 안대가 있는데 작은 구멍을 통해 밖을 볼 수 있다. 빛의 양을 줄여 눈부심을 막아주는 도구다. 한마디로 유리와 렌즈 기술이 없던 옛날의 선글라스다.

복스러운 얼굴의 미인과 흑인을 상징하는 조형물은 당시에 다양한 문화가 흘러들어왔음을 보여준다. 미의 기준은 역시 세월과 지역에 따라 차이가 있는 모양이지만 흑인이 그저 재주부리는 사람으로 묘사된 점은 세월과 지역에도 불구하고 현대와 비슷한 점도 있는 듯 해서 미소를 자아낸다.


사막이나 척박한 땅에 사는 사람들이라 무척 가난하고 문화도 없을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이들의 화려한 생활을 그린 그림이나 부장품, 도구등을 보면 농경문화와 특성차이만 있을 뿐 상당한 부를 가지고 좋은 생활을 했다는 걸 알 수 있다. 불교와 각종 정신문화가 그저 가난한 곳에서 발전할 수는 없으니까.


종교순례처럼 이 곳을 왕래한 혜초는 신라의 경주에서 뱃길로 천축국에 간 다음 거기서 티벳을 거쳐 북서쪽을 지나갔다. 그리고 서쪽에서부터 동쪽으로 중국의 장안까지 왔다. 그 과정에서 보고 들은 문물을 비망록처럼 적어둔 것이 바로 왕오천축국전이다. 이런 실천적 노력 때문일까. 그는 당시 당나라의 밀교에서 일가를 이룬 것으로 학문수준을 높이 평가받았다.



왕오천축국전은 분명한 한국의 문화재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소유는 프랑스국립 도서관이다. 또한 이것은 약탈문화재가 아니기에 반환요구를 할 수 없다. 처음부터 혜초가 신라에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중국땅에 남기고 죽었기에 중국 소유였지만, 열강의 침략과정에서 이 문화재의 가치를 알아본 프랑스인이 당시 소유주처럼 되어있던 중국의 왕도사에게 구입했다. 아쉽지만 문화재란 그 가치를 알아보고 관리해온 사람이 주인인 법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니 앞으로 우리도 교훈으로 삼아야겠다.



박물관에서 혜초와 실크로드를 걸어보다.

역사에는 가정이란 없다. 하지만 우리는 후손으로서 당연히 만약이란 상상을 할 수 있다. 만일 혜초가 당에 머물지 않고 신라 경주로 돌아왔다면 하고 상상해보자. 실크로드전은 이런 상황에서 혜초의 마지막 여정인 신라의 유물도 전시하고 있다. 실크로드 가운데 우리도 종착지로서 있음을 어필하려는 의도다. 아마 일본이었다면 자기들 지역인 나라의 유물까지 포함해 넣었을 것이다.



이번 실크로드전은 요즘 각종 스마트폰과 태블릿등 첨단 기기를 접하며 너무 미래만을 봐온 나에게 과거를 돌아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사실 지금 내가 말하는 미래도 백년뒤 내지 이백년 뒤에는 다시 과거가 된다. 천년 후에는 다시 박물관에나 전시될 유물과 유적으로 남을 지 모른다. 시간의 유구한 흐름과 그 가운데 살아가는 인간의 숨결을 느낄 수 있었다.



직접 실크로드를 가서 보는 것이 최선이겠지만 이렇게 박물관에서 혜초와 함께 가상으로 실크로드를 걸어보는 것도 좋은 경험이다. 설령 역사지식이 좀 부족해도, 관심이 적더라도 우리에게 다소 생소한 지역의 문화를 호흡하고 즐길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가치있는 일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