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미래를 내다본다는 건 참 힘든 일이다. 무한한 가능성을 향해 지혜가 활짝 열려있으면 좋으련만, 슬프게도 사람은 기업 이름 하나 짓는 것에서조차 미래를 내다보지 못한다. 예를 들어 보자. 미국 메이저 영화사 '20세기 폭스'는 아마도 자기들이 21세기가 될 때까지 생존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던 걸까? 21세기가 되었을 때 그들은 회사이름 변경을 심각하게 고민해야 했다. 21세기가 되었는데 '20세기' 폭스라는 이름은 너무도 낡아 보이지 때문이다. 이들은 진지한 논의를 거쳐 이름을 바꾸지 않기로 했다.



영화사에만 해당되는 문제일까? 우리가 너무도 잘 하는 아이폰 제조사 애플을 보자. 이 회사는 원래 '애플 컴퓨터' 라는 명칭을 썼다. 컴퓨터를 전문으로 취급하겠다는 비전을 제시한 좋은 명칭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기업의 변화에 맞춰 컴퓨터 뿐만이 아닌 음악기기인 아이팟, 휴대전화인 아이폰을 생산하고, 아이튠스란 음원 서비스업을 하게 되면서부터였다. 애플 컴퓨터는 더이상 컴퓨터와 주변기기만 만드는 업체가 아니게 된 것이다.

결국 애플은 먼저 존재했던 '애플 레코드'에게 소송을 당하고 합의금을 내면서까지 회사영역을 넓혔고 회사 이름을 '애플'로 바꿨다. 미래를 내다보는 천재 스티브 잡스마저 회사를 세우던 청년시절에는 설마 애플이 음악과 전자책, 휴대폰까지 취급하게 될 줄은 몰랐던 결과다.

이런 가운데 자칫 실소가 나오는 뉴스 하나가 나왔다. 미국의 전통있는 회사 '텍사스 인스트루먼트' 에 대한 뉴스다. 이 회사는 현재 많은 스마트폰과 프로젝터 등에 들어가는 칩셋을 만들고 있는 미국회사다. (출처)


텍사스 인스트루먼트(TI)는 2011년 4분기 실적보고에서 예상보다 높은 칩 판매 실적을 발표했지만, 경비절감을 위해 텍사스와 일본 공장들을 폐쇄할 것이라고 말했다. 로이터는 TI가 경비절감의 일환책으로 향후 18개월 내에 상기 두 공장들을 폐쇄하고, 다른 공장들의 인력을 증가시킬 것이라고 말했다.
 
얼핏 보면 평범한 뉴스다. 그저 구조조정 이야기인데 이게 뭐가 흥미있냐고 물을 수 있다. 만일 그렇다면 당신은 관찰력이 약간 부족한 것 같다. 마치 숨은 그림찾기처럼 이 회사의 명칭을 다시 한번 기억하면서 저 뉴스를 보자.

그렇다. 이 회사는 '텍사스' 인스트루먼트다. 텍사스에 근거지를 두고 여기서 공장을 가지고 생산하는 것을 모토로 했기에 이런 이름을 가졌다. 그런데 위의 뉴스를 보라. 경비절감을 위해 텍사스의 공장을 폐쇄한다고 했다. 그리고 다른 곳에 인력을 증가시킨다고 한다.



이상하지 않는가? 붕어빵에는 붕어가 들어있지 않다지만, 텍사스 인스트루먼트 회사가 막상 텍사스에 있는 공장을 없애는 것이다. 그럼 이 회사 이름에 담긴 정체성은 뭐란 말인가? 말하자면 서울 우유가 서울에는 회사가 전혀 없고, 브리티쉬 항공사가 영국 노선은 운영하지 않으면 이런 느낌과 비슷할까? 

첨단 IT기업, 명칭의 모순은 왜 생길까?

이건 그저 웃고 넘어갈 수도 있는 이야기다. 하지만 심각하게 생각해보면 매우 슬프고도 뼈아픈 교훈을 담고 있다. 

1) 영속적인 기업이 이익을 내고 번영하기 위해서는 특정지역을 고수할 수 없다. 그럼에도 창립자들은 종종 멀리 내다보지 못한다. 지금 한 지역에 뿌리를 두었으니 수십년, 수백년 후에도 당연히 그럴 거란 착각이다. 실제로는 절대 그럴 수 없다. 특히 생산시설에 관해서는 그 나라가 선진국이 될 수록 공장은 해외, 혹은 보다 노동조건이 좋은 지역으로 옮겨갈 수 밖에 없다.

 
2) 기업이 취급하는 분야 역시 변할 수 있다. 첨단 IT기업은 더욱 그렇다. IBM은 해석해보면 '인터내셔널 비즈니스 머신(국제 사무 기기)' 다. 초기에 이 회사는 중대형 컴퓨터를 주력사업으로 했고 중기에는 익히 아는 개인용 PC를 만들어 팔았다. 이름과 품목이 일치했다. 나중에 업무용 노트북 씽크패드를 제조했을 때까지도 그랬다. 그러나 현재의 IBM을 보자. 주로 기업용의 솔루션을 취급하는데 소프트웨어에 더 치중하고 있다. 더이상은 '머신(기기)' 업체가 아닌 것이다. 국제사무솔루션(IBS)으로 회사명을 바꿔야 할지도 모른다.

일본의 닌텐도는 차라리 회사이름에 정체성이 들어가 있지 않기에 이런 모순을 면했다. 처음 화투로부터 시작한 이 회사는 매직암 같은 장난감에서부터 시작해서 콘솔 게임기, 휴대용 게임기를 만들었다. 나중에는 포켓몬 같은 캐릭터 산업까지 손대기에 이르렀다. 그냥 추상적인 이름을 지었기에 명칭의 모순을 피할 수 있었다.



사실 지역이나 품목에 밀접한 기업이름은 보다 친근한 느낌을 주긴 한다. 국내에서도 제일제당 같은 경우가 그렇다. 이름만 봐도 설탕업체란 걸 알 수 있다. 그러나 CJ로 바뀐 이 회사는 더이상 설탕만 파는 기업이 아니다. 케이블 방송에서부터 각종 식품업 전반까지 맡고 있다. 

어쩌면 첨단 기업이 명칭의 모순을 겪는다는 건 대부분 좋은 일인지도 모른다. 그만큼 회사가 오래 살아남았으며 앞으로도 번영 가능성이 있음을 뜻하기 때문이다. 다만 처음부터 이런 특성을 알고 보다 확장성 있는 이름을 지었으면 어떨까? 라는 아쉬움은 있다.


그건 그렇고 텍사스 인스트루먼트는 앞으로 무엇이라 불러야 할까? 중국에 공장이 많으니까 차이나 인스트루먼트? 아니면 포기하고 그냥 인스트루먼트? 혹시 독자 가운데 좋은 이름이 떠오르면 저 회사 이메일로 보내주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