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브 잡스는 소비자가 되어서 무엇을 원하게 될 지 그 본질을 잘 파악해냈다. 스스로가 늘 정답까지 찾는 건 아니었지만 최소한 무엇이 문제인지는 정확히 알았다. 엔지니어나 디자이너는 오히려 자기가 할 수 있는 능력의 한도 안에서 타협하지만 소비자는 그 분야를 모르기에 절대 타협하지 않는다. 유일하게 소비자가 타협하는 부분이라면 바로 가격이다. 하지만 잡스의 애플은 저가제품은 만들어도 싸구려는 만들지 않는다는 정신으로 프리미엄 시장을 주로 노렸기에 그다지 문제는 없었다. 이처럼 최고 제품을 원하는 소비자는 최고 제품을 설계하는 기획자가 될 수 있다.



스티브 잡스가 스스로 세상을 바꿨다고 말하는 매킨토시의 탄생을 살펴보면 이런 점은 더욱 극적이다. 사실 매킨토시를 혁명적 컴퓨터로 만든 기술은 애플이 자체적으로 고안한 아이디어가 아니다. 팔로알토에 위치한 제록스의 연구소에서 나온 아이디어에 기반한다. 미래를 위한 기술을 미리 개발한다는 목적으로 운영된 이 연구소에서는 획기적인 아이디어의 제품이 숨어있었다. 당시 모든 컴퓨터가 채택한 텍스트와 키보드로 움직이는 딱딱한 운영체제 대신, 그래픽을 위주로 마우스가 움직이는 커서를 눌러서 조작하는 아주 쉬운 운영체제를 만들었던 것이다.

그런데 막상 제록스 연구소의 이런 성과들은 제록스 본사의 경영진에게는 인정받지 못한다. 컴퓨터와 별 관계가 없는 회사였던 점도 있지만, 제록스의 모든 사람들이 이런 일련의 아이디어가 컴퓨터를 얼마나 획기적으로 바꿀 수 있는지에 대한 비전을 가지고 있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저 재미있는 장난감으로만 간주하며 연구원들의 장난감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렇지만 이 기술을 견학한 잡스의 눈에는 전혀 다르게 보였다. 최고의 소비자인 잡스에게는 이런 제품을 제대로 만들어 내놓는다면 엄청난 매력을 지닌 제품이 된다는 것이 보인 것이다.



사실 이런 그래픽운영체제 기술이 당시 개인용 컴퓨터에 도입되지 못했던 이유는 하드웨어의 한계에서 비롯된다. 제록스 연구소에서도 이 운영체제는 워크스테이션이라는 전문가급 컴퓨터에서만 구동되었다. 당연히 이런 컴퓨터는 비싸고 무겁다. 싸고 가벼워야 하는 개인용 컴퓨터에는 도입이 불가능하다고 엔지니어들은 미리 포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만일 잡스가 엔지니어적인 지식이 깊었다면 비슷하게 생각하고 포기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잡스는 기술적 한계에는 관심이 없는 소비자 시선에서 이 기술을 보았다. 어떻게든 개인용 컴퓨터로만 가져올 수 있다면 혁명적 변화를 이끌 제품, 소비자 모두가 다투어서 살 제품이 눈에 보였다.


결국 잡스는 매킨토시 프로젝트를 이끌어서 이런 구상을 성공시키고야 만다. 개인용 컴퓨터에 불가능하다고 여겼던 그래픽 운영체제를 비교적 싸고 가벼운 일체형 컴퓨터에 탑재했다. 그 과정에서 사치럽다고 여겨진 마우스까지도 입력장치로 도입했다. 이런 창조적 기술을 조합한 덕분에 매킨토시는 다른 컴퓨터보다 앞선 혁명적 컴퓨터가 되었다. 이후 표절 의혹까지 받은 마이크로소프트의 윈도우가 맥 운영체제의 성능을 비슷하게나마 따라잡은 건 거의 10년이 지나서였다.


스티브 잡스의 창조력은 어디서 나올까?



잡스가 스스로 자랑스럽게 말했던 폰트 기술을 살펴보자. 당시 컴퓨터는 글자폰트가 다양하지 못했다. 디스플레이의 해상도는 높아지고 컴퓨터 성능도 향상되었지만 여전히 한 가지 폰트만이 화면에 표시되었다. 사람들이 컴퓨터는 단지 계산하는 기계라고 생각했기에 그 이상의 어떤 것을 바라지 않았다. 그렇지만 컴퓨터가 아닌 책과 신문, 잡지는 달랐다. 사람들의 눈을 즐겁게 해주고, 다양한 감정을 표현하는 폰트가 적용되어 있었다.

