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HP라고 하면 프린터 관련 기업으로 이미지가 굳어있다. 나만 해도 그랬다. 용산 조립컴퓨터가 강세에다가 삼성과 엘지 같은 전통의 제조기업이 강한 한국에서 일반인 들이 느끼는 HP의 위상은 그만큼 한정되어 있다. 엡슨과 함께 프린터 시장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한 기업 정도다.

그러나 IT를 좀 아는 사람이거나 관련업계에 근무하는 사람이라면 HP가 얼마나 긴 역사를 가지고 많은 기술적 업적과 판매량을 쌓아왔는지 잘 알고 있다. 단적으로 말해 애플을 창립한 스티브 워즈니악조차 HP에서 전자계산기를 만드는 일과 안정적 회사분위기를 좋아해서 따로 나오기를 싫어했다고 한다. 지금도 미국에서 HP는 컴퓨터 하드웨어와 각종 개인용, 기업용 솔루션을 함께 취급하는 거대 기업이다.


그러나 바야흐로 지금 시대의 중심점은 애플과 구글에게 넘어가 있다. 이런 때 다소 경직된 기업행보를 보인 HP에 과연 얼마만큼의 매력이 남아있을까? 이런 시대에 HP는 어떤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가를 따지면 잘 모르겠다는 말이 자연스럽게 나온다. HP는 최첨단 칩을 만들지도 않고 스마트폰을 만들지도 않는다. 한때 태블릿을 만들었지만 판매부진으로 중단한 상태였다. 평가가 엇갈리는 칼리 피오리나의 개혁시도 이후로 HP의 행보는 거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지난 10월 15일, 금요일의 청담동 클럽에서 열린 신제품발표회는 이런 상황을 타개하고자 하는 HP의 전략을 잘 보여주었다.



얼핏 보아서는 다른 기업과 그렇게 많은 차이가 나지 않는 평범한 라인업이다. 조금씩 퇴조하지만 여전히 수요가 있는 넷북부터 시작해서 최고급인 17인치 노트북까지 다양한 색상과 가격대 제품이 나왔다.


그러나 정작 내가 주목한 것은 제품 그 자체보다 제품을 이끌고 있는 한가지 컨셉이었다.  ENVY14 비츠 에디션이 바로 그것이다.

유명 뮤지션 닥터 드레와 함께 제작하고 프로듀싱하는 광고멘트 하나를 소개한다. (출처: HP의 광고 팜플렛), 닥터 드레가 직접 코멘트한 말이다.

사람들은 대부분 음악을 온전히 느끼기 위해서 제대로 된 사운드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제대로 많은 분들이 그런 경험을 접하지 못하는 게 현실이죠. Beat by Dr.Dre 오디오가 탑재된 HP ENVY의 사운드를 듣게 된다면 당신을 감동시키는 음악이 어떤것인지 제대로 느낄수 있을 겁니다.

어떻게 보면 그저 흔한 선전문구일 수도 있다.
다소 시니컬하게 말하자면 어차피 돈이 오가고 이뤄진 광고일 뿐이다. 노트북이나 컴퓨터가 무슨 하이파이 오디오도 아닌데 노트북에서 무슨 음질 타령이냐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애플이 역시 그저 컴퓨터용 부품을 조립해서 만든 아이팟이나 아이폰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미국 문화계 역시 하이파이와 거리가 먼 일반 부품을 쓴 아이팟과 아이폰으로 듣는 음악을 유명 뮤지션들이 칭찬하며 광고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결국 이것은 마케팅의 한가지 발전이다. 이제까지 그저 빠른 처리속도와 많은 기억용량 같은 <비즈니스 머신>으로만 팔던 컴퓨터와 노트북이 이제는 음악과 결합한 감성을 이용해 마케팅을 하는 것이 시대의 흐름이 되었다는 것이다. 개별 제품의 성패를 떠나 굉장히 재미있는 현상이다. 애플이 만든 흐름이 업계 전반에 영향을 주는 가운데 HP에서 매우 기민하게 이런 변화에 앞장서는 점이 흥미롭다.
 
더구나 이것은 단지 시늉이 아니다. 따로 설계된 신호처리 기술과 별도의 오디오 부품을 쓰고 기본 제공품으로 전용 헤드폰을 제공하면서까지 음질 향상을 위해 일정 부분을 노력하고 있다. 만일 이 마케팅이 성공한다면 향후 다른 업체에서도 비슷한 방식의 마케팅을 볼 수 있을 것 같다.

HP의 새 노트북  ENVY, 감성 마케팅의 시작인가?

그렇다면 이런 감성 마케팅은 허와 실은 무엇일까.


우선 장점으로는 이제까지 너무도 편중되어 왔던 컴퓨터와 디지털 제품의 기능 위주 전략에 추가해서 감성을 건드리는 사용자 위주의 섬세한 개발과 디자인, 마케팅이 발전한다는 점이다. 모든 컴퓨터와 노트북이 그저 원가 절감을 위한 베이지색상에 저가 플라스틱 몸체만 쓰던 것에서 탈피해서 화려한 색상과 알루미늄, 마그네슘 바디 등 다양성을 가진다. 또한 똑같은 칩과 표준 구성만으로 상표만 다르던 것에서 벗어나 업체마다 개성있는 커스텀 칩과 특성화된 구성을 가지게된다는 점이다. 보다 소비자는 천편일률적인 넷북 같은 구성에서 벗어날 기회를 많이 가지게 된다.


물론 단점도 있다.
기본적으로 컴퓨터 부품과 이를 조합한 제품은 표준화와 양산에 의해 원가가 절감되며 치열한 가격경쟁이 이뤄진다. 애플에 비해 HP의 제품이 동급 사양에서 훨씬 싸다는 점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런 감성 마케팅을 위해 특수하게 제작하는 부품과 소프트웨어, 마케팅 비용은 결국 제품 가격에 더해져 소비자에게 청구된다. 어떻게 보면 감성 마케팅이란 냉철한 소비자의 눈을 예술로 가려서 보다 충동적이고 불합리한 구매를 선동하는 기술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장단점에도 불구하고 기회와 다양성에서 감성 마케팅은 지금 상황에서 보다 많아져야 한다. 감성 마케팅은 애플만 한다고 독점하게 놓아둬서도 안된다. 그런 면에서 이번 HP가 발표한 제품은 주목할 가치가 있다. 닥터 드레를 좋아하든, 아니면 누군지도 모른다고 해도 말이다.

발표회장에서 펼쳐진 감성적인 공연, 매력적인 DJ를 해준 모델 박윤정의 모습을 보면서 감성적 마케팅이 다른 업체에도 확산되기를 바래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