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되지도 않았는데 마치 호랑이 담배먹던 시절로 느껴지는 시간이 있다. 마이크로소프트가 전세계를 호령하고는 윈도우를 새로 내놓으면 사람들이 줄을 서서 구입하던 시절이다. 컴퓨터에서 가장 핵심적인 운영체제가 완전히 독점에 가깝게 되고, 오피스 프로그램 역시 한 회사의 표준이 곧 세계표준이나 나름없이 되자 우려의 목소리가 나왔다. 전세계의 업무와 개인용 컴퓨터가 몽땅 MS에 종속되어 버리는 게 아닌가? 라는 우려였다.



한편으로는 불법복사자가 많은 윈도우 개인사용자에게서도 목소리가 나왔다. 윈도우의 가격정책에 문제가 있어서 정품을 구입하고 싶어도 너무 비싼 가격 혹은 너무 까다로운 라이센스 조건 때문에 불법 복사자가 된다는 것이다. 법적 보호도 받지 못하고 아무런 권리 주장도 못하는 사용자가 되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래서 벌어진 것이 공개 운영체제인 리눅스를 쓰자는 운동이었다. 자유롭게 공개된 리눅스는 일반적으로 해커들이나 쓰는 운영체제로 알려졌지만 우분투 리눅스를 비롯해서 쉽게 쓸 수 있는 배포판도 많다. 또한 정보의 공유와 나눔으로 세상을 널리 이롭게 하자는 정신도 나름 좋은 취지였다. 그래서 나도 리눅스를 배워서 한때 열심히 쓰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과정에서 현실적으로 벽에 부딪친 것이 있다. 내가 아무리 좋은 마음으로 행동해도 IT세상에서 그것을 받쳐주지 못하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아무리 리눅스를 메인으로 써보려고 해도 호환성이 떨어지는 파일 포맷이 많았고, 표준도 아니면 표준처럼 된 특정 회사의 규격이 너무 많았다. 



MS의 오피스 파일이야 그렇다고 쳐도, 아래한글의 파일이나 맥의 파일포맷처럼 독자적인 규격들은 리눅스에서 원활하게 읽고 쓰기가 힘들었다. 하다못해 공공기관 홈페이지에 가도 익스플로러에서만 가능한 액티브 엑스를 써야 하고, 아래한글로 된 파일이 넘쳐났다. 금융기관과 인터넷쇼핑몰은 공인인증서를 통해서 액티브 엑스를 강요하니 리눅스에서 제대로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결국 나는 다시 윈도우로 돌아갈 수 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이 이제 좀 개선되려는 것일까? 서울시에서 시정관련 자료를 기존의 HWP파일이 아닌 전자출판용 포맷 PDF로 배포한다는 소식이다. (출처) 

서울특별시는 최근 '정보소통광장' 사이트를 열어 정보공개법이 제한한 8개 항목외 모든 시정 관련 정보를 제공하기로 했다. 시가 그 전자문서 파일을 '한글 문서(HWP)' 대신 PDF로 배포하기 시작해 눈길을 끈다. 일부 사용자들 바람처럼 시가 여타 공공기관보다 '더 보편적인 수단'으로 정보를 공개할지 지켜볼 일이다. 
 
지난달 열린 서울시 정보소통광장 사이트는 조직별 행정정보, 공공데이터, 회의록, 업무추진비 등을 PDF 파일로 제공하기 시작했다. 
 
해당 문서는 여전히 한글 워드프로그램으로 생산된 HWP 파일이지만 담당자들이 게재 시점에 이를 PDF 형태로 바꿔 올리는 것으로 추정된다. 한글 워드프로그램에 HWP를 PDF 파일로 바꾸는 기능이 내장돼 있어 어렵지 않은 일이다. 
 
PDF 파일은 추가 비용을 들이지 않고 열어볼 수 있는 방법이 한글 문서 형식에 비해 다양하다. 윈도와 맥 이외에도 리눅스용 뷰어 프로그램을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다. 대다수 모바일 운영체제(OS)는 기본 브라우저에서 웹상의 PDF 파일을 곧바로 열어주는 기능도 지원한다. 뷰어 애플리케이션을 따로 설치할 필요가 적다는 얘기다. 

