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찬스에 강하다는 말이 있다. 세계적인 골잡이는 90분 내내 무식하게 많이 뛰어다니는 경우가 거의 없다. 평소에는 어슬렁거리듯 다니다가 골이 나올 것 같은 몇 분 동안 폭발적인 움직임과 순발력으로 상대진영을 파고들어서 순식간에 골을 만든다.


(사진출처:씨넷)


역사적으로 치열한 경쟁의 승자가 된 기업에게는 반드시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단지 운이 좋아서라거나 주변상황이 흘러가다가 어떤 기업을 승자로 만들어주는 경우는 거의 없다. 즉 이런 기업들은 기회를 스스로 만들거나 포착해내는 능력에서 다른 기업을 압도한다.


현재 스마트폰과 태블릿 시장을 주도하는 애플과 개인용 컴퓨터 프로세서 시장을 주도하는 인텔이 합작할 것이라는 예상이 미국에서 나왔다. 이 뉴스를 둘러싸고 국내에서도 의미를 분석하고 앞으로의 흐름을 예측하는 몇 가지 보도가 나왔다. 그런데 막상 정말 거대한 흐름에서의 분석과 미래전망은 빠져있어 아쉬움을 던져준다. 우선 관련 보도 가운데 가장 전문적인 부분을 잘 써낸 기사를 보자(출처: 블로터닷넷)



애플과 인텔이 모바일 프로세서 생산을 위한 공동벤처를 설립할 가능성이 있다는 분석 자료가 나왔다. ‘아이폰’과 ‘아이패드’ 시리즈에 탑재할 모바일 프로세서를 인텔이 만들 수도 있다는 뜻이다. 맥옵저버, 더드로이드가이 등 해외 IT 매체가 현지시각으로 12월2일, 더그 프리먼 미국 RBC 캐피탈 마켓 분석가의 자료를 인용해 전했다.


인텔은 현재 스마트폰이나 태블릿 PC에 탑재하기 위한 모바일 프로세서를 만들고 있다. 애플과 손을 잡는다는 분석은 언뜻 이해하기 어렵다. 인텔은 x86 아톰 프로세서에 기반을 둔 모바일 프로세서를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2012년 출시된 ‘Z2760′ 모바일 프로세서가 대표적이다. 헌데, 애플 모바일기기에는 ARM SoC에 기반을 둔 모바일 프로세서가 탑재된다. 아이폰과 아이패드 시리즈에 쓰이는 A5X나 A6 칩을 떠올려보면 이해하기 쉽다.


애플과 인텔이 손을 잡을 것이라는 얘기는 인텔이 영국 ARM으로부터 코어텍스 시리즈의 칩 디자인 라이선스를 받아 모바일 프로세서를 생산할 것이라는 시나리오로 이어진다. 인텔 공장에서 ARM SoC 칩이 만들어진다는 얘기다. 더그 프리먼 분석가는 독특한 조건도 내걸었다. 인텔이 애플 아이패드에 x86 인텔 모바일 프로세서를 탑재할 것이라는 조건이다. 인텔은 아이패드의 모바일 프로세서 시장을 움켜쥘 수 있고, 애플은 인텔로부터 아이폰용 모바일 프로세서를 공급받는 시나리오다.


더그 프리먼 분석가는 “애플 아이패드에 x86 칩이 탑재되면, 인텔은 한 해 20억달러 규모의 새로운 시장을 잡을 수 있게 된다”라며 “인텔에 매우 달콤한 비즈니스가 될 것”이라고 내다보기도 했다.


애플 처지에서도 인텔의 제조능력은 달콤하다. 인텔은 명실상부 전세계 최대 반도체 제조업체다. ARM SoC는 x86 프로세서보다 구조가 단순해 생산하는 것이 상대적으로 쉽다는 것이 업계 관계자의 의견이다. 인텔이 애플에 모바일 프로세서를 지원할 능력이 충분하다.



이런 일련의 움직임에 대해 국내의 전문가와 IT블로거들의 해석은 다음의 세 가지 사실에 집중하고 있다.


1. 애플이 현재 치열하게 법정다툼을 벌이는 삼성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려는 시도이다.

2. 인텔이 영향력이 아직 약한 모바일 시장에 진입하려는 노력이다.

3. 오바마 대통령을 비롯해 미국에서 자국에 공장을 세우고 일자리를 만들라는 압력에 대한 두 미국 회사의 구체적인 움직임이다.


물론 미시적으로는 이 사실 모두가 맞다. 그러나 가장 거시적으로 본다면 이런 요소는 아주 작은 이유에 불과하다. 보다 중요한 것은 향후 몇십년을 좌우할 거대한 프로세서 시장의 흐름에 있다. 애플과 인텔 모두가 지금 자기들의 선택이 미래를 바꿀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땨문이다. 



애플과 인텔의 연합, 미래를 바꿀 것인가?


