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한국은 일본에 많은 경쟁의식을 가진 적이 있었다. 식민지 상태에서 벗어난 지도 얼마되지 않은 데다가 양국의 경제, 사회적인 격차가 뚜렷할 때는 특히 심했다. 축구를 비롯해서 한일전만 벌어지면 이상할 정도로 불타올라서 일본만은 반드시 잡겠다는 심리가 있었던 게 사실이다. 반일을 넘어 극일로 가자는 문구가 선명하게 모두에게 자리잡았다.



그런데 2012년 현재, 한국은 상당한 부분에서 일본을 따라잡았다. 또한 분야에 따라서는 압도하는 분야도 생겼다. 일본의 자존심이던 공업부문 - 그 가운데서도 전자분야에서 한국의 추월은 그래서 한국사람에게는 기쁨이었다. 

그렇지만 반대로 일본에게는 상당한 충격이었던 모양이다. 위협론이 제기될 때마다 '한국은 아직 경쟁상대가 아니다. 전혀 의식하지 않고 있다.' 라고 말하던 것이 얼마전인데 이제는 대놓고 '한국을 따라잡아야 한다.' 라고 말하는 것이다. 기업들의 움직임에 맞춰 일본정부까지도 정책으로 지원해주기에 이르렀다. 반도체를 비롯해 차세대 디스플레이인 OLED의 교체시기를 기회로 따라잡아보겠다는 것이다. (출처)



일본 전자 기업들은 최근 들어 한국의 삼성전자와 LG전자를 추격하기 위해 합종연횡을 본격화하고 있다. 전통의 TV라이벌인 소니와 파나소닉의 OLED TV 기술개발 협상에 앞서 지난 2월에는 일본의 르네사스사와 파나소닉ㆍ후지쓰가 시스템반도체 사업 통합을 전제로 협상에 들어갔다. 정부가 주도하는 산업혁신기구가 지분을 출자하고 사업을 전담할 법인을 새로 만드는 방안이다.

또 4월에는 소니와 도시바ㆍ히타치 등 3개사가 중소형 패널을 공동 생산하기 위해 재팬디스플레이를 설립했다. 오쓰카 슈이치 사장은 설립식에서 "오는 2015년까지 중소형 패널 시장에서의 시장 점유율을 30%까지 끌어올리겠다"며 "올해 안에 OLED 패널 샘플을 내놓은 뒤 내년부터 본격적으로 대량 양산하겠다"고 밝혔다. 국내 전자업체에 사실상 선전포고를 한 셈이나 마찬가지다.

전문가들은 비메모리 반도체와 LCD, OLED TV 및 패널 등의 분야에서 한국 업체들에 크게 뒤처진 만큼 이를 뒤쫓기 위해 짝짓기까지 서슴지 않는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반도체 업계의 한 관계자는 "시스템반도체의 경우 축적된 R & D 능력과 막대한 설비투자금액이 결합해야 시장에서 성과를 낼 수 있다"며 "일본 기업들의 연합한다 해도 단숨에 기술력을 축적하기는 어려울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일본은 분명 아직도 저력이 있다. 또한 한국이 부분적으로 앞질렀다고 해도 사회기반이나 각종 산업의 기초능력에서는 한국보다 우위에 있다. 특히 소재나 부품산업에서 일본의 경쟁력은 세계에서도 인정받고 있다. 무분별하게 '일본은 끝났다.' 라고 말하며 우습게 보는 것은 바른 시각이 아니다.

하지만 중요한 점이 하나 있다. 일본의 저런 노력이 과연 스스로의 문제를 제대로 깨닫고 움직이는 것인가, 아니면 단지 궁지에 몰린 끝에 뭉치면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될 거란 안이한 판단이냐는 것이다. 방향 자체가 잘못되어 있다면 이런 노력은 그저 연명에 불과할 뿐이다. 일본 산업 전체의 지속적인 경쟁력 감퇴를 피할 수 없다.

일본의 반도체 전문가인 유노가미 다카시는 '일본 반도체 패전' 이란 책을 통해 일본의 문제점을 이렇게 진단하고 있다.



