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에 두 가지 이야기가 있다.


사람은 누구나 미지의 것에 호기심을 느낀다. 그리고 그것이 가진 매력에 빠진다. 신대륙에서 유럽에 전해진 감자는 유럽의 식문화 그 자체를 바꿔놓았다. 한랭지에서도 잘 자라는 감자는 그때까지 만성적인 식량부족에 시달리던 많은 나라의 인구를 증가시켰다. 독일은 식량자급을 이룩했고, 영국은 주식이 바뀌었다. 사탕수수는 많은 곳에서 환영받았으며, 담배는 많은 사람들을 중독시켰다.


스마트폰중독



사람은 누구나 미지의 것에 두려움을 느끼며 배척한다. 카메라가 처음 들어왔을 때 많은 국가에서는 사진을 찍히면 영혼을 빼앗긴다고 해서 두려워했다. 외계인을 의미하는 미확인비행물체에서 사람들은 친근감보다는 두려움을 느낀다. 외계인이 지구를 침략하는 H. G 웰즈의 '우주전쟁'은 쉽게 사람들이 읽었다. 지금도 우리는 각종 인공감미료나 유전자조작식품이 무해하다고 해도 본능적으로 거부한다.


지금 우리에게 있어서 스마트폰이 바로 이런 두 가지 이야기의 근본이 되고 있다. 본격적인 사회문제로서 스마트폰 중독이란 말이 언론에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출처)


스마트폰중독



국내 스마트폰 가입자 3000만 명 시대. 스마트폰 때문에 가족 갈등과 마음고생을 겪는 이가 비단 K씨뿐일까. ‘국민 애플리케이션’(앱) 카카오톡을 비롯한 모바일 메신저를 통해 무제한으로 주고받는 문자, 트위터와 페이스북 같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의 거미줄처럼 촘촘히 엮인 인간관계, 수업시간 중 스마트폰 반납을 둘러싼 초중고교 학생과 교사 간 실랑이, 버스와 지하철, 엘리베이터는 물론 얼굴 보자고 모여 앉은 회식 자리에서조차 각자 손바닥을 향하는 시선…. ‘


스마트 혁명’이 급물살을 타는 정보기술(IT) 강국 대한민국의 오늘은 온통 ‘고개 수그리’ 모드다. 소통과 공감을 원하면서도 ‘함께’이면서 ‘따로’인 세상이다. 


흔히 인터넷 중독은 ‘인터넷 사용에 대한 금단과 내성을 지니며 이로 인해 일상생활에 장애가 유발되는 상태’를 일컫는다. 스마트폰 중독도 별반 다르지 않다. 스마트폰 사용 시 스스로 조절능력을 잃고 과다하게 사용함으로써 일상생활에 문제를 일으키는 상태를 중독으로 정의할 수 있다.


스마트폰 도입 초기 미국에서 ‘크랙베리’(crackberry·코카인 일종인 크랙과 스마트폰 블랙베리의 합성어)라는 신조어가 등장한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이처럼 마약에 비견할 만큼 중독성이 강하다 보니, 충동 억제와 통제력 면에서 성인보다 취약한 청소년과 유아나 아동에게 끼치는 스마트폰의 영향은 자못 심각하다.


스마트폰중독



인터넷 중독보다 스마트폰 중독에 더 쉽게 빠지는 까닭은 뭘까. 엄나래 한국정보화진흥원 인터넷중독상담센터 책임연구원은 “개인용 컴퓨터(PC)에 비해 훨씬 용이한 접근성과 휴대성, 출퇴근시간이나 심야에도 장시간 무한소통이 가능한 스마트폰의 특성과 사용 패턴이 사용자를 더 심각한 중독에 노출되게 하는 주원인”이라면서 “모바일 메신저나 애니팡 같은 게임을 통한 사회적 관계 형성에 대한 욕구도 중독성을 높인다”고 분석한다.


