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공부하고 분석하는 사람에게는 IT기업의 행보 역시 역사의 하나이다. 지금은 고인이 된 스티브 잡스의 애플, 그리고 새로운 리더인 팀쿡이 이끄는 애플은 흥미로운 비교의 대상이다. 본래 조직이라는 것은 누가 이끌든지 커다란 기복없이 운영되고 발전해야 한다. 그렇지만 이것은 이상론일 뿐 현실에서 그런 조직은 별로 없다. 회사든 국가든 결국 리더의 역량이 반 이상을 차지한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잡스의 후광이 사라진 지금, 애플이 어떤 제품을 내놓고 어떤 전략을 취하는 가는 예의주시해야 한다.


어려운 점은 대체 어디까지는 스티브 잡스의 영향이 미친 프로젝트고, 어디부터는 영향이 거의 없는 새로운 팀쿡만의 프로젝트로 간주하느냐 하는 것이다. 지난 뉴아이패드와 아이폰4S까지는 어쨌든 잡스의 손길이 약간이나마 닿았다는 것이 공통된 인식이다. 그러니까 그것으로는 팀쿡의 역량을 가늠하기 어렵다.

그래서 나는 이번에 세계개발자컨퍼런스(WWDC) 2012에서 발표된 레티나 맥북프로를 주목하게 되었다. 아이폰4에서 시작된 레티나 디스플레이가 뉴아이패드를 거쳐서 레티나 맥북에까지 적용된다는 흐름도 재미있지만 무엇보다 이것이 아마도 팀쿡이 추진한 첫번째 혁신제품일 거란 예상 때문이다. 

이 자리에서 소개한 맥북 제품 라인 중에서 가장 주목 받은 신형 맥북 프로였다. 이 제품은 맥북으로는 처음으로 '레티나 디스플레이'를 탑재했다. 15.4인치의 레티나 디스플레이는 '2880×1880'의 해상도로 기존 모델보다 4배나 높은 541만 화소다.

또한 인텔의 3세대 코어 프로세서 아이비브릿지를 탑재해 기본 프로세스 및 그래픽 성능이 향상됐다. 두께 1.8㎝, 무게 2.02㎏으로 더 얇아졌다. 지포스 GT 650M 그래픽 카드까지 갖춰 더욱 강력한 성능과 화질을 갖췄다.


나름 좋은 제품이다. 하지만 이전 포스팅에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이 제품은 진정한 혁신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전혀 모른 채 그저 관성대로 만든 제품일 뿐이다.

오해하진 말길 바란다. 나는 지금 레티나 맥북프로라는 ‘제품 하나’의 가격을 비싸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맥북의 가격이 동급 PC노트북보다 비싸다는 논란은 항상 있어왔지만 종합적으로 말해서 맥북의 재질과 운영체제, 사용자 경험등을 고려할 때 그렇게 비싼 것은 아니다. 적어도 맥북이란 이미 구축된 포지션에서만 보자면 충분히 접근 가능한 가격이다. 거기다가 약간 더 가격을 낮출 수 있다면 그때는 시장에 일대 변화가 일어난다.

2010년 말에 내놓은 맥북에어는 그런 면에서 조용했지만 파급력이 큰 제품이다. 아주 얇고 가벼워서 서류봉투에서 꺼낼 수 있었던 맥북에어의 맥을 잇는 제품이 아이패드에게서 많은 장점을 배웠다. 저장장치로 SSD를 채택해서 조용해지고 빨라졌다. 더구나 그런 변화에도 불구하고 이 제품의 가격은 999달러였다. 1천 달러 아래로 떨어진 것이다.

이렇게 가볍고 좋은 디자인에 혁신적인 노트북을 천달러 아래로 구할 수 있다는 건 잔잔한 충격이었다. 판매고 자체는 폭발적으로 많이 늘어나지는 않았어도 꾸준하게 상승했다. 소비자들은 강하게 이 제품을 의식했다. 기존 넷북과 울트라씬 노트북이 퇴조를 보이는 가운데 유독 맥북에어만 판매고가 상승했다. 또한 모든 가벼운 노트북의 비교기준이 되었다.

