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SKT]



한국은 첨단산업에서 정부와 기업의 관계가 상당히 밀접한 편이다. 담당부처가 관련기업의 목소리를 듣고는 규제를 풀거나 재정을 들여 각종 지원정책을 집행해주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되어 있다. 정부가 규칙을 지키는 심판 역할만 할 뿐  과도한 규제와 진흥정책 같은 개입을 모두 배제하는 미국식 모델과는 상당히 다르다. 그런데 바로 이 점 때문에 공정해야 할 원칙조차 무너뜨리고 기업편만 드는 모습을 종종 보게 된다.

국내 5G 이용자 대부분은 현재 내고 있는 비싼 요금에 비해 떨어지는 속도와 쾌적하지 못한 5G 전용망 연결에 불만을 표시하고 있다. 이런 문제점의 기술적 요인은 대부분 기지국의 부족 때문이다. 특히 속도 문제에 있어서는 5G 도입 초기에 그렇게 홍보했던 28GHz 대역을 실제로 소비자가 이용할 수 있는 기지국에 적용하지 않았다는 점이 결정적인 원인이다. 

사실 정부도 이렇게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어느정도 알고 있었다. 때문에 5G 사업 초기부터 관련 원칙에 의거한 규정을 마련해 놓았다. 이통 3사는 지난 2018년 주파수 할당공고에 따라서 28GHz 기지국 의무 수량인 각 이통사별 1만 5,000개 기지국을 달성해야 한다. 그리고 이 가운데 10%인 1,500개를 2021년까지 달성하지 못하면 할당이 취소될 예정이었다. 그렇지만 작년 통신3사가 구축한 28GHz 대역 5G 기지국은 312개 정도로 집계됐다. 

연말까지 구축하기로 약속한 4만 5,000개의 0.7%에 불과하다. 이를 달성하지 못할 경우 주파수 할당 취소 등 불이익을 받을 수 있다. 원칙대로 한다면 이통사는 주파수 할당 취소 규제를 받아야 한다. 최소한 강력한 경고를 받으면서 올해 초 공격적인 설비 증설을 통해 목표를 달성해야 한다. 그런데 현실은 이상한 편법으로 흘러가고 있다.

이통 3사는 지하철에 공동 구축할 예정인 28GHz 대역 5세대(5G) 통신 기지국 1,500개를 사별 의무구축 수량으로 인정해 달라고 정부에 건의했다. 할당 취소 위기에 놓인 대역 해법인데 그 방식이 기괴하다. 각 이통사별로 기지국을 1,500개 세워야 하는데 공동으로 1개를 만들었으니 그걸 3개로 쳐달라고 하는 건의다. 현행 전파법 또는 주파수할당 공고상 공동구축 수량을 의무구축 수량으로 인정할지에 대한 명확한 규정이 없다는 점을 이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통 3사가 기술적으로는 타사의 망을 빌려 쓰지만 실질적으로 1,500개 기지국을 운용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지하철 데이터 트래픽이 부족하지 않은 상태에서 이통사가 타사의 망을 실질적으로 사용하는 만큼 망 구축 효율성을 고려해 달라는 요구다. 이에 과기정통부는 최대한 의무구축 수량을 구축하려는 노력을 보이라는 말을 하지만 결국 이행계획서를 종합 검토하겠다는 입장을 보였다. 원칙을 지키라는 압박을 하려는 태도가 아니다. 

이통사의 요청은 사실 고민해 볼 것도 없는 편법이다. 이런 식으로 공동 기지국을 세우는 것이 정당하다면 3G, 4G 부터 공동으로 기지국을 세웠어야 했다. 기술적으로는 과당경쟁을 없애고 주파수 혼선도 방지할 수 있는 순작용도 있다. 그럼에도 이통 3사를 나눠서 기준을 정한 건 시장에서 제대로 경쟁하라는 신호였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돈 안되는 28GHz 기지국만 공동으로 만들어서 인정해달라고 한다면 원칙을 만든 이유가 없어진다. 이런 식이면 지하철 뿐만이 아니라 다른 기지국도 공동으로 만들면 되고 그러면 이통 3사의 통화품질이나 기지국 반경이 아무런 차이도 없으며 경쟁도 사라진다.

과연 과기부는 이런 이통사의 편법에 강력하게 경고하고 소비자를 위해 더 많은 기지국을 지으라고 지시할까? 유감이지만 그럴 가능성은 별로 없어 보인다. 

지난 2월 16일, 조경식 과기정통부 2차관은 서울 지하철 6호선 한강진역에 있는 5G 28GHz 기지국 현장을 방문했다. 여기서 KT 관계자에게 구축 중인 장비의 특징과 설치공법을 설명받고는 공사 현장 관계자들의 노고를 치하했다. 그리고는 지하철을 이용하는 국민들이 고품질 통신 서비스를 누릴 수 있도록 5G 28GHz구축에 힘써 주기를 바란다는 당부를 남겼다. 명백한 격려사다. 질책이라면 애당초 현장을 방문할 필요도 없고 이런 당부를 할 이유도 없다. 

분명히 말해보자. 이통 3사는 지금 5G 통신망에서 애초에 약속한 투자를 거의 하지 않는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 거기다 편법까지 써서 주파수 회수를 막으려고 억지를 쓰고 있다. 그런데 이걸 감독해야 할 정부 부처는 원칙을 무너뜨리고는 오히려 투자를 안한 이통사를 격려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피해를 입는 건 누구인가? 성실하게 요금을 내고 제대로 된 5G 서비스를 기다리고 있는 소비자다. 

공정한 경기를 해야 할 시장에서 심판이 기업이란 한쪽 선수만 편들고 나선 셈이다. 정부가 기업을 챙기며 산업을 진흥해왔던 장점이 있다고 해도 이렇게 해서는 안된다. 한국은 이제 선진국이다. 원칙을 제대로 지키면서 소비자와 기업, 정부가 각자의 역할을 충실하게 이행해야 누구도 피해를 보지 않는 좋은 시장을 만들 수 있다. 적어도 편법을 쓰려는 기업을 정부가 나서서 격려해주는 그런 상황은 만들어서는 안된다.