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예 기사에서 늘 단골처럼 쓰는 단어가 있다. 이른바 '굴욕' 이라는 단어다. 곰곰히 따져보면 매우 심각한 의미인 이 단어는 예를 들어 김태희의 굴욕, 소녀시대의 굴욕 하는 식으로 널리 쓰이면서 상당히 장난스러운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단어의 원 뜻은 '몸을 숙이고 욕을 당하다.' 인데 단순히 키가 좀 작아보였다든가, 얼굴이 좀 커보였다는 정도로 굴욕이란 단어를 양산하고 있다.



이번에는 IT업계를 돌아보자. IT업계에서 장난처럼 요즘 쓰이는 단어는 '몰락' 이다. 몰락이란 단어 역시 꺼져 들어가듯이 깊숙이 떨어져버렸다는 뜻이 있다. 가문의 몰락이라든가 나라의 몰락이라면 거의 멸망 직전이라는 뜻으로 쓰일 정도였다. 하지만 근래는 위기 상황 정도만 되어도 쉽게 몰락이라고 말한다. 심지어 여전히 이익을 내고 있어도 이익폭이 크게 감소되면 몰락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IT업계의 영원한 강자였던 HP를 둘러싸고 드디어 외국언론에서 '몰락'이란 단어가 흘러나오기게 이르렀다. 이것은 상당히 충격적인 기사이다.(출처) 



애플 창업 당시 공동창업자이던 스티브 워즈니악은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기 꺼렸다.

그 회사가 연구개발에 적극적인데다 실리콘밸리에서 가장 좋은 회사였기 때문이다. 스티브 잡스는 그를 끌어들이기 위해 갖은 노력을 해야 했을 정도였다.

이 기업이 바로 HP다. 1939년 실리콘밸리의 한 창고에서 출발해 세계 정보기술(IT)업계의 정점에 섰던 회사다. 그런데 이런 HP가 흔들리고 있다. 1년만에 53달러던 주가는 21달러대로 추락했다. 기업가치가 1년만에 40%나 날아간 것이다. 세계 100대 브랜드 기업 순위에서도 1년만에 8계단이나 미끄러지며 26위 밀려났다. 중국의 인터넷 업체 바이두 보다도 낮은 순위다.

5월 25일(현지시간) 영국 일간 파이낸셜타임즈는 HP의 몰락 이유에 대해 기본에 충실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평가했다.

최근 HP의 시가총액은 420억달러에 그치고 있다. 이는 지난 5년간 HP가 인수합병에 쏟아 부은 금액과 동일하다는 것이 FT의 지적이다. 기술을 개발하는 대신 돈으로 기업을 사들이며 덩치를 키우는데 주력했지만 정작 사들인 기술들은 쓸모가 없게 됐다. 인력은 계속 늘어 지난해 10월 기준 34만9000명에 달했다.

1년만에 주가가 절반 이하로 떨어졌다면 위기인 것은 틀림없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몰락이라고 말하는 것은 어쩐지 석연치 않다. 잡스 복귀 후 애플 조차도 회복과정에서 단기적으로는 주가가 더욱 곤두박질친 적이 있다. 중요한 것은 어째서 주가하락이나 이익 감소가 일어났는가 하는 점이며, 결국 회사의 미래가 어떤가에 대한 고찰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우선 같은 기사에서는 HP의 부진이유를 이렇게 말하고 있다.

겉으로 보면 HP위기는 PC사업에 있는듯 하지만 실상은 다르다는 것이 FT의 분석이다.

태블릿PC와 스마트폰의 급성장에 PC분야가 위축된 것은 사실이지만 고가의 기업 고객용 서버 시스템을 공급하는 사업도 다운사이징과 가상화의 확산 속에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서비스 분야도 마찬가지다. 인수합병으로 품에 안은 유명 정보기술 서비스 업체 EDS에 기반한 HP의 서비스사업부는 PWC를 인수한 IBM과의 경쟁에서 뒤쳐지기만 했다. HP 서비스 사업부는 전반적인 구조개편을 진행 중이지만 역시나 미래가 불투명하다.

HP의 황금알을 낳는 거위였던 프린터 사업도 위기에 처해있다. '화수분'과 같은 이익을 내던 이 사업부도 개인은 물론 기업의 인쇄량이 모두 줄어들며 난맥에 빠진 상황이다. 설상 가상으로 삼성전자와 같은 후발주자들이 치고 나와 줄어든 시장을 나눠가지게 됐다.



단순히 PC하드웨어 산업이 발목을 잡는 것이 아니란 분석이다. 총체적으로 전 사업영역에 걸쳐서 심각한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고 한다. 파이낸셜 타임즈의 분석은 전반적으로 봐서 무리가 없다. 아마도 대부분은 별다른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저런 무난한 분석과 몰락이라는 다소 과격한 표현 뒤에 비젼이 결핍되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HP의 몰락? 위기는 어디에서 오는가.

우선 나는 HP가 몰락했다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위기 혹은 전환점을 맞은 건 사실이다. 그렇지만 이 전환점을 아직 어떻게 넘을 지 결정하지도 않았는데 돌이킬 수 없는 하향세란 뜻으로 몰락했다고 말하는 건 잘못되었다. HP에게는 아직 약간의 시간이 있다.

여러가지를 나열하지만 HP의 위기는 결국 하나의 문제점에서 온다. HP만이 가능한 것, HP만이 가진 매력, HP만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것을 찾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여러모로 무난하고 좋은 제품과 솔루션을 만들지만 점점 새로운 업체들이 진입하는 가운데 HP가 절대로 다른 업체의 도전을 용납하지 않는 분야가 있는가?



내 생각에 그런 분야는 없다. 컴퓨터 데스크탑과 노트북은 약간의 품질 차이를 제외하고 다른 업체와 차이점이 없다. 서비스 분야에서는 어차피 특유의 기술을 가진 게 아니며, 아예 하드웨어를 포기하고 솔루션에만 집중하는 IBM에 우위를 가지지 못한다. 프린터 역시 이제는 태블릿과 스마트폰에 밀려 인쇄 수요 자체가 줄고 있다. 신규 사업에서 HP만이 가능한 분야가 있기는 한가? 한때 의욕적으로 추진하려고 했던 독자 운영체제 역시 접어버렸다.

HP의 위기는 결국 특유의 영역이 없어진 데서 생겼다. 따라서 이제부터라도 특유의 영역을 만들려는 선택과 집중이 있다면 위기는 해소될 수 있다. 하지만 지금과 같이 그저 상표만 있을 뿐 그저그런 제품을 만들기만 한다면 진정한 의미에서의 몰락이 다가올 수도 있다. 개인적으로 지금 내가 쓰는 노트북이 HP제품이다. 부디 HP의 분발을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