결국 이 제품이 일으킨 소비자의 눈높이 변화를 맞추기 위해 인텔은 울트라북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주창하기에 이르렀다. 가벼운 두께, SSD채용으로 인한 빠른 부팅속도, 천달러 미만의 가격이란 인텔 권장 규격은 맥북에어를 의식하지 않고는 만들어질 수 없는 것이다.


현재 다른 규격은 대부분의 메이커가 충족하고 있지만 천달러 미만의 가격이 잘 실천되지 않고 있다. 부품의 대량 구매와 원가절감을 이룬 맥북에어가 이미 만들어놓은 이런 가격이 다른 업체들을 강하게 압박하고 있는 셈이다. 소비자들은 천달러를 기준으로 그 제품의 접근성을 판단하게 되었다.

이 말을 거꾸로 뒤집어보자. 이익률이 높기로 유명한 애플이 동급의 다른 어떤 얇은 노트북보다 더 접근이 쉬운 가격을 제공했다. 그 제품이 바로 맥북에어란 뜻이다. 맥북에어는 판매량 이상의 문화현상과 파급력을 발휘하고 있다. 이것은 스티브 잡스가 취한 가격정책의 성공이다.

맥북에어는 사실 굳이 999달러일 필요는 없다. 예를 들어 이 제품을 1500달러에 내놓는다고 해도 살 사람은 산다. 그러나 만일 그런 가격이라면 지금과 같은 좋은 반응은 없었을 것이다. 또한 문화현상이 되거나 동급 제품의 표준이 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비싸지만 나름 가치와 개성은 있는 제품이 되는 정도에 그칠 것이다.

팀쿡은 잡스가 일전에 왜 아이패드의 가격을 499달러 기준으로 고정했는지 그 이유나 철학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게 분명하다. 다만 생전에 잡스가 취한 정책이므로 유지하는 것 뿐이다. 만일 이런 철학과 전략을 알았다면 어땠을까? 이번에 내놓은 레티나 맥북프로의 스펙과 가격은 지금과 현격히 달라졌을 것이다. 단순히 지금 나온 제품의 가격을 낮췄을 거란 이야기가 아니다. 내부 부품의 배치와 설계부터 달라졌을 거란 뜻이다.



레티나 맥북, 시장 혁신의 전략은 없는가?

적당한 예로서 흔히 전문가용 카메라라고 말하는 일안반사식 디지털 카메라(DSLR)시장을 들어보자. 이 카메라 시장에서 성능의 가장 큰 기준이 되는 것은 빛을 최초로 받아들여 전기신호로 바꿔주는 촬상센서이다. 전문가용 제품답게 DSLR의 센서는 일반 컴팩트 카메라나 스마트폰 카메라와는 비교가 안되게 크고 성능이 뛰어나다. 당연히 그 센서의 부품 원가 자체가 매우 비싸다.

다양한 규격이 있긴 하지만 크게 봐서 촬상센서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예전 소형 카메라 필름 사이즈와 같은 35밀리 규격으로 풀프레임 센서라고도 한다. 또 하나는 APS-C사이즈, 흔히 크롭 센서라고 불리는 것으로 35밀리의 3분의2 정도 크기를 가진다. 바로 여기서 DSLR의 제품 라인업 분류가 시작된다. 풀프레임 센서와 크롭 센서는 가격차와 성능차이가 확연하게 나기 때문이다.

