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책을 이야기할 때마다 상당히 답답한 느낌을 받는다. 아마도 내가 주로 컨텐츠 생산자 입장이다보니 이것을 사업적으로만 재단하려는 출판사와 유통사의 편에 서지 못하기 때문인 듯 싶다. 어쨌든 국내 전자책을 놓고 볼 때 당장의 사업성을 넘어서 거대한 흐름을 보지 못하는 게 안타깝다. 비유하자면 밖에서는 산업혁명이 일어나는 데 우리는 왕실제사가 삼년상이냐 일년상이냐를 놓고 따지던 역사의 어느 한 때와도 비슷하다.


그나마 희망을 이야기해보자고 생각하고 눈을 돌려보니 눈에 띄는 게 있다. 바로 만화책이다. 국내에서 소설을 포함한 단행본 시장이 상당한 불황인 것과 달리 만화책 시장은 기복은 있어도 대체로 늘 상황이 좋았다. 특히 국내만화가 아닌 해외만화의 번역본 시장에 있어서는 시장 자체가 이미 든든하게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면에서 이번에 대표적 만화 출판사인 ‘학산문화사’가 블로터닷넷과 인터뷰한 내용이 눈길을 끌었다. 종이만화책의 대표주자격이며 대여점을 채우는 큰 손인 이 출판사가 의외로 디지털 만화책- 즉 전자책 사업에 큰 관심을 보였기 때문이다. (출처) 

 

단행본 출판사는 북포티아 파산 이후로 전자책 사업에 대해 주춤했지만, 만화 출판사는 꾸준하게 콘텐츠를 온라인으로 제공해왔다. 이정근 학산문화사 디지털사업팀 담당자는 만화를 디지털 형태로 서비스한 것은 EPUB 전자책 시장이 생기기 전부터지만, 본격적으로 한 건 2004년께라고 말했다.

단행본 위주의 전자책 시장이 멈칫하는 동안 만화책 분야는 꾸준히 디지털 시장을 키웠다. 포털사이트와 만화 전문 사이트, 피처폰이 주요 장터였다. 학산문화사도 마찬가지였다.
온라인으로 처음 서비스할 때는 스트리밍 방식으로 진행됐는데, 요금은 책 대여점과 비슷하게 1권에 24시간 300원으로 책정됐다. 피처폰 서비스는 휴대폰에 내장한 형태로 제공돼 탄탄한 마케팅과 판매망을 갖췄다. 피처폰은 온라인 요금과 다르게 컷에 따라 요금을 매겼다.

“그때는 엄밀히 말해 대여시장이었지요. 만화책을 디지털로 서비스하는데 다운로드라는 개념은 불과 1~2년 전부터 나왔습니다. 물론, 만화책을 파일로 내려받는 길이 있긴 했지만, 불법이었죠. 우리가 직접 권당 요금을 정해서 다운로드 판매를 시작한 건 지난해부터입니다.”

미국의 마블과 DC코믹스 같은 앱을 내놓고 싶은 게 학산문화사의 속내라는 이야기다. 하지만 앱을 출시하고 국내에서 교보문고나 예스24, T스토어, 리더스허브 만큼 이용자를 끌어올 수 있는지가 관건이 될 것으로 보인다.

학산문화사는 앞으로 디지털 서비스에 맞는 콘텐츠도 마련할 계획이다. 첫 단추는 ‘비주얼 노벨’이 맡는다. 비주얼 노벨은 일본에서 탄생한 장르인데 애니메이션과 이미지, 글이 있는 융합 콘텐츠이다. 이용자가 비주얼 노벨을 읽다 선택지를 골라 스토리를 바꿀 수 있어 게임과도 비슷하다. 책을 읽다가 ‘문을 연다’와 ‘창문을 깬다’ 등 명령어를 입력해 이용자가 이야기를 만드는 게 특징이다.


학산문화사 내부에서도 미래에 대한 많은 고민이 있었던 것 같다. 특히 아마존이 방대한 컨텐츠를 앞세워 세계시장을 장악하는 가운데 가만히 있다가 한국은 전자책 시장에서 영미권 컨텐츠는 아마존에, 일본쪽 컨텐츠는 일본 업체에 전부 시장을 내줄 판이다. 디지털 다운로드가 대세가 되면 사실상 국경이 무의미해지기 때문이다. 지사를 세울 필요도 없고, 현지 투자도 거의 필요없다.

컨텐츠가 자유롭게 국경을 넘나들면 한국의 작은 출판사는 생존의 위기에 직면하게 된다. 이를 대비하기 위해 먼저 적극적으로 미국의 마블 코믹스와 같은 만화도 들여오고, 일본의 비주얼노벨도 들여오겠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전자책 시대를 맞는 능동적이고 현명한 대응이다.

전자책, 디지털 만화 서비스를 주목하라.

여기서 중요한 점을 하나 짚어보자. 국내 전자책 시장이 지금처럼 답보상태를 보이는 가운데 새로운 활로를 만화책이 열 수도 있다는 점이다.



전자책은 본래 가볍게 다운로드해서 읽은 다음 가볍게 보관하거나 지울 수 있는 게 특징이다. 무게나 형태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활자매체인 책은 자꾸만 마음의 양식과 예술성이라는 이유를 들어 가볍게 보지 말라고만 한다. 상품이면서도 동시에 예술품으로서의 존중을 요구하는 것이다. 

이런 면은 정당성이 있지만 국내 전자책 발전을 가로막는 인식이기도 하다. 책값을 줄이는 데 있어서 분명 분량을 작게, 가격은 싸게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어떻게 예술작품이 화장지나 빵조각같이 쉽게 나눠질 수 있냐는 인식이 강하다. 하지만 만화책은 그런게 그다지 많지 않다. 디지털 만화책은 온전히 하나의 상품이며 그 자리에서 보고 잊어버리는 소비적 문화의 특성이 강하다. 따라서 새로운 매체시장을 개척하는 데 더 유리한 것이다.


학산문화사의 이번 인터뷰를 통해 새삼스럽게 디지털 만화에 대해 기대하게 되었다. 어쩌면 한국 전자책 업계가 만화의 발전을 쫓아가는 그런 상황이 생길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앞으로 디지털 만화 서비스에서 어떤 혁신과 발전이 있을 것인지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