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어릴 때의 경험은 성장기에만 영향을 주는 것이 아니다. 그 사람의 인생 전체에 커다란 영향을 준다. 예컨대 애플의 창립자 스티브 잡스가 성장하던 1980년대는 일본 전자업체의 전성기였다. 워크맨을 비롯해 경박단소를 앞세운 일본 전자제품은 전세계를 강타했다. 소니와 파나소닉 전자제품은 그 당시 가지고 싶은 전자제품의 대표적 브랜드였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아마도 지금의 청소년들은 일본전자제품에 대해서 별 감흥을 받지 못할 듯 싶다. 음악을 들을 때, 휴대폰을 쓸 때 일본의 브랜드는 어디서도 힘을 쓰지 못한다. 하다못해 각 가정에 놓은 텔레비전도 일본 브랜드는 거의 없어지고 있다. 소니 전자제품을 쓴다고 선망의 눈으로 쳐다보는 일 따위는 완전히 사라졌다.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일까? 그리고 이런 일은 굳이 일본에만 해당되는 것일까? 한국 역시 이런 현상에서 어떤 교훈을 얻어야 할까?


얼마전 주간조선에서 전화를 받았다. 일본 전자업계의 고립 현상 - 일명 갈라파고스 현상에 대해서 인터뷰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인터뷰 결과가 '잘라파고스' 란 단어로 압축되어 기사로 나왔다.(출처)



재팬+갈라파고스’을 뜻하는 합성어인 ‘잘라파고스’는 원래 좀처럼 외연을 넓히지 못하고 고립되는 일본 전자·IT 분야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전자·IT 분야는 자동차와 더불어 일본 경제를 지탱해온 양대 축이었다. 기본적으로 기계제품인 자동차에 비해 전자·IT 분야는 변화의 속도가 빠른 편이어서 적응력이 중요하다. 그러나 일본은 제조업 지상주의에 빠져 전자·IT 분야에서 적응장애 현상을 보이고 있다.


소니, 파나소닉 등 일본 전자기업이 세계 정상의 위치를 점할 수 있었던 것은 혁신적인 기술 개발 덕분이었다. 1979년 개발된 소니의 ‘워크맨’은 소니와 일본 경제를 성장케 한 원동력이었다. “시장은 없다, 다만 창조되는 것이다”는 소니의 창업주 모리타 아키오 회장의 일성은 당시 창의적이고 자유로운 소니의 기업 분위기를 대변하는 말이었다. 그러나 채 20년이 지나지 않아 워크맨은 시장에서 사라졌다. 1999년 9340억엔에 달하던 워크맨 매출액은 2008년 4539억엔으로 반토막 났다.

   

   전문가들은 소니의 위기, 나아가 일본 IT·전자 업계의 위기는 자초한 측면이 크다고 지적한다. 안병도 IT평론가는 “1970~ 1990년대 일본 IT·전자 기업의 전성기에는 선순환이 이뤄졌다”고 설명했다. 튼튼한 내수시장 덕분에 기업들이 일본 내에서도 치열하게 경쟁하다 보니 다양한 기술이 개발됐다. 까다로운 소비자들의 검증을 거친 제품이 해외시장에 나가 성공할 가능성도 컸고, 다시 기술 개발을 촉진시킨 것이다.


그러나 2000년대 들어 상황은 변했다. 안정적인 내수시장에 안주하는 기업이 늘어났다. 병도 평론가는 “발달한 기술 수준에 대한 높은 자부심도 일본의 고립을 가속화했다”고 설명했다. ‘기술 선진국’으로서 일본 엔지니어들은 새로운 기술이 개발되면 그대로 수입해 쓰지 않는다. 호황기를 거쳐 다양해진 일본 소비자들의 입맛에 맞게 변형시킨다. 대표적인 사례가 이동통신 방식이다. 1세대부터 국제 표준과는 다른 독자 방식을 사용했다. 1세대 HiCAP 방식이나 2세대 PDC 방식은 일본을 제외하고는 거의 쓰지 않아 일본 IT·전자 기업들은 수출용 휴대전화를 따로 만들거나 만들지 않기도 했다.

  




   다양해진 소비자 취향에 바탕을 둔 안정적인 내수시장과 기술 수준에 대한 자부심이 맞물려 여러 분야에서 일본에서만 유행하는 제품들이 쏟아져 나왔다. 소니가 내리막을 걷게 된 것도 워크맨을 대체할 새로운 휴대 음악기기를 잘못 선택한 탓이 크다. 애플이 아이팟을 발표하고 MP3 플레이어가 출시되던 무렵, 소니가 힘을 쏟은 것은 MD 플레이어였다. 일본에서 유독 인기였던 MD 방식을 믿고 세계적 흐름을 외면하다가 애플에 밀리게 된 것이 소니의 패인이었다.


