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잠시동안 국민을 정치의 주인이라고 생각하게 해주었던 선거가 끝났다. 그 결과야 어떻게 되었든 앞으로 4년간 한국이 어떤 방향으로 정책을 잡을 것인지 민주적으로 정해졌다는 건 기쁜 일이다.





이번 선거에서 IT평론가로서 내가 주목한 것은 SNS였다. 특히 파워 트위터리안으로 불리는 소설가 이외수를 둘러싼 일련의 사건이 눈길을 끌었다. 우선 관련 기사를 소개한다.(출처)


팔로어가 132만명에 달해 ‘트위터 대통령(트통령)’으로 불리는 작가 이외수 씨가 트위터에서 집중포화를 맞고 있다고 한다. 공공연히 야권 성향을 드러내온 이씨가 4·11총선에서 10여명의 후보를 추천했는데, 그중에 자신이 사는 지역구의 새누리당 후보가 포함되었다는 이유에서다. 총선 결과 강원도에서 야권이 전패하자 야당 지지자들은 이를 이씨 탓으로 몰아붙였다.


이씨는 선거 이튿날 “제 얼굴에 침을 뱉으시는 분들의 분노는 충분히 이해한다”면서도 “강원도를 온통 붉은색으로 물들인 것이 이외수라면, 다른 지역을 온통 붉은색으로 물들인 것은 누구냐”며 억울해 했다.


트위터에서 유명세를 탄 인물이 트위터로 인해 곤욕을 겪는 모습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트위터(twitter)는 영어로 ‘지저귀다, 지껄이다’란 뜻이다. 140자 이내의 단문으로 즉흥적인 기분을 주고받는 공간이다. 태생부터가 이성 합리성 숙고 등과는 거리가 멀다는 얘기다. 일상의 소소한 대화 수준이면 더할 나위 없이 유용했을 공간이 우리나라에선 이념과 정치색의 이종격투기장으로 변질되고 말았다.


이씨를 둘러싼 트위터 여론은 국내 정치문화의 후진성을 고스란히 노출한다. 이념이 같은 집단이 끼리끼리 듣고 싶은 말만 주고받으면서 고도근 시 상태가 돼 ‘가짜 여론’에 함몰되는 것이다. 끊임없이 ‘너는 누구 편이냐’고 추궁하고, 다른 의견에는 욕설과 막말을 퍼붓는 사이버 인민재판장과 다를 바 없다. 트통령이란 이씨가 그런 줄 몰랐다면 순진한 것이고, 이런 걸 소통이라고 여긴다면 애처로울 따름이다.


이 기사에선 사실 객관적인 팩트는 얼마되지 않는다. 요약하면 그동안 야당 성향의 발언을 트위터로 해와서 인기를 얻었던 이외수였다. 그런데 갑자기 강원도 지역구의 여당후보를 지지하는 발언을 했다. 그러자 야당 성향으로 알고 좋아했던 팔로워들이 비난을 한 것이다. 이에 이외수는 수많은 야당 지지 발언을 했는데 소신껏 여당 지지 발언 하나 한 것이 그리 큰 문제냐고 반발했다. 이 외에 나머지 트위터의 뜻이라든가 뒤의 감상은 그저 이 기사를 쓴 한경 쪽의 정치성향이고 주장일 뿐이다. 




그렇다면 과연 한경의 주장대로 트위터는 그저 쓰레기장에 불과한 것인가? 별 가치도 없는 가짜여론의 경연장일 뿐인가? 유감스럽지만 그건 한경 기자를 포함한 언론사의 희망사항일 것이다. SNS를 경쟁상대로 생각하는 언론의 위기감에서 나온 악의적 해석이다. 이 기사에서도 정작 심도있는 중요한 고찰은 없고 원색적 비난만 있다. IT평론가로서 내가 나름대로 이 사건을 보는 가치있는 관점을 하나 제시해보려고 한다.


트위터 이외수를 통해서 본 SNS의 특징은?


일반적으로 우리는 지금 SNS를 미디어 혹은 그에 준하는 매체로 보려고 한다. 심지어 음원파일에 불과한 나는 꼼수다 조차도 파급력이 강해지자 언론으로 규정하며 사회적 책임을 지우려는 시도가 있다. SNS가 언론이든 아니든 그 특성이 어떤 것인가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일반적인 미디어와 언론은 혼자가 아닌 다수가 만든다. 그리고 다수의 개인적 생각은 당연히 하나로 일치되지 않는다. 하지만 미디어는 마치 하나인 것 처럼 일관된 관점을 통해 세상을 해석해야 한다. 그래서 정해놓은 것이 바로 해당 미디어의 '논조' 혹은 '방침' 이다. 이것을 통해 기자나 편집장의 생각이 약간 다르더라도 이것에 맞춰 하나의 일관성을 가지고 독자를 대할 수 있다.



독자 역시 이 논조가 마음에 들어서 미디어를 보거나, 참고하는 사람들이다. 광고주 역시 논조에 영향을 받는다. 예를 들어 파생상품을 사기술이라 비난하는 논조를 가진 미디어가 있다면 그곳에 파생상품을 취급하는 금융기관이 광고를 낼 리가 없다. 따라서 미디어는 구성원 개인이 함부로 논조를 바꿀 수 없다. 심지어 논조를 바꾸기로 회사가 합의를 봤더라도 독자나 광고주를 의식하면 함부로 바꾸지 못하고 반드시 이유를 설명하고 스무스하게 전환하는 과정을 거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 면에서 트위터나 페이스북 같은 SNS는 분명히 다르다. 일단 운영하는 사람이 대부분 개인 혼자로서 생각을 자유롭게 말하는 곳이다. 소셜 미디어이므로 독자는 원칙적으로 친분이 있는 사람이며 구독료를 받거나 광고로 수입을 얻는 경우도 없다. 그러므로 SNS에는 논조라는 게 없다. 있다면 그저 운영하는 개인의 주관이 있을 뿐인데 알다시피 개인의 생각은 바뀌기 쉽다.


이외수의 트위터 역시 마찬가지다. 이곳에는 공식이든 비공식이든 논조라는 게 있을 수 없다. 그러니까 이외수가 어떤 정치적 견해를 보이든, 어떤 급격한 생각의 변화를 말하든 아무런 문제될 것이 없다. 문제는 정작 그런 이외수의 견해 몇 개를 듣고 일방적으로 논조 있는 미디어의 성격을 기대한 사람들에게 있다. 분명히 말하건대 아무도 SNS에 미디어의 책임이나 일관된 논조를 요구할 수 없다. 구독료나 유료광고라도 주기 전에는 말이다. 이외수는 법적이든 도덕적이든 잘못한 것이 전혀 없다.



물론 아쉬운 점은 있다. 법과 도덕적으로 완벽하다고 그게 전부는 아니다. 사회적으로 큰 힘을 가진 사람에게는 그만큼의 책임이 지워지는 법이다. 이외수에게 굳이 잘못이 있다면 통닭 광고만 트윗으로 날려도 거금이 들어오는 그의 영향력을 너무 가볍게 생각했다는 점일 것이다. 사람들은 영향력이 큰 사람에게는 보다 큰 기대를 하게 마련이다.


나도 소설가지만 본래 예술가는 인정과 감성에 약하다. 하지만 정치는 인정과 감성이 메인으로 작용하는 곳이 아니다. 이번 이외수 사건을 통해 SNS가 보다 정체성을 분명히 하면서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