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 어려운 말을 하나 해보자. ‘언어의 인플레이션’이란 것이 있다. 처음에는 비교적 품격있고 존중해주는 말이었는데 너도나도 그것을 쓰면서 흔해져서 품격은 떨어지고, 나중에는 존중의 의미조차 사라지며 심지어는 욕설이 되기도 한다.


심청전에 나오는 심봉사를 생각해보자. 봉사는 원래 일종의 벼슬이다. 그런데 주로 장님에게 주던 이 벼슬이 그냥 장님을 가리키는 단어가 되었다가 나중에는 앞못보는 사람에 대한 비하명칭으로 의미가 변했다.

한국에서 현재 블로거라는 단어가 조금씩 부정적 의미를 내포하게 되었다는 건 그래서 안타깝다. 또한 인지도와 힘을 갖춘 파워블로거란 단어조차도 최근의 베비로즈 사건을 계기로 부정적 의미가 생겼다. 그러다보니 일부는 스스로를 블로거가 아닌 저널리스트라고도 하고 칼럼니스트라고 칭하기도 한다.

이렇게 명칭을 바꿔서 차별성을 보이려하지만 사실 명칭만으로는 그다지 오래가지 않는다. 행동이 달라지지 않으면 곧 그 단어조차도 인플레이션에 휘말려 버리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미국에서 나온 한 가지 뉴스가 주목을 끈다. (출처)


미국 오리건 주의 한 판사가 투자회사에 관한 글을 쓴 블로거에게 저널리스트가 아니란 이유로 250만달러 벌금형을 선고해 논란이 일고 있다.



12월 7일(현지시간) 시애틀위클리 보도에 따르면 오리건 지역법원의 마코 헤르난데즈 판사는 이날 "몇 개의 블로그를 운영하고 있는 크리스탈 콕스는 저널리스트들과 같은 법적인 보호를 받을 권리가 없다"고 판결했다.



헤르난데즈 판사의 이번 판결에 관심이 쏠리는 것은 그 동안의 판례와 다소 다르기 때문이다. 최근 수 년 동안 미국 법원은 블로거를 저널리스트로 인정하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져 왔다. 오리건 주 바로 옆에 위치한 워싱턴 주의 지방 검사 브루스 존슨 법정 변호사는 시애틀위클리 측에 "같은 사건이 워싱턴 주에서 발생했다면 이곳 언론인보호법은 아마도 콕스를 보호했을 것이다"고 전했다.



한편 지난해에는 IT전문 뉴스 사이트인 기즈모도(Gizmodo)가 유사한 사건으로 형사고발 당했다가 무죄로 풀려나 세간의 이목을 끈 바 있다. 당시 기즈모도는 아이폰 시제품을 술집에서 분실했다는 소식을 전해 존 첸 기즈모도 편집장이 자신의 집에 덮친 경찰에 체포되기도 했다. 하지만 캘리포니아주 언론인 보호법에 따라 풀려날 수 있었고 그 이후 지금까지 누구도 기즈모도에서 보도한 내용을 상대로 고소하지 않았다.


이 뉴스를 단순히 보면 간단하다. 주에 따라 법이 다른 미국의 체제다. 때문에 오리건 주는 블로거를 저널리스트로 인정하지 않고, 바로 옆에 있는 워싱턴 주는 인정한다는 것 뿐이다. 하지만 조금 깊이 보자. 저널리스트라는 건 대체 무엇인가? 적어도 대의명분으로는 공공의 이익을 위해 진실을 밝히려는 정신을 가진 직업군을 이야기한다.



한국의 블로거는 저널리스트인가?
 
저널리스트가 단순히 법에 규정하는 어떤 것에 얽매이는 것이 아니라면 그 본질은 분명하다. 저널리즘이라고 말하는 정신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저널리즘이란 권력, 금력,  폭력을 포함한 부당한 힘에 굴복하지 않고 약자의 편에 서며, 진실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분히 이상적인 히포크라테스 선서와도 비슷하지만 어쨌든 방향은 이쪽으로 향해야 한다.

그렇다면 한국의 블로거는 어떨까? 과연 저널리스트일까? 1인 미디어를 표방하는 블로거도 있고, 칼럼리스트나 저널리스트를 표방하는 블로거도 있다. 그 중에는 현직 기자나 언론인도 있다. 하지만 블로그만으로 볼 때 진정으로 저널리즘을 내세우며 글을 쓰고 올리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다. 아직은 얽매이기 싫어하고 가볍고 재미있는 글을 추구하는 경우가 많다. 그것이 잘못됐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언젠가는 한국의 블로거도 보다 높은 곳을 바라보게 될 날이 온다. 미국의 블로거가 지금 뉴스에서 맞닥드린 고민은 얼마후 우리에게도 찾아오게 된다는 뜻이다. 그나마 미국은 많은 블로거가 언론에 못지않는 질 좋고 날카로운 글을 써내고 있기에 인정을 받고 있다. 그런데 과연 한국 블로거는 법원에서 저널리스트로 평가하거나 혹은 평가하지 않을 정도로 가치있는 존재가 될 수 있을까? 내가 심히 안타깝게 여기는 점은 바로 이것이다.


미국의 경우에도 사실 저 판결은 모순을 내포하고 있다. 만일 블로그를 정식 언론으로 인정하지 않아 저널리스트가 아니라면 그곳은 그저 사적인 공간이니 명예회손죄가 성립되기 어렵다. 반대로 저널리스트로 인정한다면 공적 공간이라 명예를 훼손할 수는 있지만 공공의 이익을 위한 보도가 되기에 보호받는다. 

한국의 블로거가 저널리스트라고 칭한다고 해도 명예로운 행동이 쌓이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그렇게 되면 단지 저널리스트란 단어가 점점 인플레이션 되서 흔하거나 멸시의 의미까지 가진 것으로 변할 것이다. 최근 나는 꼼수다가 메이저 언론에서도 나오지 않는 특종을 터뜨리며 승승장구하고 민주언론상까지 받았다. 스스로의 노력에 의해 팟캐스트란 개인적인 방송을 언론의 영역으로 한국에서 인정받은 것이다. 한국의 어떤 블로거가 주요 미디어보다 빠르고 좋은 글을 써서 저널리스트로 인정받을 수 있을까? 

마지막으로 저 뉴스의 마지막 부분을 보자.

 

매셔블 보도에 따르면, 기즈모도 사건 당시 스티브 잡스 전 애플 창업자 겸 최고경영자(CEO)는 월스트리트저널의 월트 모스버그와의 인터뷰에서 존 첸을 저널리스트로 인정하지 않는다고 언급했다. 이에 모스버그는 잡스에게 블로그 역시 저널리스트라고 생각한다며 그 자신도 블로거라고 말했다.

이번에는 한국의 기자와 주요 언론인에게 묻고 싶다. 미국은 결코 블로그를 무시하지도 멸시하지도 않는다. 한국의 기자나 주류 언론인은 과연 현재 한국의 블로거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여전히 우월함과 특권의식에 젖어있지는 않는가? 그런 생각을 하는 언론인은 자기가 ‘블로거 월트 모스버그’보다 뛰어나다고 생각하는가? 나는 한국에서 블로거와 저널리스트가 좋은 의미로서 같다고 인정받는 그 날이 오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