영상·방송기술 분야에서도 마찬가지다. 안병도 평론가는 “HD 방송기술 방식도 유럽과 미국에서 자주 쓰이는 DVB-T, ATSC 방식이 아니라 일본 특유의 ISDB-T 방식을 쓴다”고 소개하고 “DVD, 지상파 DMB 기술도 일본 방식을 고집하기 때문에 세계시장에 쉽게 진출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이전에 내 기사를 읽은 기자는 일본이 이런 잘라파고스 현상을 맞은 근본이유에 대해서 물었다. 나는 그것이 결국 일본의 뿌리깊은 '기술 우월의식' 에서 나온 것이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일본의 기술 수준은 매우 높았다. 그래서 그런 기술수준이 제대로 선순환을 일으킬 때는 자부심이라 표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일본의 기술수준은 계속 유지되지 못했다. 실질적인 기술이 뒤지게 되자 껍데기만 남은 자부심은 그냥 '우월의식'으로 변해버렸다.  


일본이 기술수준에서 뒤쳐지게 된 이유는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변한 패러다임에 재빨리 적응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지금도 그나마 일본이 세계에서 브랜드를 유지하는 분야는 보자. 음향기기 일부, 카메라, 광학, 의료기기 등이다. 이 부분의 공통점은 완벽하게 디지털로 바뀌지 않았고 앞으로도 바뀌기 힘든 분야라는 점이다.


그럼 왜 일본은 이런 변화에 실패했을까? 이 기사에서는 일본의 국가전략 실패에서 이유를 찾는다.




딜로이트컨설팅 김경준 대표이사는 “일본의 갈라파고스화는 국가전략이 실패한 것을 의미한다”며 “일본은 건설, 금융, 유통 등은 개방하지 않고 만만한 부문만 개방하는 이중구조를 갖고 있었는데 이것의 폐단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예전과 달리 요즘 일본은 세계적 히트작이 없다. 일본에 가면 일본인들이 일본 제품만 쓰고 있는데 다른 나라 사람이 보면 전혀 매력적이지 않다”며 “일본의 갈라파고스화는 한국이 넛크래커(nut-cracker)를 벗어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말했다.


결국 일본의 전자업계가 세계적 변화의 흐름을 외면하고 개방하지 않았던 것을 원인으로 꼽는다. 그런데 이렇게 개방을 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앞서 내가 말했던 대로 자국 기술이 높다는 우월감 때문이다. 기술이 높으니까 개방을 하지 않고, 개방을 하지 않으니까 계속 자기 기술이 최고인 줄 안다는 우스운 현상이 벌어진 것이다.





잘라파고스 현상이 한국에 주는 교훈은?


문제는 이런 잘라파고스 현상으로 그저 일본을 비웃을 일이 아니란 점이다. 여기서 한국이 어떤 교훈을 얻지 못한다면 한국 역시 같은 길을 걷게 될 것이다.


일본의 잘라파고스 현상은 기술적 우월감에서 비롯되었다. 그리고 그런 우월감은 실제로 일본이 최고의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는 성공담에서 비롯된다. 즉 실제로 성취한 성공이 가져온 그림자란 것이다. 일본 역시 그 성공을 이루기 전에는 도전자의 입장에서 치열하게 도전했다. 성공을 거두고 세계가 일본은 찬양하고 동경하자 기술적 자부심이 생기고 그것이 엔지니어와 경영자 사이에 정착되자 변화를 가로막은 벽이 된 것이다.

 

지금 한국 역시 일부 분야에서 최고의 성공을 거두고 있다. 메모리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부문에서는 이제 경쟁자가 거의 없다. 스마트폰에서 삼성은 세계 1위의 점유율을 차지했다. 이런 성공에 힘입어 새로운 IT영역에서 정부가 주도해야 한다든가 국가표준을 정하자는 움직임도 많다. 나아가서 우리가 세계 표준을 주도해서 엄청난 수입을 얻자는 목소리도 있다. 기술적으로 우리가 뛰어나다는 자부심의 결과다.



이것이 조금만 잘못되면 바로 일본의 전철을 밟게 되는 것이다. 특별히 일본이 우둔해서 잘라파고스 현상에 빠진 것이 아니다. 잘라파고스 현상은 성공이 가져다 준 위험요소이다. 그것은 피해갈 수 있는 방법은 끊임없이 배우고 도전하려는 자세다. 부디 한국 전자업계가 이런 자세를  잃지말고 혁신을 이룩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