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회는 언제나 우연히 찾아온다는 말이 있다. 사실 나는 이때까지 컴퓨터의 모니터에 큰 욕심이 없었다. 그래픽이나 영상 같은 전문분야를 직업으로 삼지 않은 탓도 있다. 하지만 결정적인 건 한번 욕심을 부리기 시작하면 한이 없는 성격 탓이었다. 일단 화려하고 좋은 것을 추구하기 시작하면 어지간한 고급제품으로도 만족하지 못한다. ‘뭐야? 그 돈 들여서 겨우 이 정도 나아진 거야?’ 라는 생각이 드는 건 결코 현명한 선택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마침 나에게는 새 모니터가 필요했다. 계기는 매우 간단했다. 중소기업이 만든 3년전 제품인 모니터에는 HDMI단자가 없었다. DVI단자만 있는 이 모니터에는 스마트TV를 위한 셋탑박스가 연결되지 않았다. 또한 오래된 모델이라서 컨버터를 써도 게임기 연결조차 제대로 호환되지 않았다. 때문에 새로운 모니터 구입을 고려하던 중에 좋은 제안을 받게 되었다. 삼성에서 새로 출시되는 전문가용 모니터인 스마트 모니터 970의 체험제안이었다.


전문가용 모니터는 여러 가지 면에서 일단 모니터와는 다르다. 고해상도가 필요한 그래픽 작업, 빠른 반응속도가 필요한 영상 작업, 정확한 색감이 필요한 디자인 작업을 위해 만들어지는 제품이다. 따라서 일반 모니터라면 원가절감을 위해 생략되거나 적당하게 만들었을 부분을 엄청나게 공들여 만든다. 따라서 이런 모니터를 한번쯤 써본다는 건 그만큼 귀중한 경험이기에 참여하기로 했다.


그동안 전문가용 모니터는 해외 브랜드의 독무대였다. 최고급 시장에는 에이조나 도도쿠 같은 일본 브랜드가 있었고 약간 대중성을 생각한 시장은 애플의 시네마디스플레이가 차지했다. 정작 그 안에는 디스플레이 패널의 최대 강자인 삼성의 이름은 없었다. 예전에 아주 잠깐 써본 에이조의 모니터에는 삼성의 최고급 PVA패널이 들어갔다. 그래픽 전문가를 위한 모니터라는 명성 답게 사진을 아주 선명하게 표시해주는 그 모니터의 품질은 매우 좋았는데 그 원동력은 당연히 패널을 제공한 삼성이었다.


사실 나는 개봉기를 올린 적이 거의 없다. IT제품이란 겉포장보다는 성능으로 말해야 한다는 생각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정으로 좋은 제품은 최고의 사용자경험을 제공한다. 그리고 최고의 사용자경험은 바로 포장을 뜨는 순간부터 시작된다. 따라서 개봉 단계부터 과연 이 제품이 얼마나 신경을 써서 만들어졌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집에 도착한 스마트 모니터 970의 박스는 블랙색상의 고급스러운 디자인을 하고 있었다. 보통 저가 모니터들이 원가절감을 위해 골판지색 박스에 대충 검은 색으로 인쇄를 해놓곤 한다. 또한 중가형 모니터는 뭔가 촌스러운 사진을 크게 박아넣기도 한다. 그에 비해 검은 박스와 묵직한 무게감이 품격을 드러내고 있다.


공장에서 갓 나온 듯한 제품박스 포장을 뜯고 박스를 열었다. 그러자 깔끔한 스티로폼 박스와 함께 인쇄된 종이 한 장이 나왔다. 무슨 종이인가하고 펴보니 차트와 함께 세밀한 조정수치가 적혀있었다.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겠지만 바로 이 점이 이 제품의 가장 큰 특징이다. ‘이탈리아 장인이 한땀한땀 바느질한...’ 이란 드라마 대사처럼 이 모니터는 공장에서 나온 뒤에 전문가가 직접 모니터를 수작업으로 조정(캘리브레이션)했다. 이 종이는 그렇게 캘리브레이션한 결과값이 적혀있는 것이다.


종이박스로 별도 포장된 악세사리킷에는 모니터 설치에 필요한 모든 단자부품과 간단설치 매뉴얼이 들어있었다. 이런 패키지 구성 역시 고가제품으로서의 성의가 돋보이는 부분이다. 다만 별매제품으로 HDMI-HDMI 단자가 빠진 점은 약간 아쉽다. 구입자가 그 정도는 이미 가지고 있을 거란 생각일 수도 있지만 고가제품인 만큼 이런 단자 정도는 만일을 대비해서 하나 넣어주는 것도 좋은 배려가 될 것이다.


나머지 포장을 열고 제품을 꺼냈다. 메탈 느낌으로 만들어진 970 모니터의 디자인은 요즘 유행하고 있는 미니멀리즘을 따랐다. 독일 브라운사 산업 디자이너 디터람스로부터 영감을 받아 유행하는 디자인이다. 제품에서 필요없는 장식과 꾸밈을 철저히 제거하고 본연의 기능을 최대한 살리자는 사상이 미니멀리즘이다. 요즘 애플 제품도 이런 사상에 충실하다.


단순하면서도 기능성을 살린 디자인은 자칫하면 초라하게 보일 수 있다. 스마트 모니터 970은 세련된 느낌을 주기 위해 재질의 특성을 잘 이용했다. 전면 패널은 투명하게 코팅된 듯한 크리스털 클리어패널이고 그 테두리를 메탈릭한 은색 소재가 감싸고 있다. 