신동원 성균관대 의대 정신건강의학교실 교수는 “소아나 청소년의 경우 스마트폰 자체가 문제라기보다 부모의 맞벌이, 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ADHD), 우울증, 가정불화 등이 스마트폰 중독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면서 “10세 미만까지는 스마트폰을 뺏는 방법만으로도 중독에서 벗어날 소지가 높다. 금단증상이 나타나더라도 3주 정도면 책읽기나 다른 놀이를 통해 스마트폰 외의 자극을 찾아 활동할 수 있게 된다”고 설명한다.


신 교수는 또한 “청소년기엔 뇌 구조적으로 충동을 잘 조절하지 못하기 때문에 스마트폰으로 인한 주변과의 갈등이 심하다”면서 “이 시기엔 스스로 바뀌어야겠다는 내적 동기가 필요하므로 중독에서 벗어나기까지 1년 이상 걸리기도 한다”고 덧붙였다. 결국 ‘디지털 마약’엔 아날로그적 표현방식인 진심어린 대화가 스마트한 디지털 디톡스(Detox·해독) 구실을 하는 셈이다. 


다소 과격한 표현을 좋아하는 언론의 특성을 고려하더라도 벌써부터 스마트폰 중독을 '마약'이라고 까지 비유하는 건 주목할 만하다. 그것은 내가 서두에서 이야기한 인간의 두 가지 특성이 함께 작용하기 때문이다. 스마트폰을 처음 보게된 세대 가운데 기술에 개방적인 젊은 세대는 이것에 호기심을 느끼고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 매력에 완전히 빠졌다. 하지만 반대로 아직 기술을 두려워하는 세대는 이것에 거부감을 느끼면서 본능적으로 두려움을 느낀다.


스마트폰중독



이전에 탤런트 박상원이 방송에서 스티브 잡스가 인류에 재앙을 가져다 주었다는 말을 한 것이 화제가 되었다. 이 말을 둘러싸고 박상원에 대해 극단적인 반발을 하는 것도 별로 바람직한 것은 아니다. 예컨대 박상원은 새로운 기술이 가져다준 현상을 받아들일 준비가 안된 사람에 불과하다. 그가 잡스와 스마트폰을 욕한다고 해서 그 가치가 줄어드는 것도 아니고, 정책결정권자도 아닌 탤런트의 입장이 그리 중요한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그가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는 좀 생각해보아야 한다.


스마트폰 중독, 진정한 해법은 어디에?


중요한 것은 새로운 기술이 우리 생활속에 완전히 녹아들지 않았다는 것이다. 어디서든 마구 쓴다든가, 무조건 배격하는 것이 바로 그 예이다. 담배가 처음 우리 땅에 전해졌을 때 왕과 신하, 어른과 아이가 맞담배를 마구 피웠다고 한다. 한번도 본 적도 없는 물건이니 그에 대해 예법이나 에티켓이 성립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담배가 완전히 생활속에 정착한 뒤 어디서는 피워도 되고, 어떤 방식으로 피는 것이 적합하다는 사회적 공감대에 의해 예법이 생겼다.



스마트폰중독



스마트폰 중독 역시 마찬가지다. 술이나 담배 등과 같이 어떤 예법이나 공감대를 만들어야 한다. 우리가 공공장소에서 핸드폰 벨소리를 진동으로 하거나 전원을 끄는 예의를 만들어낸 지도 얼마되지 않았다. 연인끼리 데이트 장소에서 만날 때나, 친구끼리 놀 때, 명절에 어른들이 모일 때도 그저 서로 고개만 푹 숙이며 스마트폰에 집중하는 건 그다지 아름다운 광경은 아니다. 


이런 문제점에 대해 그저 스마트폰 중독을 탓하며 거부운동을 벌이기 보다는 함께 공감할 수 있는 가이드라인을 만들고, 예의를 만들어가는 것이 중요하다. 기술은 칼과 같아서 인간이 어떻게 쓰느냐에 달렸을 뿐이다. 기술 그 자체를 탓하는 것은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 게임중독을 문제삼아 셧다운제를 하는 정부와 스마트폰 중독을 문제삼아 스마트폰을 압수하는 부모가 한국 사회에 존재한다. 이들도 아마 어린 시절에 햇님과 폭풍 동화 정도는 읽지 않았을까? 나그네의 외투를 벗긴 건 강풍이 아니라 햇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