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모든 것이 변화한다고 한다. 그렇다. 시간이 흐르면 세상도 변하고 개인도 변한다. 커피를 거의 마시지 않던 내가 요즘 아메리카노를 아무렇지도 않게 시켜서 먹게 되었다. 다이어트 같은 건 코웃음치던 내가 이제는 어떻게 하면 살을 뺄 수 있을까 생각하기도 한다.


때로는 그런 변화 가운데 서글픈 것도 있다. 영국사람 몫지 않게  쇠고기를 좋아하던 내가 어느새 쇠고기를 잘 사먹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실상 나는 돼지고기나 닭고기 보다 쇠고기를 압도적으로 좋아한다. 그렇지만 몇 년전부터 먹지 않게 되었는데 무슨 거창한 정치적 이유는 아니다. 그저 한우 고기값이 내 지갑 사정에 비해 너무 비싸서라는 단순한 이유다. 


하지만 자주는 못먹을 지언정 가끔은 정말 마음 놓고 먹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때가 있다. 텔레비젼 드라마에서도 연예인들이 한우 꽃등심이라고 하면 깜빡 죽지 않는가? 때로는 그런 질좋은 쇠고기를 먹고 싶었다. 그래서 지인과 함께 찾아간 곳이 있었다. 논현동에 위치한 태백한우전문집인 칠백식당이다.


한우집이라고 하면 보통 허름한 고기집을 연상하는데 그렇지 않았다. 서울에서도 중심가에 위치한 곳인만큼 깔끔한 입구가 맞아준다. 모든 게 정갈하고 쾌적한 일본 식당을 연상하게 한다. 


맛있는 한우를 아주 싸게 하는 곳이라 한다. 과연 그럴까? 일단 들어가서 메뉴판부터 확인해보았다. 


메뉴는 상당히 단순했다. 술과 된장찌개, 곤드레밥 같은 서브메뉴를 빼고나면 주 메뉴는 딱 두 개였다. 칠백 한우 모듬과 칠백 한우 육사시미다. 익힌 고기와 생고기니까 아주 단순하다. 본래 잘나가는 맛집의 비결은 단순한 메뉴에 있다는 걸 생각하면 딱 맞다.


곱게 간 소금이 접시에 담겨져 나온다. 정말 좋은 고기는 다른 향신료나 양념이 필요없다. 고기 자체가 향신료이고 육즙이 양념이다.


드디어 나온 살치살이다. 다른 이름으로는 꽃등심이다. 푸짐하게 양이 많아보인다. 더구나 쇠고기 사이에 낀 마블링이 오랫만에 한우를 먹는 내 눈을 자극한다. 어디선가는 채식이 지구를 구한다고 하지만... 나는 아무래도 지구를 구하기는 틀린 사람이다. 고기를 너무 좋아하니까 말이다.


간단한 밑반찬도 나온다. 그렇지만 아무래도 이곳은 고기맛을 추구한 집이다. 나머지는 고기를 먹기 위한 약간의 에피타이저일 뿐이다.


빨갛게 준비된 연탄불이다. 열탄에 있는 약간의 매연이 걱정되어 거의 다 태운 연탄을 쓴다고 한다. 이미 연기가 거의 날아가버리고 열만 뿜고 있는 연탄을 쓰는 건 나름 이채롭고도 재미있다. 연탄불에 올려놓은 살치살이 보기좋게 익는다.


바짝 익혀 먹어야 하는 돼지고기나 닭고기를 주로 먹다보니 쇠고기조차 바짝 익혀먹으려는 어리석은(?) 모습을 보이게 된다. 보다못한 지인이 나에게서 고기를 빼앗고는 적당하게 익혀준다. 역시 고기도 먹어본 놈이 잘 먹는다는 옛말이 딱 맞다. 쇠고기를 잘 못 먹어보다보니 어느새 실전감각이 떨어진 선수처럼 어리둥절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내 미각만큼은 감각이 살아있다. 육즙이 흐르는 고기의 모습을 잠시 보고 입안에 넣자 쇠고기 특유의 진한 맛이 자르르 흐른다. 살짝 씹으면서 느끼는 감촉과 고기맛은 역시나 환상적이었다.


다음은 갈비살이다. 갈비살은 비교적 흔한 부위지만 그래도 맛있는 부위다. 곁들여서 구워먹으면 쇠고기의 여러 부위를 잘 맛볼 수 있다는 점에서 조화가 잘 된다. 아무리 좋은 맛도 하나만 계속 경험하면 질린다.


육사시미도 시켜서 먹어보았다. 생선회처럼 얇게 썰어놓은 육사시미는 선명한 붉은 색으로 나를 유혹한다. 고기의 본래 맛을 가장 잘 즐길 수 있는 것이 바로 이것이 아닌가. 육회보다도 더 풍부한 맛을 즐길 수 있기에 기대되었다.  


역시나 입에 넣으니 고기가 빙수얼음처럼 입안에서 녹아가며 어서 씹으라고 재촉한다. 얇기로는 육포와 비슷하지만 신선한 느낌과 진한 맛은 감히 비교를 불허한다. 그야말로 사치스러운 맛이다.


마지막으로 안창살이다. 내장 안쪽에 있는 부위로서 소 한마리를 잡아도 얼마 나오지 않는 특수부위다. 먹어보니 쇠고기의 맛이 더욱 진하게 느껴졌다. 


전체적으로 칠백집의 한우는 맛이 담백하고 부드러운 식감이 인상적이었다. 강원도 700고지에서 방목으로 자란 한우를 골라 사용한다고 하는 문구가 맛으로 실감되는 이유다. 한우 가운데서도 지방과 생육환경에 따라 차이가 있을 텐데 칠백집의 한우맛은 그만큼 특이했다.


이 집의 곤드레밥은 추천할만 하다. 고기와 간장 약간을 넣어서 함께 먹으면 그 맛이 정말 좋았다. 어째서 일부러 메뉴판에 따로 적었는지 그 자신감의 원천을 알만 하다. 


칠백집의 고기를 먹는 동안 특별히 맛있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동행한 지인과 여러 이야기를 하면서 고기를 먹는데 그냥 고기가 슬슬 입안에 들어갔다. 보통 고기를 계속 먹으면 느끼하다는 느낌이나 여러 맛 때문에 고기를 먹는다는 점을 의식하게 된다. 그런데 아무런 부담도 없이 계속 고기를 먹을 수 있었다. 


가게를 나올 때는 거의 고기만으로 배가 불렀다. 맛있는 생각조차 나지 않게 하면서 계속 먹을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 이 집의 고기는 내 취향에 딱 맞았다. 가끔 한우고기를 양껏 먹고 싶을 때는 언제든 여기에 와야겠다. 가격이나 여러가지 면에서 칠백집은 쇠고기를 좋아하는 사람에게 한번쯤 추천하고 싶은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