잡스가 학창시절에 재미있게 들었던 수업은 캘리그라피였다. 알파벳의 글자를 다양하게 디자인하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고 했다. 잡스는 컴퓨터를 좋아했지만 동시에 그런 인문학적 요소를 사랑했다. 밥딜런의 음악과 히피의 사상을 추구한 것도 그런 이유다. 다만 보통 사람들은 두 가지를 그냥 분리해서 생각한다. 컴퓨터는 컴퓨터이고, 인문학은 인문학이다. 직장인이 스스로의 사적인 취미와 공적인 일을 분리해서 생각하듯이 말이다.


그러나 잡스의 특이한 점은 자기 생활속에서 얼핏 컴퓨터와 전혀 관계없이 보이는 부분을 접목시키려고 애썼다는 것이다. 그래서 매킨토시 운영체제에는 벡터 그래픽을 사용한 다양한 폰트가 적용되었다. 도트로 찍어서 만든 것이 아니라, 방향값으로 만들어진 이 폰트들은 확대하거나 축소해도 모양이 자연스럽다. 따라서 매킨토시 사용자들은 아름답고 멋진 폰트를 써서 삶을 풍부하게 만들 수 있었다. 또한 이 기술은 인쇄업계를 변화시켰다. 컴퓨터 화면에 나오는 글자와 그림을 그대로 레이저프린터로 인쇄할 수 있는 포스트스크립트 기술이 같이 개발된 것이다. 이후 매킨토시는 전자탁상인쇄(DTP)시장을 만들고 이끌었다. 오늘날 거의 모든 책은 컴퓨터에서 미리 디자인되고 프린터로 샘플이 출력된다.

창조적인 기술은 이렇듯 비밀스러운 연구소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 생활 속에 있다. 잡스는 그것을 발견해서 제품에 접목하려고 끊임없이 시도했다. 때로는 어리석은 실패로 끝날 경우도 있었지만 많은 경우에 그것은 큰 성공을 거두었다.


현재의 매킨토시 노트북에 적용되고 있는 전원연결장치인 맥세이프(magsafe)를 살펴보자. 이 기술은 특별히 어떤 연구소의 첨단 컴퓨터에서 나온 아이디어가 아니다. 또한 잡스가 세계에서 제일 먼저 생각해낸 아이디어도 아니다. 이것은 일본의 전기밭솥에서 힌트를 얻어 만들어졌다.


전기밥솥 사용자들은 예전부터 전원 케이블에 발이 걸려 넘어지곤 했다. 그럴 때 식탁 위 밥솥이 떨어지는 사고를 종종 경험했다. 특히 아이가 걸려 넘어지면 돌이킬 수 없는 위험한 사고로 이어졌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일본 밥솥 브랜드들은 밥솥에 전선을 손쉽게 정리할 수 있는 장치를 부착했다. 또한 전원연결부를 자석으로 연결해서 일정수준 이상의 힘이 가해지면 저절로 선이 떨어져 나가도록 했다. 선이 본체를 끌고와서 떨어뜨리는 더 큰 사고를 예방하기 위해서였다.
 
잡스는 컴퓨터 사용자 역시 똑같은 문제를 겪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전원 케이블에 발이 걸리면 책상 위의 노트북이 바닥으로 떨어질 수 있다. 노트북이 그대로 박살이 나거나 고장나게 된다. 따라서 밭솥의 아이디어는 컴퓨터에도 적용될 수 있다고 생각해서 2006년에 맥세이프를 출시했다. 전원 케이블이 무언가에 걸리면 자석으로 붙어 있던 전원 접촉부분이 바로 분리된다. 맥세이프가 출시되자많은 애플 팬보이가 홈페이지를 방문해 가장 빛나는 아이디어라고 칭찬의 글을 썼다. 하지만 사실 일본의 전기밥솥이나 월마트에서 판매하는 튀김기에 달린 낡은 아이디어라고 볼 수도 있다. 분명 맥세이프는 완전히 새로운 아이디어는 아니다. 하지만 잡스는 완전히 다른 분야에서 아이디어를 가져와 진정한 차별화를 이뤄 냈다.


맥세이프는 잡스가 가진 창조적인 조합의 기술이 어디서 나오는 지를 가장 잘 보여준다. 전혀 관련없어 보이는 영역이라고 해도 그것이 가진 본질을 간파하고 컴퓨터 사용에도 맞는지를 생각해보는 시도이다. 동종 영역에서의 기술을 보고 베끼려는 생각은 누구든 할 수 있다. 그러나 전혀 다른 영역의 기술을 보고 도입해보려는 생각을 하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없다. 잡스의 창의성을 배우려면 생활 속 모든 영역을 유심히 보고 생각해보아야 한다.

 
* 이 글은 필자가 전자책 서점 북릿에 기고한 원고를 가공하여 작성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