물론 11일 현재 정보소통광장에 게재되는 모든 문서가 PDF 파일로 배포되진 않는다. 예를 들어 설문조사 결과나 비용처리 내역 등은 MS 오피스 '엑셀'에서 다루는 XLS 파일로 내려받게 돼 있다. 또 공공데이터를 내려받을 수 있는 '열린데이터광장'에 등록된 '서울시 공공정보 개방에 따른 경제적 가치 측정' 연구 보고서같은 과거 자료는 여전히 HWP 파일로 제공된다. 
 


최근 이를 지적한 우분투 리눅스 사용자 소 모씨는 트위터로 박원순 서울특별시장에게 "소원이 있는데, 서울시에서 유통되는 공공문서 포맷을 HWP가 아닌 PDF로 해줄 수 있느냐"며 "HWP 파일을 리눅스 OS에서 열어볼 수 없어서(그런다)"고 하소연했다. 
 
지난주 6일 오전 작성된 이 메시지(트윗)는 65번 재전송(리트윗)됐고 6명에게 '관심글'로 저장됐지만 박 시장의 답글을 받지 못했다. 작성자 소씨는 지난해 10월 우분투 한국 커뮤니티 회원들과 '웹, 문서 표준 준수의 필요성과 오픈웹 캠페인 방안'이란 주제로 "공공기관이 배포하는 전자문서 형식에 보편적이고 장기적인 접근가능성이 중요하다"는 내용의 세미나를 진행한 사람이다. 


사실 이런 문제는 진작에 논의되고 실행되었어야 했다. 단순히 특정 지자체가 어떤 서비스를 제공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한국의 공공기관들이 특정한 운영체제나 특정 회사의 비공개 포맷에 의존한다는 건 심각한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최근에서야 웹표준이 강조되고, 표준포맷이 주목받는 건 다행이지만 그나마도 아이폰과 아이패드가 일으킨 모바일 열풍 때문이지, 깊은 철학적 고민 때문이 아니다.

공공기관의 PDF전환, 아래한글의 위기?

이런 공공기관의 움직임에 대해서 반발도 있다. 아래한글이 크게 불편함이 없을 뿐더러, PDF 역시 편집이 어렵고 각종 불편함이 있다는 이유이다. 사실 이런 자잘한 문제점보다도 더 중요한 게 있다. 이런 움직임이 쌓이면 그동안 한국이 그나마 토종 소프트웨어의 자존심으로서 보호하던 한컴과 아래한글에 대한 우대가 사라진다는 것이다.

이전에도 말했지만 이 문제는 애증이 쌓인 부분이다. 국제적인 흐름이나 당장의 편리함, 대의명분에서는 아래한글에 우선권을 준다는 자체가 말이 안된다. 정부기관이 아래한글을 공식표준으로 쓸 이유가 없는 것이다. 당장 오피스로 전환하고 공개 포맷을 이용하면 생산성 향상과 글로벌화를 이룩할 수 있을 지 모른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더이상은 어느 회사에서도 한국만이 사용하는 독창적 언어인 한글-한국어에 대한 밀착된 기능을 개발해주지 않을 것이다. 지금 아이폰5의 발표에 맞춰 '애플에서 혹시나 한국을 1차발매국에 넣어주지는 않을까?' , '시리의 한국어 지원이 늦게나마 되어서 다행이야.' 라는 반응이 많다. 이런 식으로 다른 회사의 선의와 정책에 대안없이 목을 매는 현상이 반복된다는 것이다.

과연 어떤 것이 옳은 정책이 될까? 리눅스 유저의 문제제기는 분명 옳다. 그걸 받아들인 서울시의 소통도 박수를 받을 만 하다. 그러나 그런 전환의 결과로 우리에게 유용한 한글 소프트웨어 하나가 쓸쓸히 사라질 수 있다는 가능성이 너무도 착잡하다.

평론가가 감정에 의존하는 건 나쁘다. 그렇지만 나는 한글에 대해서만은, 아래한글에 대해서만은 끝내 감정을 완전히 거두지는 못하겠다. 어떤 형태로든 아래한글도 보호, 육성해 줄 수 있는 방법을 찾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