일본 반도체 쇠퇴는 과잉기술로 고품질 제품을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실질적으로 소비자가 필요로 하는 성능을 초과한 오버스펙의 제품을 장인정신이란 명분으로 만들었다. 그런데 그런 제품을 만드는 데 드는 과다공정과 경비 때문에 비싸진 제품을 시장이 외면하고 있다.

이 부분은 한번 음미할 만 하다. 과연 그런 것일까. 우리가 일본 제품을 대하면서 정말로 이게 성능이 너무 좋은데 가격이 너무 높아서 못사겠다고 생각하고 있는가? 내 생각에 그렇지는 않다. 소재 부품이나 일부 소수 제품은 그럴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요즘 일본 제품은 1년만 넘으면 고장난다는 '소니 타이머' 란 비아냥과 함께 보다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다.

인터넷 커뮤니티 하나에서 좀 다른 의견 하나를 보았다.

일본회사의 고질적인 문제점이죠. 늘, 자의적인 제멋대로의 품질을 생각하며 양보와 타협을 하지 않죠. 일반소비자들이 민감하게 반응하는 부분에 집중하고,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은 부분은 내버려두는 것이 필요한데, 일본은 그냥 자기 뚝심으로 민감하게 반응하든 말든 자기가 원하는 부분에 집중하죠. 

일본 특유의 개똥철학 때문인데, 사실 일본제품들은 일반적으로 명품이라고 하는 독일제품이나 이탈리아제품보다도 어떤 면에서는 훨씬 더 명품인 경우가 많습니다. 다만 다른면이 평균이하죠. 부분에 집착해서 그 부분을 특출나게 만드는 건 잘하는데 제품 전체를 조망하는 능력이 떨어집니다. 그래서 일본제품은 고가라인으로 갈수록 매니아용품이 되는 한계가 있어요.



얼핏 비슷해보이지만 이것이 보다 문제의 핵심에 근접한다고 생각한다. 전자업계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닌, 일본의 모든 회사들이 가진 근본 문제에 가깝다. 그리고 외부에서 보는 이 점을 막상 일본인들이 통감하지 못하고 있다.

일본의 전자연합, 한국 추격에 성공할까?

위에서 유노가미 다케시가 말한 과잉기술과 오버스펙이란 말은 제품 전체가 고성능이란 뜻으로 쓰인다. 즉 제품 자체의 매력은 분명히 뛰어나다는 뜻인데 단지 가격이 너무 높아서 안 팔린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일본의 전자연합은 함께 뭉쳐서 중복투자를 줄이고 연구개발을 공유해서 원가를 줄이기만 하면 한국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아래쪽 의견은 좀 다르다. 제품 전체를 조망하는 능력이 떨어진다는 건 제품 전체 매력이 떨어진다는 뜻이다. 제품 내부 여러 스펙과 컨셉 가운데 어디에 보다 많은 돈을 쓰고, 어디는 좀 적당히 만들어도 되는 지를 모른다는 뜻이다. 오히려 엔지니어가 현장에서 자의적으로 판단한 곳에 가중치를 두기에 전략적으로 소비자가 원하는 부분에 고품질과 매력적인 요소를 두지 못한다는 것이다. 


쉬운 비유를 들어보면 소비자가 보다 빠른 자동차를 원하는 데, 일본 엔지니어는 자동차는 내장재가 중요하다며 그곳에 온 신경을 집중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전체적인 제품의 조망으로 볼 때 전혀 매력적이지 않은 제품이 된다. 이건 가격이 비싸고 싸고의 문제가 아니다. 한국은 소비자의 그런 요구를 기업이 전략적으로 반영했고, 일본은 그러지 못했다.

결국 이런 점을 깨닫지 못한 채 단순히 뭉쳐서 원가절감으로만 한국을 이기려는 일본의 전자연합은 그다지 위협적이지 못하다. 그들의 한국추격에는 근본적인 성찰이 결여되어 있다. 일본의 현장 중시와 장인정신은 존중할 만한 것이긴 하다. 그러나 자본주의 경제에서 소비자의 요구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그것이 설령 장인정신이라고 해도 말이다. 그걸 깨닫지 못하는 것이 일본의 안타까운 어리석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