이런 좋은 마감처리는 단순히 화면으로 보는 모니터 기능뿐만 아니라 실내에 놓았을 때 인테리어 소품으로서 뛰어난 역할을 할 수 있다. 전문가용 모니터로서 일정한 대중성까지 확보할 수 있는 좋은 선택이다. 


전면 베젤이 얇은 것도 인상적이었다. 집에 놓고 쓰는 모니터는 일반적으로 베젤의 크기를 그다지 신경쓰지 않는다. 모바일 제품인 스마트폰과 태블릿, 노트북이 단 1밀리라도 베젤을 줄이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기능만을 보면 분명 베젤의 크기는 큰 상관이 없다. 하지만 디자인을 신경쓰면 쓸 수록 베젤은 얇아질 수 밖에 없다. 원가인상을 각오하고 베젤 크기를 얇게 만든 건 970 모니터가 명품을 지향한 디자인이라는 증거이다.


특히 이 제품의 독특한 점은 패널을 보조하는 스탠드 부분에 있다. 위 아래로 수직 높이를 조절할 수 있는 기능과 상하의 각도를 기울일 수 있는 틸트 기능이 제공된다. 스탠드 설계의 문제 때문에 스위블이 안되는 것만 제외하면 완벽한 기능성을 가져다 준다. 제품을 보호하기 위해 출고제품에 감싼 프라스틱과 비닐덮개까지도 벗기기 아쉬울 정도로 잘 어울린다.


970 모니터는 뒷면과 옆면 디자인이 특히 매력적이다. 단순한 선의 미학을 살린 스탠드가 가장 뛰어난 기능성을 가지고 있다. 또한 보통 사람들이 잘 보지 않는 패널 뒷면에는 보기 흉한 환기구멍 대신에 결을 넣은 뛰어난 플라스틱 커버로 마감했다. 뒷면까지 완전히 메탈릭 소재로 만드는 것도 좋지만 그렇게 하면 무게가 너무 늘어날 것을 염려한 듯 싶다. 


기능성에서 감탄을 자아낸 부분은 다양한 내장포트의 위치와 배열이다. 이 제품은 전문가용 답게 DVI-DL, DP, MHL 겸용 HDMI 포트, USB 허브 등 풍부한 연결단자를 제공한다. 이 단자들은 모니터를 받치고 있는 원형 받침 사이드에 보이지 않게 숨어있다. 직접적인 모니터 기능을 구현하는 단자는 뒤쪽에, USB허브단자는 옆쪽에 있다.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 것도 없이 매끈해보이면서도 오히려 더 풍부한 기능단자를 쓸 수 있는 것이 재미있다.


앞서도 말했지만 현재 세계 디스플레이 패널의 최고 강자는 삼성이다. 또다른 한국업체인 LG를 합치면 세계시장의 80프로 이상을 점유하고 있다. 누구도 이의를 달지 못할 정도이다. 그렇지만 전문가용 모니터 시장에서 삼성의 브랜드는 그동안 거의 없는 것이나 다름 없었다. 아무리 일반 소비자에게 좋은 평가를 얻어도 전문가들을 위한 시장은 전혀 다른 특징이 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브라운관 시대가 완전히 갔어도 여전히 이쪽은 에이조 등이 차지하고 있었다. 여기에 애플의 시네마 디스플레이도 약간을 점유했다. 그러나 최근 시네마 디스플레이가 아예 PC에 연결하지 못하게 됨에 따라서 선택의 여지가 줄어들었다. 그럼에도 최고급 패널을 전부 차지하고 있는 한국 브랜드의 모니터가 정작 전문가들에게 외면당하는 현실은 전혀 바람직하지 않았다. 


따라서 삼성이 시리즈9 이란 브랜드를 앞세워 고급 모니터 시장을 공략하고 있는 것은 매우  반가운 일이다. 예를 들면 니콘과 캐논, 소니와 펜탁스 등 일본 브랜드가 거의 전부 휩쓸고 있는 고급 DSLR 카메라 분야를 생각해보자. 나는 여기에 한국 브랜드가 없는 것을 허전하게 느껴왔다. 이제 스마트 모니터 970을 통해 전문가용 모니터 시장을 열어가는 삼성의 행보가 기대된다. 


가장 마음에 들었던 점은 터치방식의 전원과 조정 패널이다. 살짝 손가락만 가져다 대도 고급 자동차의 계기판처럼 부드럽게 켜지고 꺼지는 모습이 아름답고도 기능적이다. 5개의 버튼에는 일체의 글자가 아닌 아이콘이 표시된다. 이것은 970 모니터를 특정언어를 넘어선 만국공통의 인터페이스를 갖춘 제품으로 만들어 준다. 과연 디스플레이의 최강자 한국이 내놓는 전문가용 모니터의 가능성은 어느 정도일까?


스마트 모니터 970을 개봉하고 디자인을 살펴보면서 과연 삼성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삼성은 기존시장에 이미 선두업체가 있다고 해도 무서운 속도로 장점을 흡수하면서 성장해간다. 그리고는 끝내 1등을 차지하는 추격자이다. 디자인과 제품포장에서부터 사용자경험과 명품 디자인을 강조한 것에서 그런 추격자의 힘을 느꼈다.



제품을 본격적으로 켜서 쓰기도 전에 이렇게 강렬한 느낌을 받은 것은 처음이었다. 개봉기는 여기까지 하고, 이어지는 다음 포스팅에서는 구체적으로 이 제품의 핵심인 화질에 대해서 알아보기로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