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의 유행이라는 것은 참으로 무섭기도 하고 우습기도 하다.

세계 제 2차대전이 끝나는 것과 함께 전세계 산업에 몰아친 유행은 단순화되고 표준화된 대량생산이었다. 다양한 제품을 한사람이 공들여 설계하고 만드는 것은 비효율적이다. 설계하는 사람이 따로 있고 각 부품을 따로 만들며 그것을 모아 조립하는 사람도 따로 있다. 원료의 구입부터 조립까지의 공정을 표준화하면 최대한 단일화한 제품을 대량생산해서 파는 것이 좋았다.

이런 방법으로 인해 생산자는 엄청난 이익을 거둘수 있고, 소비자는 이전보다 훨씬 싼 가격에 좋은 물건을 살 수 있었다. 마치 오늘날 공동구매의 원리와도 비슷하다.


그러나 곧 시대의 유행이 바뀌었다. 대량생산된 획일적인 물건이 개성을 박탈하고 소비자의 다양한 욕구를  반영하지 못한다는 측면이 대두되었다. 많은 업체들이 제품 라인업을 다양하게 하고 보다 풍부한 변형제품으로 소비자의 기호를 맞추려 애썼다. 이때 방영된 티비 프로그램에서는 소품종 다량생산의 시대가 끝나고 다야흐로 다품종 소량생산의 시대가 왔으며 이것이 미래라고 찬양했다.


IBM PC가 세상을 지배하고 MS의 윈도우가 표준 운영체제로 이들을 통합하는 표준규격이 되었을 때는 확실히 이런 이론이 맞는 것 같기도 했다. 각기 전세계의 많은 제조사들이 다양한 사양과 성능의 제품을 내놓았을 때, 이들을 묶어주는 유일한 표준은 윈도우 였다. 그러니까 이런 다품종들이 소량생산되어 각국과 각 수요층의 다양한 욕구를 채워줄 수 있었다.


그러나 망해가던 애플로 복귀한 스티브 잡스의 선택은 달랐다. 그는 오히려 다양하게 난립하던 애플 매킨토시의 라인업을 딱 네 개로 통합했다. 일반용과 전문가용, 노트북과 데스크탑. 이렇게 말이다. 그리고 이런 선택과 집중을 통해 단순화된 소품종을 대량생산해서 팔았다. 이 정책은 성공해서 애플 회생의 밑거름이 되었다.

이런 시기에 애플과 정 반대의 정책으로 PC시장에서 승승장구하던 기업이 있었다. 바로 소비자에 의한 주문 조립 방식으로 유명한 델(DELL)이다. 델의 방식은 한국식으로 말하면 용산에서 전화주문을 받아 조립한 컴퓨터를 택배로 신속배달해주고 사후관리를 보장하는 방식이다.

특히 델의 사장은 돌아온 잡스에게 차라리 자기가 애플 CEO라면 회사자산을 정리해서 주주들에게 돌려주고 스스로 해체하겠다는 독설로 유명했다. 그때 델의 놀라운 성장세와 이익은 충분히 망하가기 직전의 애플에 그런 말을 할 만 했었다. 잡스는 이에 대해 한기업의 CEO라면 말에 품위가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냐고 했다. 맞는 말이지만 막상 지금 잡스가 각 기업과 제품에 해대는 절제없는 독설을 보면 그다지 본인은 지키지 못하는 말인 듯 하다.


어쨌든 며칠 전 뉴스는 델의 노선 변경을 의미하는 것 같아서 흥미를 끈다.(출처: 인가젯)

델은 가정용(개인용) PC 라인업을 단순화 할 예정이라고 발표했다.
여기에 따르면, 델의 개인용 PC 라인업은 메인스트림급의 '인스피론', 그리고 퍼포먼스 위주의 'XPS', '에일리언웨어' 이렇게 3가지 라인업만 남게 된다. 이로써 '아다모', '아다모 XPS', '스튜디오', '스튜디오 XPS' 씨리즈는 사라지게 되었다.

델은 다품종 소량생산에 주문생산 시스템으로 유명했다. 소비자의 취향과 개성을 존중해 주면서도 재고를 거의 없애고 회사이익을 극대화시킬 수 있는 좋은 시스템으로 한참 업계의 모범이 되었다. 그런데 애플은 이에 맞서기라도 하듯 아주 간단한 플랫폼과 라인업으로 수백만 대를 팔아치웠다. 파워맥부터 시작되어 아이맥, 맥북으로 이어지는 것도 그렇고 아이폰, 아이팟까지도 그렇다.

다른 업체들이 다양한 기호에 맞춘답시고 피처폰을 디자인과 몇몇 기능만 추가해 끊임없는 변종을 만들어낼 때 애플은 그 모든 것을 소프트웨어로 바꿀 수 있는 스마트폰-아이폰으로 승부를 걸었다. 결과는 앱스토어와 함깨 대성공했다. 다른 업체들도 뒤늦게 이런 스마트폰 시장에 합류했지만 그 전략은 애플처럼 단일 제품으로 갈 수 없었다. 많은 플랫폼을 마구 발표하면서도 운영체제만을 표준인 안드로이드로 쓰며 통일성을 확보했다.


애플 VS 델, IT산업의 미래는 무엇인가?

그럼 여기서 델이 포기한 다품종 소량생산 모델을 보며 미래에 과연 어떤 시스템이 주류가 될 지를 생각해보자. 단일화된 우수한 제품 모델 몇 개만을 개발해 집중적으로 파는 방식일까? 아니면 성능과 디자인을 풍부하게 만든 다양한 모델을 하나의 표준에 의지한 채 소량씩 시장에 내놓는 방식일까?

델이 아직 망한 것도 아니고, 명백히 다품종 소량생산을 포기한 것도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이제는 모든 업체가 애플의 매출과 순이익, 명성을 부러워하고 있다. 따라서 애플의 소품종 대량생산이 다시 미래의 방향으로 떠오르는 것만은 확실하다. 어떤 면에서 이것은 2차대전 이전으로 돌아가는 시대착오적인 부분일 수도 있다. 그러나 현재에 있어서는 명백히 성공하고 있는 시대의 트렌드이기도 하다.


물론 어떤 것도 영원한 정답이란 없는 법이다. 해마다 패션쇼에서 여자들의 치마길이는 짧아졌다가 다시 길어진다. 그것만으로 유행이 바뀌고 사람들은 옷을 다시 산다. 비즈니스 모델이나 미래의 생산모델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어제의 승자 델이 이제 오늘의 승자 애플의 방식을 배우는 것은 아이러니지만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