단지 현재의 수익성이나 단기시장전망을 본다면 인텔로서는 그다지 아쉬울 것이 없다. 인텔은 지금 역사상 가장 공고한 PC 용 프로세서 시장의 승자이다. 경쟁자인 AMD는 심각한 판매부진과 경영난에 직면해있고 새로 들어오려는 경쟁사는 없다. 컴퓨터나 노트북을 제조하려는 어떤 회사도 인텔 앞에서는 큰소리 칠 수 없다. 심지어 애플조차도 그렇다. 인텔 칩을 쓰는 맥을 제조하려면 애플도 인텔의 로드맵을 따라야 한다.


그런데 바로 이런 점이 애플에게 있어 못마땅하다. 애플은 원하는 제품을 만들기 위해 모든 설계와 사양을 통제할 수 있기를 원한다. 그런데 인텔이 주도하는 프로세서 시장은 ARM처럼 주문형 칩을 만들 수 없다. 즉 아이폰 칩처럼 애플이 원하는 코어를 선택하고 원하는 그래픽 가속기를 넣어서 원하는 클럭주파수로 만들 수 없다. 마치 기성복을 사가듯 그저 인텔이 미리 만들어놓은 몇가지 샘플 안에서 골라서 사가야 할 뿐이다. 


인텔은 어떤 회사에게도 X86칩을 맞춤제조해주지 않는다. 심지어 인텔은 그다지 성능도 안좋은 자체 그래픽 가속기를 프로세서 안에 내장해서 끼워팔기를 하고 있다. 통합칩이라는 명분하에 말이다. 게다가 전력도 많이 소모하는 것이 X86칩이다. 모바일용으로는 애플에게 너무도 매력이 없다. 애플은 여러번 이런 점을 인텔에 경고했으며 맥조차도 미래에 ARM기반으로 옮길 수 있음을 경고했다. 즉 아이폰과 아이패드와 맥이 모두 같은 칩을 이용하면서 운영체제도 하나로 통합한다는 것이 애플의 미래전략이었다.



그런데 인텔 입장에서 본다면 애플의 이런 행보는 단지 애플의 선택으로만 끝나지 않는다. 현재 애플은 점유율과 관련없이 관련업계를 이끄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애플 때문에 어도비의 플래시는 쇠락하고 있다. 애플 덕분에 ARM칩은 현재 엄청난 발전을 해서 슈퍼컴퓨터에도 이용되려 하고 있다. 안드로이드폰을 비롯해 윈도우8 RT에도 쓰이고 있으며 마이크로소프트는 장기적으로 윈도우의 ARM버전까지 만들 전망이다.


결국 지금은 세계 프로세서의 아키텍처가 어디로 갈 것인가를 둘러싼 거대한 분수령이 되는 시기다. 불과 몇년전만 해도 ARM은 인지도도 낮고 소수기기에나 쓰이는 특수칩에 불과했다. 그런데 지금은 고성능 PC는 인텔, 저전력 모바일기기는 ARM이라는 공식이 만들어졌다. 여기서 만일 애플이 맥조차 ARM으로 가서 그게 성공한다면 노트북 시장까지는 모조리 ARM칩이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인텔칩이 반대로 특수한 고성능을 필요로 하는 데스크탑 기기에나 쓰이는 것으로 밀려나게 된다.


따라서 인텔은 어떻게든 애플의 선택을 저지해야 한다. 나아가서 애플이 ARM을 버리고 인텔칩을 선택하도록 해야한다. 최소한 미래에 가벼운 PC수요를 대체할 수 있는 태블릿-아이패드 만이라도 애플이 인텔칩을 선택한다면 안심할 수 있다. 아이패드가 인텔칩을 쓴다면 안드로이드 진영 역시 태블릿에 인텔칩을 쓸 가능성이 높다. 그렇게 되면 맹렬한 기세로 성장하는 ARM칩을 스마트폰 처럼 작은 모바일기기용으로 가둬둘 수 있다.



한때 윈텔 연합이라는 말이 있었다. 마이크로소프트의 운영체제 윈도우와 인텔 프로세서가 거의 한몸이나 다름없이 팔리며 몇십년 동안 호황을 누렸던 때 붙여진 이름이다. 이것은 한번 주도권을 가져간 기업이 미래를 만들어간 사례다. 지금 애플-인텔 연합은 어떻게 보면 인텔쪽이 위기와 기회를 직감적으로 느끼고 발빠른 움직임을 보인 것이다. 앞에서 말한 골잡이의 직감처럼 역사상 승자였던 인텔은 지금이 기회라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애플이다. 애플로서는 삼성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감정적 이유 외에 인텔에 대해 그렇게 많은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 단지 생산능력과 미국회사라는 명분 만으로 인텔과 손을 잡기에는 아직 동기가 부족하다. 결국 문제는 저전력화이다. 인텔이 얼마만큼의 저전력화된 칩을 애플에 제시할 수 있는 지, 그것이 이번 애플 인텔 연합을 만들 수 있고 미래의 프로세서 시장을 만들 변화를 가능하게 만들 것이다.

 

P.S:  이 부분에서는 글 분량상 전부 다 풀어내기 힘드네요. 앞으로 이어지는 글에서 좀더 면밀하게 이야기해보겠습니다. 프로세서와 각종 콘텐츠의 미래와 관련있는 이야기가 될 듯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