크롭센서를 채택해서 측거점을 적게 넣고 카메라 전체를 싼 플라스틱 재질 위주로 만든 카메라는 보급기가 된다. 이익을 적게 가져가지만 그만큼 성능도 낮췄다. 크롭센서를 쓰지만 측거점을 많이 넣고 고급 재질과 부품을 쓰면 중급기가 된다. 사진에 어느 정도 욕심이 생긴 사람들이 쓰는 제품이다. 마지막으로 풀프레임 센서를 쓰고 각종 고급 부품에 좋은 금속재질 바디로 만드는 플래그쉽 - 고급기가 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플래그쉽은 전문가용으로 최고의 성능을 내도록 만들어졌기에 비싸다. 어느 정도 비싸더라도 살 사람이 사는 것이기에 플래그쉽 카메라에 대고 비싸다는 말은 하지 않는다. 다만 일반인은 가격 때문에 애초에 살 생각을 조용히 포기한다. 세계시장을 장악한 일본 카메라 업체는 한동안 이렇게 풀프레임 센서로는 당연히 비싼 전문가용을 지향했고 , 그 아래쪽에 크롭센서로 일반용을 만들어 가격부터 확실히 구분지었다.



그렇지만 캐논이 여기에 변화를 몰고 왔다. 5D라고 불리는 라인업이다. 5D는 풀프레임 센서를 채택했지만 나머지 측거점에서 상당히 부족한 면이 있고, 그 외에도 지나치게 비싼 부품이 아닌 중급기 수준의 부품만 썼다. 결과적으로 풀프레임이란 전문가의 영역을 일반인에게도 개방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상당히 낮춘 가격은 엄청나게 싸지는 않았지만 위치 자체가 독보적이었다. 타사 제품으로는 도저히 그 정도 가격에 풀프레임 카메라를 쓸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같은 캐논의 플래그쉽 카메라 1DS 시리즈가 천만원에 달하는 가격을 유지했는데 5D는 300만원 조금 넘는 수준이면 살 수 있다. 따라서 기계적 성능을 크게 요구하지는 않지만 좋은 사진 품질을 위해 꼭 풀프레임 센서를 원하던 소비자들에게 5D는 선택권을 주었다. 이후로도 5D시리즈는 일명 ‘풀프레임 보급기’ 라는 별명까지 얻어가며 성공했다. 캐논의 전략적 제품기획이 크게 성공한 것이다. 이후 다른 회사에서는 5D때문에 플래그쉽 제품들의 가격을 떨어뜨리거나 전략적 대응기종을 출시해야 했다. 동종업계 전반에 혁신과 변화를 불러왔다고 말해도 무방하다.



이처럼 진정한 시장 혁신은 보급형 라인업을 갖추느냐 아니냐에서 온다. 처음부터 절대적 가격이 비싼 고급제품으로는 소수 전문가에게 극찬은 받을 지언정 돈에 구애받을 수 밖에 없는 대다수 소비자들의 호응은 얻을 수 없다. 현재는 니콘에서 캐논의 5DMk3 를 의식해서 저가형 풀프레임 카메라인 D600을 기획해서 출시한다는 소문도 있다. 만일 이것이 훨씬 싸게 나온다면 시장에는 다시 엄청난 변화와 가격파괴의 바람이 불 것이다.

지금 이미 출시된 레티나 맥북프로의 가격을 인위적으로 대폭 낮추라는 뜻이 아니다. 그 제품은 나름대로 맥북 15인치 모델로서 플래그쉽 제품의 장점에 충실하면 된다. 높은 성능과 쾌적한 사용성, 넓은 SSD 저장공간과 우아한 품격을 갖춰도 뭐라고 할 필요없다. 다만 그런 제품과 함께 시장 자체를 혁신하기 위한 보급형 제품이 나와야 한다는 뜻이다.

* 전체참조 : 레티나 맥북을 통해 보는 애플의 혁신과 미래(디지에코 - 이슈앤 트랜드) , 필자 : 안병도.

2012/06/19 - [사과나무와 잡스이론(해외IT)] - 레티나 맥북프로, 혁신의 의미는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